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시계는 1932년 4월 29일 11시 40분에 멈추었고
그들은 그 시간 속에 영원히 봉인되었다.
1932년 4월 29일 11시 40분.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의 연단 위로 물통 폭탄 하나가 날아들고,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일제 군국주의의 전범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일본 천황의 생일이자 그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의 전승기념행사가 열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훙커우 공원 근교의 소학교에서 브라우닝 M1900 피스톨을 손에 쥔 동양계 미국인 청년이 한 일본인 장교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눈 채 수 많은 병력과 대치하고 있다. 그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
대한인(大韓人)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이름 윤봉길. 그리고 ‘중국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칭송받는 훙커우 의거. 이 소설은 독립운동사에서 전무후무한 쾌거로 평가받는 훙커우 의거를 정점에 두고 세계사 격변의 현장이자 이역만리 불모의 땅에서 분투했던 이들(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침잠된 이름이거나 민초)을 소환해 사실과 상상이 혼재되고 사료와 창작이 섞인, 종국에는 가상이 되어버린 글의 얼개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이 책은 훙커우 의거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어찌 보면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이들이 주인공이며 더 나아가 등장인물 간의 인연과 악연 그리고 사연들이 얽히고설켜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내러티브를 선사한다.
1930년대 상하이, 낮에는 총을 겨누고 밤에는 술잔을 기울이다
이곳은 각 조계지 주재원들과 기자들의 아지트일세.
겉으로는 모두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잔뜩 날을 세우고 있지.
-본문 中-
전운이 감도는 1930년대의 중국. 쇠락한 대륙을 삼키기 위한 서구열강과 일본 군국주의의 치열한 세력다툼 속에 중국 산업의 근간이 되는 상하이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주재원들과 특파원 그리고 각국의 스파이들이 활개 치는 또 다른 전쟁터가 된다. 특히 퇴폐미 가득한 상하이의 명소 ‘코튼 클럽’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가늠할 수 없는 인물들이 뒤섞이고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는가 하면 역정보를 흘리는 음모와 술수의 각축장이다.
이 소설은 이처럼 세계사 격변의 충돌 현장이었던 상하이의 한정된 공간을 활자로 재현하여 당대 실존했던 명사들을 소환하고 이들이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구성을 취한다. 이를테면 훙커우 의거에 연루된 한 사건에 주목하고 이를 파헤치는 역할을 하는 소설 속 화자 오자키 호츠미는 일본의 유력 언론인으로서 아사히신문에서 근무했으며, 근세 최고의 스파이로 손꼽히는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일본의 극비문서를 전달한 실존 인물이다.
또한, 오자키의 친구이자 『프랑크푸르트 자이퉁』 특파원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자전적 소설 『대지의 딸』과 같은 명저를 남긴 작가이다. 이들 이외에도, 『1932 상하이』에는 피폐한 고국을 등지고 혈혈단신 상하이로 건너가 이역만리에서 불굴의 의지로 독립투쟁을 펼쳤던 한인 애국단원들의 면면을 소개하며 그중 구국의 영웅 안중근의 동생으로만 알려진 채 역사적 평가가 유보된 안공근을 소개하고 독립투사로서의 그의 활약상을 재조명한다.
그 밖에도 님 웨일즈로 알려진 『아리랑』의 저자 헬렌 포스터와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된 에드거 스노우, 그리고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 등이 본문의 적재적소에 등장해 수수께끼 같은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데 일조한다. 이처럼 『1932 상하이』는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당대 최고의 코스모폴리탄 도시 중의 하나였던 상하이의 낮과 밤을 상세히 재현한다.
모두가 숨죽였던 그날이 다가왔다
전쟁의 암울한 그림자가 늦겨울 빛 속에 낮게 내려앉은 1932년 2월. 스산한 상하이의 황푸강에 닻을 내린 미국 상선 머제스틱 호에서 동양계 선원 조슈아칼린이번드 부두에 하선한다. 그는 절친했던 동료 선원의 유품을 동료의 상관이었던 무역상 벤슨 스나이더에게 전달하고 떠날 예정이다. 하지만 그날 오후 벤슨과의 약속 장소인 코튼 클럽에서 반일운동의 불을 지핀 중국인 기자가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조슈아는 그 자리에서 일본군 특무대 장교 다나카 류세이와 그의 정부인 조선 출신 여가수 라라를 눈여겨본다.
한편, 쇠락한 중국을 삼키려는 일본의 야욕이 점점 노골화되는 가운데 다나카 류세이는 임시정부 산하 비밀조직단체 한인 애국단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조슈아를 이용하기로 하고 한인 애국단의 전략가 안공근 역시 다나카의 연인 라라의 정보를 토대로 일제에 일격을 가할 희대의 작전을 준비하면서 이를 수행할 적임자로 조슈아를 지목한다. 드디어 온 도시에 전운이 드리워지고 세상일에 초연한 듯 세계를 떠돌던 조슈아는 그토록 자신을 옥죄었던 수수께끼 같은 과거의 소용돌이 속으로 운명처럼 이끌리는데… 1932년 4월 29일 모두가 숨죽였던 그 날이 다가왔다.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상상력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쓰인 『1932 상하이』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영화학도 두 명에 의해 본래 영화화를 전제로 한 시나리오 형태로 출발했다. 하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잠시 집필이 중단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본래의 초안을 다듬고 재편집해 이번에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선보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