『길가메시서사시』부터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까지 새롭게 톺아보는
산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두렵고도 황홀한 사후 세계의 역사!
영민한 논리와 도발적인 관점으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연구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도 대부분이 믿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후 세계관이 성서에 기반한 개념이 아님을 논증한다. 저자는 심지어 예수조차 그런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고, 지금 믿어지는 것처럼 단일한 사후 세계관이 기독교 내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대신에 서로 경합하는 다양한 관점들이 사회, 문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채택되어 왔음을 밝힌다. 성서와 외경뿐 아니라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이르는 풍부하고 면밀한 문헌 검토와 날카로운 분석, 위트 있는 문체를 두루 갖춘 이 책에서 저자는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익숙한 생각들을 다시 성찰하도록 돕는다.
우리가 죽은 뒤, 우리 자신과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
‘죽음’은 정말로 삶에서 실현되지 않던 정의를 위한 ‘심판’이 될까?
‘천국과 지옥’의 기원, 그리고 삶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가장 지적인 여정!
주변을 둘러보라. 단 하나의 불행도 마주치지 않는다면, 지금 당신이 사는 곳이 이 세계는 아님이 분명하다. 과거에도 지금도 이 세상에는 고통과 불의가 끊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선량한 이들에게 이유 모를 고난이 닥치고, 약삭빠르고 악랄한 이들은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의가 실현될 순간이 오리라는 기대를 멈추지 않았다. 그 기대는 인류 역사의 어느 한순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정의가 이루어질 순간으로 ‘죽음’을 호명했다. 어느 순간, 누군가가 죽음이라는 심판의 때를 기점으로 우리 각각이 천국과 지옥이라는 마땅한 결과를 맞게 되리라는 대안을 떠올린 것이다. 완전치는 않지만 대체로 만족스럽고, 여전히 매혹적인 생각이다. 오늘날 이 생각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신뢰하는 이들은 기독교도일 테고,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대부분 이 생각이 성경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면 믿어지는가? 예수의 가르침 어디에도 천국이란 상과 지옥이란 벌이 없다면 어떤가?
영민한 논리와 도발적인 관점으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연구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도 대부분이 믿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후 세계관이 성서에 기반한 개념이 아님을 논증한다. 저자는 심지어 예수조차 그런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고, 지금 믿어지는 것처럼 단일한 사후 세계관이 기독교 내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대신에 서로 경합하는 다양한 관점들이 사회, 문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채택되어 왔음을 밝힌다. 성경과 외경뿐 아니라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호메로스와 베르길우스의 서사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과 문헌을 경유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이르는 풍부한 문헌 검토와 날카로운 분석, 위트 있는 문체를 두루 갖춘 이 책에서 저자는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익숙한 생각들을 다시 성찰하도록 돕는다.
『길가메시서사시』부터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까지 새롭게 톺아보는
산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두렵고도 황홀한 사후 세계의 역사!
최초로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후 세계가 존재하게 된 때는 언제일까? 아쉽지만 당연하게도 ‘태초’부터는 아니었다. 물론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개념이기는 하다. 정확하게 ‘천국heaven’이나 ‘지옥hell’으로 이름 붙이지는 않았으나, 죽고 난 이들이 갈 곳으로 행복한 천상의 엘리시온과 고통과 허무뿐인 지하 세계 하데스를 구체화한 것은 기원전 7세기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였다. 그리고 호메로스 서사시 속 주인공들이 보았던 절망과 희망의 두 장소는 수 세기가 지난 뒤, 기원전 1세기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보다 명확하게 지난 생에 대한 응보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천국과 지옥 개념에 다가간다.
이 두 서사시인 사이에서 주요한 징검다리가 되었던 이는 흥미롭게도 죽음 뒤엔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던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파이돈」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라며 죽은 뒤에 이루어지는 심판의 장소를 언급한다. 부정한 삶을 살았던 혼들은 거기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방황하게 되지만 고결한 혼들은 ‘신들 곁에서’ 좋은 시간을 보낸다. 또한 특별히 경건하고 고결한 삶을 살았던, 특히나 ‘철학으로 자신을 충분히 정화한 이들’은 더욱 더 좋은 보상을 받게 되리라고 했다. 물론 플라톤은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자기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 믿지는 않으리라고, 하지만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뜻만은 진실하다고 덧붙인다. 당연히 그 뜻은 살아가는 동안 악보다는 선을 택하고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독교적 가르침 속에서 개개인이 죽고 난 뒤 받을 심판과 그 응보로서의 천국과 지옥이 자리 잡는 것은 훨씬 복잡한 논의를 거친, 더 이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 인물이자 기독교의 스승으로서 예수가 남긴 가르침으로 볼 만한 「마태복음」 25장의 뜻은 플라톤을 비롯한 기독교 바깥의 이야기꾼과 사상가 들과 궤를 같이한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영광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던 자에게 돌아간다. 가장 어렵고 소외된 이를 외면하지 않고 돕는 것, 그로써 살아가는 동안 의로움을 행하는 것이 두렵고도 황홀한 약속으로 예수가 이끌고자 한 바였다.
죽음의 예습이 마땅히 “사는” 법이라면, 죽음은 더더욱 두려워할 게 없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뒤집을 합리적이고 건강한 회의론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바가 실제로 참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평생 이 문제를 한 번도 고민하지 않고 지나간다. 우리가 품은 신념과 개념은 그와 다른 가치관을 교육받으며 자란 이들에게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심오한 차원에서 이해”가 된다. 그것이 가장 극명한 영역이 바로 종교의 세계다. 자신이 뼛속까지 받아들인 믿음의 참됨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413쪽)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벌’을 받지?” 괴로움 앞에 쉽게 떠올릴 만한 이 질문에는 고통받는 자를 성마르게 죄인으로 치환하는 논리가 숨어 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 다수는 이미 알고 있다. 삶에는 합리적 사고로 해독할 수 없는 일들로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현존하는 강력한 믿음, 상과 벌로 찾아올 신의 정의라는 믿음에 대해 저자는 묻는다.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영원히 고문하는, 웬 초월적인 사디스트라고 믿으란 말인가?”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온 믿음으로 ‘거듭난 자’가 되었다가, 학문으로서의 기독교를 깊이 탐구하고 ‘거듭 죽은 자’로 돌아온 저자는 믿음 있는 자들이 약속받는 정의를 거듭 회의하도록 촉구한다.
긴 여정의 끝에서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모든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은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란 사실이다. 삶의 끝에 공평하게 맞을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결말이 그것이 정의로운 심판이라서가 아니다. 플라톤은 모든 생의 목표이자 가장 마땅한 삶의 방식을 ‘죽음에 대한 예습’이라고 봤다. 인간의 육신은 언젠가 죽어 없어질 테고, 그렇기에 철학자와 제대로 사고할 줄 아는 모든 사람은 사는 동안 찰나인 육신의 쾌락이 아닌 인간에게 내재한 초월적인 부분, 즉 정신과 영혼이 육체를 초월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 다가올 죽음을 매일 예비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궁극적으로 정신이 육신을 초월하게 될 죽음은 준비된 이에게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운명을 가진 이들이 치열하게 고민한 우리의 죽을 운명을 톺아 가며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은 필멸의 운명을 용감하게 직시해야 한다는, 그래도 된다는 응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