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변화는 일시적이지만, 어떤 변화는 돌이킬 수 없다
근대적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라
코로나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며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기존의 질서와 체제, 트렌드가 무너지고 순식간에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김재인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코로나 혁명’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혁명’은 정치적인 비유가 아니라, 한 체제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다른 체제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건을 뜻한다. 코로나 혁명은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흐름들을 바꿔놓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탱하던 개념과 가치, 사상들을 재고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혁명은 근본적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 확진자의 동선을 공개하는 문제에서 ‘개인의 인권’과 ‘공동체의 안전’이 대치되며 논란이 일었다. 둘 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근본적인 가치다. 하지만 우리가 근본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들은, 사실 특정한 시대적‧지역적 맥락에서 탄생한 경우가 많다. ‘인권’도 마찬가지다. 서구에서는 왕과 교황, 제후 등 폭력적 권력에 대항하며 ‘시민-개인’이라는 개념이 성형되었고 이들에게 인권이 주어진다고 믿었는데, 처음에 시민-개인은 굉장히 좁은 범위(상류-남성-백인-성인)에서만 인정되다가 오랜 투쟁을 거쳐 신분 성별, 종교, 인종 나이 등을 가로지르며 범위가 확산된다. 즉, 인권의 반대편에는 항상 폭정이 전제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독재정권이나 권위주위적인 권력에 맞서 인권 개념이 성립된다. ‘프라이버시’와 ‘안전’이라는 가치 간의 갈등도 이 맥락에서 재해석되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코로나 사태는 의료시스템이나 경제적 건전성뿐 아니라,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사상적 기반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전제해왔던 개념과 가치,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영토’, ‘인권’, ‘사회계약’ 같은 근대적 가치들이 더 이상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적절하게 지탱해주지 못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애써 무시하고 미뤄왔지만, 이제는 정말 새로운 토대를 마련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는 사상적 탐험,
철학자가 찾아가는 철학적 돌파구
김재인 교수는 다양한 텍스트를 분석하며 근대의 정체를 밝힌다. 근대가 성립했던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서 어떤 사상적 결실이 맺어졌는지 소개한다. 우리는 근대인으로서 근대적인 개념과 가치를 내면화하고 살지만, 그 배경과 의미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근대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근대적인 가치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마주하고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다.
김재인 교수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에게서 돌파구를 찾는다. 들뢰즈와 과타리, 흄, 니체 같은 철학자들이다. 이들은 근대를 성찰하면서도 근대 이후를 상상하고, 다가올 시대를 고민했다. 저자는 근대적인 개념인 ‘정부’를 탈근대적인 개념인 ‘거버넌스’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모스’, ‘배치체’ 개념을 활용한다. 근대 민주주의의 근간인 사회계약론의 맹점을 지적하면서 흄이 통찰한 인간의 본성, 공감 능력과 편파성에 주목한다. 근대 사상은 우리가 믿는 가치들의 근거를 제공해주지만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 한계들을 극복하려는 시도들도 꾸준히 일어났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시도들을 평가하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시대에는 어떤 사상적 토대가 갖춰져야 하는지 묻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의무 같은 것도 환기시킨다. 근대화는 주로 서구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서구의 맥락에서 근대 사상이 탄생했다. 그런데 뉴노멀의 시대에는, 뉴노멀의 질서를 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지형에서 근대 사상이 탄생하지 않을까 예측하며, 우리가 그러한 사상과 가치를 구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메르스‧코로나 사태, 촛불혁명 등을 거치며 가장 빠르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17세기 네덜란드, 18세기 스코틀랜드 등 급격한 변화와 발전이 일어나는 곳에서 사상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폭발이 일어날 차례가 된 것은 아닐까?
문과를 없애야 인문학이 산다
파격적인 인문학자가 제안하는 새로운 인문학
김재인 교수는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서양철학을 연구해온 인문학자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는 이과 과정을 밟아서, 미학과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과 계열의 학부에 입학하기도 했었다. 그런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지 이 책에서는 새로운 인문학을 구성하기 위해 문사철 인문학을 없애고, 고등학교 과정에서 문과를 폐지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김재인 교수는 전작에서도, 인문학에서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개념의 오남용을 경계해왔다. 특정한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철학자들 고유의 개념을 맞지 않는 맥락에서 사용하다 보니, 부적절한 개념을 남발하게 되고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인문학이 과학과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자들도 과학적 사고와 훈련을 해서 과학을 교양처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문학에서도 자료를 실증적으로 선별해서 다루는 법, 신뢰도 높은 자료를 서로 비교해서 평가하는 법, 가공된 자료를 자기 관점으로 해석하는 법 등을 훈련해야 한다. 그동안 인문학자들은 알게 모르게 인문학은 과학과 다른 차원, 다른 영역에서 논의된다고 믿어왔고 그러다 보니 과학적 비판이나 방법론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풍토를 바꿔야 한다는 말한다.
새로운 방향으로 인문학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안한다. 첫째는 중등교육과정에서 문과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수학과 자연과학을 포함한 동일한 내용을 필수 공통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 둘째로 학부 과정은 문과와 이과, 예술까지 통합하는 새로운 학문 체계인 뉴리버럴아츠를 도입해야 한다. 셋째로 전문 지식과 기능은 대학원이 떠맡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커다란 방향과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새로운 가치의 초석을 세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논의의 장을 만들고 있다. 이는 단순히 교과 과정 개편에 관한 제안이 아니라 기존의 인문학, 기존의 교육 과정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다.
새로운 사상은 어디에서 탄생할 것인가
뉴노멀 시대 대한민국의 위치와 역할
이 책은 이제 막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코로나19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코로나는 크게 보면 사스와 메르스에서 이어진 감염병 대유행의 가장 파괴적인 국면이다. 이 책에서는 감염병 대유행과 함께, 기후위기, 인공지능이 최근 시작한 시대의 변별적 특징이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역사에서 ‘세기’라는 시대 구분은 숫자에 불과할 뿐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사건으로 보면 시대를 구분해주는 특징들이 있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가 역사적인 의미의 19세기이고, 1914년부터 2019년까지가 역사적 의미의 20세기였다면, 인류는 코로나19 때문에 이제 막 실질적인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혼란스러운 코로나19의 국면 속에서 한국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급박하게 대응하며, 어쨌든 사태를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 소위 서구 선진국들을 보며 당황했다. 사회적인 시스템에서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국가들의 본 모습을 이제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구축한 국가와 사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견고하고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우리가 성장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허술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그동안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이 놓여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성장했던 전략은 선진국의 모델을 벤치마킹하며 선진국을 따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따라 할 것이 없다. 가보지 않은 상황에 대응할 새로운 모델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우리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가장 빠르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회보다 먼저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것을 실험함으로써 보편성 있는 표준을 제시할 수도 있다. 사회적 역량의 축적과 보편성을 만들어내는 경험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사상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차원에서 위기와 기회를 함께 던져주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