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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장원제 (양장)

서양의 장원제 (양장)

  • 마르크블로크
  • |
  • 한길사
  • |
  • 2020-04-29 출간
  • |
  • 276페이지
  • |
  • 158 X 230 X 29 mm / 621g
  • |
  • ISBN 9788935664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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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 저항한’ 지식인의 뜨거운 상징
블로크는 양차 세계대전을 겪는 사회적 위기 국면을 방관하지 않고 현실에 맞서 싸우는 실천적 역사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역사를 ‘내일은 어떤 방향에서 어제와 다를 것인가를 예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변화의 학문’으로 여겼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보병대위로 참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무려 53세의 나이로 참전했다. 프랑스군이 붕괴된 뒤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나치에 적발되어 1944년에 처형된다. 그의 죽음은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 저항한 지식인의 뜨거운 상징이 되었다.
이런 그의 행보는 단순히 그와 그의 가족이 유대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는 유대인으로서 성장기에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중대한 위기에 직면한 프랑스 사회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던 이유를 민족 감정만으로는 이해해선 안 된다.
그는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발전시켜 온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그리고 평등 같은 인류의 보편가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공화국이 없이는 국민의 자유도 없다는 공화주의자로서의 신념 또한 지니고 있었다. 또한, 역사는 변화의 학문이라는 소신에서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진보적 세계관, 역사는 현재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현실적 학문이라는 인식에서 오는 현재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과 책임감 등과 같은 세계관과 소신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점은 그의 저서 『이상한 패배: 1940년의 증언』(L’trange d?faite: t?moignage ?crit en 1940, 김용자 옮김, 까치, 2002)과 레지스탕스 활동기간에 쓴 『역사를 위한 변명』(Apologie pour l’istoire ou m?tier d’istorien, 정남기 옮김, 한길사, 1979)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요약하고 정리한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는 역사는 정당하며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데 유용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에 대한 관심과 지식 없이는 과거를 이해할 수 없다는 소신이 피력되어 있다.

비교사적 연구를 통한 영국과 프랑스의 비교
마르크 블로크는 20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의 농촌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경제적 구조의 차이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외관상 영불해협의 프랑스 쪽 땅은 울타리가 없이 탁 트인 개방경지제와 집촌(集村)을 특징으로 하는 풍경이 펼쳐지는 데 비해, 영국 쪽은 울타리로 둘러쳐진 경지제도와 외딴집(散村)으로 된 풍경이 전개된다.”(29쪽) 또한, “농촌사회의 구조에서도 영국은 프랑스에 비해 농업인구의 비중이 훨씬 낮고, 토지 가운데 곡물경작지가 훨씬 적은 대신 목초지의 비중이 높아 곡물의 자급률이 매우 낮으며, 대토지 소유제가 지배적이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농업인구의 비중이 훨씬 높고, “곡물경작지의 비중과 곡물의 자급률이 매우 높으며, 대토지 소유가 존재하지만 중소 규모의 농민적 토지소유와 병존한다.”(29쪽) 블로크는 이렇게 차이가 생기는 이유가 ‘자연발생적’이지 않으며 두 국가의 ‘장원제’를 비교하면서 그 이유를 밝히겠다고 선언한다.
이처럼 이 책에서 단연 돋보이는 연구방법은 비교사적 방법이다. 현대 영국과 프랑스 농촌사회가 지니는 차이의 원인을 시종일관 양국의 장원제 역사를 비교해 고찰함으로써 규명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형태의 장원은 두 부분의 토지로 구성된다. 한 부분은 땅의 소유주이자 지배자인 영주가 여러 가지 노동력을 이용해 직접 경영하고 그 수확물을 차지하는 영주직영지다. 다른 한 부분은 소규모의 농장들로 구성되며 그 보유자는 영주에게 각종 부역노동과 공납을 이행할 의무를 지는 농민보유지다.
장원제는 본질적으로 경제적 차원의 제도다. 하지만 장원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장원제가 중세에 사회구조를 구성하는 기본요소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는 것, 즉 가족, 봉신(封臣) 집단, 도시공동체처럼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기본단위 조직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장원제는 이런 경제적 차원의 이익 도모와 지배권과의 결합이며, 강한 지배권과 경제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권력이 영주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1886-1944)는 『서양의 장원제-프랑스와 영국의 장원제에 대한 비교사적 고찰』에서 ‘장원제의 역사’를 추적한다. 하지만 모든 유럽사회의 장원제를 탐구하지는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로,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닮고 동일한 추세의 영향을 받았는데도 서로 몹시 다른 두 이웃 사회, 곧 프랑스와 영국의 장원제 역사를 탐구한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장원제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고 어떤 사회를 구성하려 했는지를 살펴본다. 더 나아가 장원제가 두 국가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힌다.

마르크 블로크의 삶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 저항한’ 지식인의 뜨거운 상징
블로크는 양차 세계대전을 겪는 사회적 위기 국면을 방관하지 않고 현실에 맞서 싸우는 실천적 역사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역사를 ‘내일은 어떤 방향에서 어제와 다를 것인가를 예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변화의 학문’으로 여겼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보병대위로 참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무려 53세의 나이로 참전했다. 프랑스군이 붕괴된 뒤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나치에 적발되어 1944년에 처형된다. 그의 죽음은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 저항한 지식인의 뜨거운 상징이 되었다.
이런 그의 행보는 단순히 그와 그의 가족이 유대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는 유대인으로서 성장기에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중대한 위기에 직면한 프랑스 사회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던 이유를 민족 감정만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그는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발전시켜 온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그리고 평등 같은 인류의 보편가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공화국 없이는 국민의 자유도 없다는 공화주의자로서의 신념 또한 지니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를 변화의 학문으로 인식했으며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역사는 현재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현실적 학문이라는 인식에서 오는 현재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과 책임감 등과 같은 세계관과 소신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점은 그의 저서 『이상한 패배: 1940년의 증언』(L’trange d?faite: t?moignage ?crit en 1940, 김용자 옮김, 까치, 2002)과 레지스탕스 활동기간에 쓴 『역사를 위한 변명』(Apologie pour l’istoire ou m?tier d’istorien, 정남기 옮김, 한길사, 1979)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요약하고 정리한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는 역사는 정당하며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데 유용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에 대한 관심과 지식 없이는 과거를 이해할 수 없다는 소신이 피력되어 있다.

■ 한길사에서 번역해 출간한 마르크 블로크의 저작
『역사를 위한 변명』, 고봉만 옮김
『봉건사회』ⅠⅡ, 한정숙 옮김
『기적을 행하는 왕』, 박용진 옮김

장원의 구성과 성격

완전한 형태의 장원은 두 부분의 토지로 구성된다. 한 부분은 땅의 소유주이자 지배자인 영주가 여러 가지 노동력을 이용해 직접 경영하고 그 수확물을 차지하는 영주직영지다. 다른 한 부분은 소규모의 농장들로 구성되며 그 보유자는 영주에게 각종 부역노동과 공납을 이행할 의무를 지는 농민보유지다.
장원제는 본질적으로 경제적 차원의 제도다. 하지만 장원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장원제가 중세의 사회구조를 구성하는 기본요소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는 것, 즉 가족, 봉신(封臣) 집단, 도시공동체처럼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기본단위 조직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장원제는 이런 경제적 차원의 이익 도모와 지배권과의 결합이며, 강한 지배권과 경제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권력이 영주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었다.

“길게 따질 필요 없이 우리는 그와 같은 장원제가 조금만 보급되어도 사회구조 전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장원제는 순수한 의미의 노예는 아니지만 주민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예속민 계급 위에 지배자 계급이 군림하는 것을 전제하고, 상당히 강한 지배권력과 경제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권력이 이들 지배자의 수중에서 결합되는 것을 전제한다.”_50쪽

자크리의 난

백년전쟁 중인 1382년에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 지방에서 군인의 노략질, 일부 영주의 영국군과의 타협, 염세를 비롯한 많은 세금의 부당한 징수 등에 대한 항의로 빈민층을 주축으로 일어났다가 그 이듬해에 진압된 농민반란을 말한다. 여기에는 도시의 부르주아층도 가담했다.

비교사적 연구를 통한 영국과 프랑스의 비교

블로크의 비교사적 연구
블로크에 따르면 비교사(比較史)는 상이한 인근 사회들 간의 영향과 역사적 현상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설명하고, ‘일반적인 참다운 원인’ 또는 ‘유일한 실제 원인’을 파악하며, 유사점과 함께 상이점과 개별적 특성 및 차이의 원인을 밝히려 한다. 비교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시공간적으로 동떨어져 있어 상호 간의 관계나 공통의 기원을 찾을 수 없는 사회들 사이에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의 비교다.”(26쪽) 이는 인류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역사 속에서 개별적으로는 상이하지만 같은 부류에 속하는 제도들을 찾아내고, 이 제도들을 비교해 특이하게만 보이는 문화적 요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밝히며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준다.
둘째, “지리적으로나 시간상으로 근접해 기원과 발전 과정의 작용요인을 공유하고 서로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들의 비교다.”(26쪽)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접성과 동시대성 때문에 동일한 거대 요인들의 작용을 받아 발전하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공통의 기원을 지니는 동시대의 인접 사회들을 견주어 연구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비교
그는 20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의 농촌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경제적 구조의 차이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외관상 영불해협의 프랑스 쪽 땅은 울타리가 없이 탁 트인 개방경지제와 집촌(集村)을 특징으로 하는 풍경이 펼쳐지는 데 비해, 영국 쪽은 울타리로 둘러쳐진 경지제도와 외딴집(散村)으로 된 풍경이 전개된다.”(29쪽) 또한, “농촌사회의 구조에서도 영국은 프랑스에 비해 농업인구의 비중이 훨씬 낮고, 토지 가운데 곡물경작지가 훨씬 적은 대신 목초지의 비중이 높아 곡물의 자급률이 매우 낮으며, 대토지 소유제가 지배적이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농업인구의 비중이 훨씬 높고, “곡물경작지의 비중과 곡물의 자급률이 매우 높으며, 대토지 소유가 존재하지만 중소 규모의 농민적 토지소유와 병존한다.”(29쪽) 블로크는 이렇게 차이가 생기는 이유가 ‘자연발생적’이지 않으며 두 국가의 ‘장원제’를 비교하면서 그 이유를 밝히겠다고 선언한다.
이처럼 이 책에서 단연 돋보이는 연구방법은 비교사적 방법이다. 현대 영국과 프랑스 농촌사회가 지니는 차이의 원인을 시종일관 양국의 장원제 역사를 비교해 고찰함으로써 규명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의 현대 개방경지와 집촌 풍경(왼쪽)
영국 서식스 지방의 현대 인클로저와 외딴집 풍경(오른쪽)

프랑스의 장원제는 집촌을 특징으로 하는 농촌구조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은 장원제를 해체시켰고, 그 결과 이런 풍경이 조성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성문법과 관습법
영국의 장원제는 프랑스보다 늦었다. 따라서 확실히 프랑스보다 더 철저한 장원조직을 갖추게 되었고 가난한 다수의 농민 계급이 많이 생겼다. 이로 인해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용이해졌으며 영국의 영주는 토지 소작료에 대한 의존도가 프랑스의 영주보다 더 낮아지게 되었다.
또한, 영국의 왕권이 프랑스보다 훨씬 강했는데 성문화된 법을 지니고 있지 못한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윌리엄 정복왕과 그의 직계 왕들이 유례없이 빠르게 성문화된 법을 구축해나갔다. 이런 ‘성문법의 정착’으로 영주와 영주의 지배 아래 있는 대다수 농민들 사이의 관계도 법적으로 고착화되었다.
영국의 장원제 역사에서 결정적인 단계는 대단히 강력했던 왕권과 여전히 세력이 매우 강했던 영주 계급 사이에 이루어진 일종의 암묵적인 협정이었다. 이에 따라서, 재판권을 장악하고 있던 영주는 관습을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적용할 수 있었으며 다수의 농민보유지 보유자의 세습적인 권리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영주가 대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반면 관습법에 의존한 프랑스에서는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해서 지니는 권리가 몹시 강했다. 토지의 세습적 성격을 인정하는 프랑스의 관습이 국왕재판소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에서는 중소규모의 토지가 영국보다 많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백년전쟁의 영향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그 전쟁의 후반에 참혹했으며 사실상 인구절멸로 이어졌다. 학살을 모면하고 살아남은 농민은 도망가거나, 숲속과 큰 강의 굽이진 곳에서 오두막을 급조해 살았다. 전쟁이 끝나고 농촌사회를 재건하는 와중에 영주의 관심사는 소작료 납부자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의 급격한 감소로 영주는 농민을 유치하기 위해 과거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제법 자주 제시해야 했다. 영주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들의 소작료 수입을 만회하는 쪽을 선택해야 했고 농업프롤레타리아 형태로 된 노동력이 많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는 토지의 소작료에 대한 프랑스의 의존도가 영국보다 높아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목차


서양의 장원제
프랑스와 영국의 장원제에 대한 비교사적 고찰

프랑스와 영국의 장원제에 대한 마르크 블로크의 비교사적 연구 |
이기영ㆍ15

서론
1. 현대 프랑스 농촌과 영국 농촌의 대조적 모습ㆍ37
2. 프랑스의 장원과 영국의 장원ㆍ44
3. 연구방법ㆍ50

제1부 초기의 고전장원제: 카롤링왕조 시대의 프랑스 장원과
노르만왕조 시대의 영국 장원

제1장 카롤링왕조 시대의 고전장원ㆍ5
1. 사료ㆍ55
2. 영주직영지ㆍ59
3. 농민보유지ㆍ76
4. 신분ㆍ84

제2장 11세기 영국의 장원ㆍ3
1. 영국 농촌사의 기본적 특성ㆍ93
2. 『둠즈데이북』과 ‘장원’이라는 말ㆍ106
3. 신분ㆍ113
4. 장원제의 강제적 실시ㆍ120

제2부 11-13세기의 장원제: 장원농민의 법적 신분과
장원 경제구조의 변동

제1장 법률의 변천과 장원농민의 신분변동: 프랑스를
중심으로ㆍ25
1. 9-12세기 프랑스의 법률변천ㆍ126
2. 장원농민의 신분변동과 농노 신분의 형성ㆍ130

제2장 재판권과 장원농민ㆍ41
1. 프랑스의 재판권 변화추이와 장원농민ㆍ143
2. 영국의 재판권 변화추이와 장원농민ㆍ152

제3장 장원 경제구조의 변동ㆍ57
1. 부역과 공납의 변화ㆍ158
2. 영주직영지의 축소ㆍ163

제3부 14세기 이후 경제상황의 변화와 장원제의 귀결

제1장 중세 말과 근대 초 경제상황의 변화와 장원제ㆍ 73
1. 14-15세기의 위기와 장원조직ㆍ173
2. 화폐가치의 변동과 영주의 소작료 수입ㆍ179
3. 가격혁명과 영주의 소작료 수입ㆍ188

제2장 영국 장원제의 귀결ㆍ93
1. 영주직영지의 상당한 잔존ㆍ193
2. 농민적 토지소유의 쇠퇴ㆍ205
3. 정치적ㆍ사회적 세력관계의 변화ㆍ209

4. 인클로저와 장원제의 해체ㆍ212
인클로저: 총론ㆍ212
인클로저의 역사와 장원제ㆍ217
인클로저의 결과와 장원제ㆍ227
5. 종합적 결론: 장원제가 영국의 역사에 미친 영향ㆍ237

제3장 프랑스 장원제의 귀결ㆍ39
1. 영주 계급의 변화ㆍ240
2. 영주 계급과 농민 계급에 대한 군주정의 태도ㆍ242
3. ‘영주적 반동’ㆍ245
옮긴이의 말ㆍ255
찾아보기ㆍ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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