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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 비친 달 (큰글자도서)

천강에 비친 달 (큰글자도서)

  • 정찬주
  • |
  • 리더스원
  • |
  • 2020-06-30 출간
  • |
  • 328페이지
  • |
  • 193 X 286 mm
  • |
  • ISBN 979116026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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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세종이 신미를 살리는 일은 신미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었다.”
연못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지 않는 달빛처럼
시비와 집착을 초월해 우리 글자를 만드는 데 매진한 신미 대사

훈민정음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창제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은 『세종왕조실록』어디에도 없다. 조선 왕조는 건국이념으로서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정책적으로 표방했는데, 따라서 세종은 유학을 숭상하여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는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훈민정음을 드러내놓고 창제할 수 없었다. 유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은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의 도움을 받아 끝끝내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때 세종을 도운,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신미 대사였다.
정찬주의 장편소설『천강에 비친 달』은 당대 최고의 범어(梵語, 산스크리트 어) 전문가이자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임을 밝힌 작품이다. 기존에 훈민정음 창제의 비화를 다룬 장편소설들이 몇몇 출간되어 있지만, 한글 창제의 주역으로 ‘신미 대사’라는 새로운 인물을 내세운 소설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가는 정설로 굳어진 ‘세종과 집현전의 한글 창제설’이 지닌 의문점을 제기하고,『조선왕조실록』,『사리영응기』 등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그동안 학계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신미 대사라는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세종은 신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의 이름을 기록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신미 자신도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스승 함허의 가르침에 따라 부질없는 공명심을 초탈한바, 오직 자신을 진실로 알아봐준 세종의 명을 이행했을 뿐, 자신이 무엇을 도왔다는 마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 했다. 때문에 신미의 공로는 역사 속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최근에 발견된 『원각선종석보』가 신미 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는 결정적인 단서임을 보여준다. 신미 대사가 만든 훈민정음 언해본 『원각선종석보』의 발간 시기는 1438년으로, 세종의 한글창제 반포(1446년) 8년 전이었다. 이는 훈민정음이 이미 8년 전에 비밀리에 만들어져 신미 대사와 수양, 안평 등에 의해서 실험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글 창제와 관련된 유력한 설인 ‘범자(梵字) 모방설’은 신미의 한글 창제설의 사실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는데 조선 초 유학자인 성현의 『용재총화(?齋叢話)』나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는 “언문이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신미 대사의 동생이자 집현전 학사였던 김수온의 『복천보강』과 『영산김씨세보』 역시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산파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또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후 문자 보급을 위해 유교 경전이 아닌 불교 경전을 언해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 대사의 요청 때문이었는데, 이를 통해 불교와 한글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강에 비친 달』은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역사의식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 만들어낸 탄탄하고 웅장한 서사와 역사적 현장에 직접 들어온 듯이 생생한 묘사, 인간사에 대한 밀도 높은 통찰력을 지닌 작품이다. 이를 바탕으로 문학적 ‘허구’를 넘어 역사적 진실의 올곧은 ‘복원’으로 자리 매김하면서 소설이라는 장르의 지평을 새롭게 확대시키고 있다.

“한글 창제(創制)에 있어서 창(創)은 세종, 제(制)는 신미의 몫이었다.”
유불(儒佛) 싸움의 진흙탕 속에서 불(佛)이 살아남아 남긴 우리 글자,
세종이 창안하고 신미 대사가 만든 28자의 훈민정음 이야기

소설은 조선시대 세종 2년(1420) 원경왕후의 4재를 기리는 천도재에 세종이 직접 참석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세종과 신미는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불교가 핍박을 받았다. 불교를 숭상했던 태조 이성계와 달리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으며,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봉쇄되고, 산중 절이나 암자를 불태우는 방화 사건이 해를 거듭하며 터지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을 추종하고 억불 정책을 폈던 태종과 달리 세종은 즉위 4년 후부터 재위 기간 내내 불교를 가까이했다.
세종이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가장 큰 이유는 유교와 달리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글자를 알지 못한 채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겨 우리 글자를 만들고자 했다. 신미 대사는 이런 세종의 의중을 간파해 우리 실정에 맞고 우리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정확하게 옮길 수 있는 쉽고 간단한 우리 글자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천강에 비친 달』은 세종 즉위 2년인 1420년부터 세종이 승하한 1450년까지 30년에 걸쳐 우리 글자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펼쳐내면서, 한글 창제를 둘러싼 갈등 양상과 시대상을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다. 전(前) 왕조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지배 질서의 창출을 위해 숭유억불을 정책적 이념으로 내세우던 조정 대신들과 세종의 팽팽한 대립, 왕명에 따라 작업을 수행했지만 반대 세력들의 계략 속에 생명의 위협을 당했던 신미 대사, 한글 창제를 통해 명으로부터 자주성을 수립하고 백성을 고통 속에서 구제하고자 했던 세종의 민본사상, 또한 세종에게 자비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애민사상을 설파했던 신미의 모습 등이 일필휘지로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더불어 우리 글자를 향한 도정의 질곡 마디마디에 새겨진 불교적 사유는 마치 운수납자의 행보를 따라하듯 구름같이 떠돌고 물같이 흐르며 작가 특유의 담백하고도 유연한 필치로 펼쳐진다.
이 소설에서 신미는 세종이 일러준 상형(象形)의 바탕, 즉 자음은 혀 모양, 입술 모양, 이 모양을 바탕으로, 모음은 천지인을 바탕으로 하여 글자꼴을 만들고, 이 자모에 범자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과 합용, 교합을 통해 우리 글자인 정음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신미 대사뿐 아니라 우리 글자를 만들려는 일념 하나로, 신미 대사,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일부 사헌부 대신들과 집현전 학사들이 협력하고 조력하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처럼 소설은 무지렁이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성, 국가의 정통성과 위신을 바로세우는 우리 글자를 만들고자 했던 세종대왕과 신미 대사를 비롯한 역사적 군상들을 생동감 있게 재현해내고, 그들이 지닌 인간적 고뇌와 방황을 시대적 대의(大意)와 종교적 성찰로 승화하여 묵직한 울림과 감동을 던져준다.

“중생을 위해 정진하는 길, 그것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천 개의 강에 비친 달빛 너울 그 자체인 한글,
그 안에 담긴 자유와 문명을 희구하는 찬란한 진실

이 소설은 한글을 창제하게 된 배경에 『대장경』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느 날 세종은 ‘대장경 외교’에 있어서 지혜를 구하기 위해 함허와 신미를 자신의 침전으로 부른다.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과 일본은 매년 사신을 왕래시키며 화친 외교를 폈고, 숭불(崇佛)로 돌아선 왜국은 조선 절에 있는 『대장경』을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함허는 『대장경』에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다는 거룩한 뜻이 있기에 인쇄된 『대장경』은 물론 해인사가 보관하고 있는 『대장경판』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세종에게도 부처님의 팔만사천 가르침을 다 볼 수 있는 『대장경판』은 아주 중요했다. 그러나 세종은 『대장경』이 모두 한자로 된 것이기에 부처의 가르침이 아무리 빼어난 진리라 한들 한자를 모르는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반문한다. 이에 신미는 모든 백성이 『대장경』이나 유가의 경전을 볼 수 있도록 한자가 아닌 우리 글자를 만들어달라고 세종에게 아뢴다. 이렇게 해서 백성의 눈을 뜨게 해줄 글자의 필요성을 느꼈던 세종은 신미에게 비밀리에 우리 글자를 연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유교 국가였던 당시의 조선에서 세종은 계속되는 왜국 사신의 요구를 물리치고 오직 1질밖에 없는 해인사 『대장경판』을 끝끝내 지켜냈으며, 태조가 발원했던 흥국사 사리전을 중수하고 궁중의 내불당을 인왕산 산자락에 대규모로 신축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우리 글자로 손수 작곡하기도 했다. 『월인천강지곡』은 글자 그대로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듯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가 온 백성에게 드리우는 노래라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두루 미쳐 백성들마다 불교에 귀의하는 마음이 솟구치기를 바랐던 세종의 애민사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신미의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금동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하여 복천사에 시주했으며, ‘우국이세(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란 존호를 신미에게 내리라고 유언했다. 우국이세란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었다. 세종이 숨을 거두기 전 신미에게 주려 했던 이 우국이세의 실체는 바로 훈민정음 창제였다. 이후 문종은 선왕인 세종의 유언에 따라 마침내 신미에게 세종이 주려 했던 호(號)를 내리게 되는데, 그것은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 혜각존자(慧覺尊者)’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러한 승직은 우리나라 시조 이래로 처음 내려진 것이었다.
속리산 복천사로 내려가 평생을 은둔하며 지냈던 혜각존자 신미 대사. 그림자나 연못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려 하지 않는 달빛처럼, 시비와 집착을 초월하여 오로지 우리 글자에만 매진했던 신미 대사가 세종과 한마음으로 바랐던 한 가지는 중생을 위해 정진하는 길, 그것뿐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분열과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다 각별하게 와 닿는다. 소설가 한승원은 이 소설에 대해 “한문 문화에 억눌려 있던 우매한 민초들의 삶을 해방시키고 자유와 문명의 찬란한 꽃을 피우게 한 위대한 자산인 우리 한글이 불교 사상의 한 유산이라는 해석은 우리 삶의 미래에 찬란한 이정표를 제시해준다.”고 평했다. 세종과 신미가 함께 이룬 한글 창제에는 자유와 문명의 꽃을 피워 새 시대를 열어나가려는 열망과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한글 창제에 담긴 한국 불교의 자주정신과 평등사상을 통해 그동안 잊고 지냈던 민족적 자긍심과 긍지를 확인하고, 우리 삶의 근간을 보듬고 살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주요 내용
세종 2년(1420) 8월 6일. 원경왕후의 4재를 기리는 천도재에서 세종과 신미가 만난다. 그날 신미는 스승 함허의 지시에 따라 염불을 외우게 되는데, 맑고 청아한 염불 소리는 당시 어머니 원경왕후를 떠올리며 슬픔에 잠겨 있던 세종을 위로해준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세종은 이른바 ‘대장경 외교’에 있어서 지혜를 구하기 위해 함허와 신미를 은밀히 궁으로 불러들이는데, 이때 신미는 모든 백성이 『대장경』이나 유가의 경전을 볼 수 있도록 한자가 아닌 우리 글자를 만들어달라고 세종에게 제안하고, 이후 세종과 신미는 비밀리에 우리 글자를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세종이 즉위한 지 19년(1437)이 되는 초가을, 신미는 세종이 알려준 글자 원리를 가지고 범자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加劃)을 해가며 글자를 연구한다. 세종 20년(1438). 신미의 나이 36세가 되던 해, 세종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도록 신미를 집현전 학사로 제수한다. 하지만 유신들의 질시와 끈질긴 모함으로 신미는 집현전을 떠나 정음청(正音廳)이라는 임시 관청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사간원의 음모로 자객을 맞은 신미는 목숨을 잃을 뻔하지만 세자와 수양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긴다. 1438년, 우리 글자 28자가 완성되고 나서 처음으로 신미는 『원각선종석보』를 우리 글자로 언해하는 작업을 하고, 바로 그해 『원각선종석보』의 언해본 다섯 권이 출간된다. 이것은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직접 집현전 학사들에게 공개하기 5년 전의 일이었다.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마침내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모아놓고 훈민정음 창제를 공개한다. 세종의 초인적인 인내와 단호한 결단, 신미의 목숨을 노리는 위협 속에서 창제된 훈민정음이었다. 그러나 훈민정음 반포는 자꾸 뒤로 미뤄진다. 때마침 찾아온 중궁(소헌왕후)의 병환도 훈민정음 반포를 늦추는 요인이었다. 몇 년 전부터 세종 또한 눈병과 소갈증, 요도결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게다가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를 따르는 학사들은 하나같이 훈민정음을 굳이 언문이라고 칭하며 세종이 석교에 호의적인 후배 학사들을 총애하고 있다는 점에 큰 불만을 가졌다. 세종 31년 (1449) 12월 6일에는 내불당을 인왕산 산자락에 큰 건물로 지어 낙성식을 했는데, 세종이 불단에 친히 곤룡포를 올리고 손수 작곡한 찬불가를 불리게 했다. 세종 32년(1450)에 세종이 승하하고 이후 신미는 속리산 복천사로 내려가 평생을 은둔하며 지낸다. 문종은 선왕인 세종의 유언을 따라 마침내 신미에게 세종이 주려 했던 호(號)를 내린다. 그것은 바로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碍) 혜각존자(慧覺尊者).’였는데, 우리나라의 시조 이래로 일찍이 이러한 승직은 없었다.


목차


추천의 말 1 소설가 한승원
추천의 말 2 소설가 조정래
추천의 말 3 시인 정호승

1장
만남
기쁜 비
불속에 핀 연꽃
한 잔의 차, 한 조각 마음
구구한 세상 인정
흥천사 천도재
사십이수관세음보살
첫눈
별궁 정담
은부채

2장
강무(講武)
오두막 차
한양 길
야다시(夜茶時)
재회
대장경 1
대장경 2
대장경 3

3장
대자암
귀의
팔상도 1
팔상도 2
집현전 학사
음모
대자암 비밀
무고
왕의 약속
계책
술상

4장
내불당
소쩍새 울음소리
자객
진흙탕 연꽃
『원각선종석보』
특명
신숙주
호불과 배불
소헌왕후
슬픈 훈민정음

5장
괴이한 글자
세종의 찬불가
우국이세(祐國利世)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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