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이고,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것이라고 자신 있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누가 그렇게 이야기한들 그 말을 인정하고 공감할 사람이 있을 지도 의문이다. 차별 없이 주어진 기회는 바로 이것이다. 살아봐야 알고, 죽어봐야 안다. 이야기 속의 노인은 결국 자신의 죽음을 최대한 가볍게 해 놓고 떠나는 길을 선택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죽음을 떠맡기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다. 고독사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 치밀함 덕분에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낸다.
?진수성찬을 먹었는데, 더 좋은 성찬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미 먹은 걸 게워내고, 다시 먹었다는 로마인들. 풍요로움의 극한을 달리던 그들 중에 굶어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스스로 육체적, 정신적 감각이 퇴화되어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없을 것이 분명해지면 그리스인 노예에게 명령을 내린다. 식음을 전폐할 테니 나에게 음식도 물도 주지 말라. 어기면 네가 죽는다. 노예는 명령을 지키고, 주인은 굶으며 말라가다가 죽는다.
?아빠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은 안타깝고, 답답하고, 애절하다. 사랑하는 가족사이라도 상대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 슬픔이 순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걸 섞을 수 없기 때문이다. 끝까지 그 선을 지키며 죽은 사람은 매정하다. ‘우리는 진짜 죽지는 않는다’는 말은 육체의 죽음과 의식의 죽음이 다르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누가 알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또 다른 질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