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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개정판

포옹-개정판

  • 나여경
  • |
  • 전망
  • |
  • 2020-03-05 출간
  • |
  • 264페이지
  • |
  • 134 X 192 X 19 mm /300g
  • |
  • ISBN 978897973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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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대표 작품]
새로 이사한 곳은 한적한 주택가에 들어선 3층짜리 건물 2층이었다. 같은 동네를 뱅뱅 돌던 이동이 이번에는 그 지역을 벗어나 이뤄졌다. 있던 모양 그대로 옮겨준다던 포장이사센터의 광고 문구는 거짓말이었다. 5명의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이삿짐 중에 조심해야 할 유리 액자가 많다는 것에 불만을 늘어놓더니 두 방에 나누어 듬성듬성 짐을 정리하고 방 하나는 잡다한 물건을 쌓아 창고를 만들어놓고 가버렸다. 방안 여기저기 어질러 놓은 짐들이 마음을 잡지 못하고 서성이는 것처럼 보여, 나는 약간 우울했다.
기획물의 의뢰를 받아 사진을 제공하거나 찍어놓은 사진 중에 포맷이 맞으면 보내주는 일은 아직 젊은 내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했다. 꾸준한 일거리가 없어 매번 집을 정리해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생활이 이사 가는 곳마다 어두운 방처럼 암담하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가끔 내 남은 생이 얼마인지 몹시 궁금했다. 계획적이지 못하고 보장되지 못한 미래를 꾸려간다는 일이 피곤하고 부질없게 느껴졌다.
잠시 방에 누워 눈을 감고 위안거리를 생각했다. 문에 쳐놓은 발 사이로 안을 기웃거리는 2층 남자를 다시는 안 봐도 된다는 것, 수시로 고음 불가 창법을 구사하는 청년의 노래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 집 앞 슈퍼를 가도 창문을 열고 내 행동을 살피는 101호 여자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사 오기 전 살던 집의 환경을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이사한 곳의 안방은 거실과 다른 방들에 비해 건물이 앞을 막고 있어 더 어두웠다. 바람을 막기 위해 창문에 설치한 이중 암막 커튼이 드리워지면 마치 암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 쪽 면을 사진으로 도배하고 나무 패널을 설치해 사진 액자를 올려놓은 방의 분위기가 그런 인상을 더 짙게 했다. 사진이 붙거나 걸린 벽 밑으로는 긴 탁자에 네 대의 카메라가 앉아있다. 롤필름을 썼던 초창기 카메라부터 최근에 구입한 DSLR까지. 그나마 나에게 위안을 안겨주는 카메라를 보면 든든한 친구처럼 기분이 좋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영원한 시간을 선사하는 카메라에 나는 매번 반하고 만다. 가끔 벽에 걸리거나 사진첩에 있는 사진을 볼 때면 그것을 찍었던 카메라와 연결시켜 그 당시 느꼈던 감흥을 기억해 내곤 하는데 그 순간만은 아무런 잡념이 섞이지 않고 편안했다. 카·메·라, 라는 발음조차도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언젠가 K에게 “카메라”해 봐, 왠지 ‘밀크카라멜’을 먹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지 않아, 라고 했다가 머리에 살짝 손가락알밤을 맞은 적이 있다. 셔터만 누르면 그대로 작품이 됐던 K를 두고 우리는 카신, 도신, 이라고 불렀다. 그도 어디선가 아직 사진을 찍고 있을까.
“카메라, 라는 말은 어두운 방을 뜻하는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비롯됐어, 예전의 카메라 옵스큐라는 그 내부가 지금의 방만 했어. 그렇게 커다란 크기였던 카메라 옵스큐라가 점차 작아지고 휴대가 간편한 지금의 카메라와 같은 형태가 된 거지.”
K에게 사진을 배웠다. 자신이 어두운 방에 갇히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는 K의 말을 듣고 사진이, 또 카메라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사진 잘 찍는 K가 멋져 보여 그를 따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유가 집으로 쳐들어온 건 어느 잡지사에서 부탁한 사진을 찍기 위해 출사지를 물색하다말고 ‘막 살아버린 날들’ 영화를 보고 있을 때였다. ‘막 살아버린 날들’은 영화 ‘아비정전’의 영어 제목이다.
영화 화면을 보며 잠시 멈칫하던 유가 이 방 저 방 휘둘러보더니 근데 왜 이렇게 집이 어두워, 그래 여긴 맘에 들어, 하고 말했다. 나는 어두운 방에 불을 켜고 DVD 플레이어를 눌러 영화를 정지시켰다.
이종사촌 유는 불경기 중에도 지칠 줄 모르고 돈 잘 버는 남편 덕에 늘 친척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동생이다.
“이사 넘 자주 하는 거 아니냐고?”
대답 없는 날 향해 유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조수미, 박지성은 수시로 나라를 옮겨 다니며 이동하는데 난 고작 남구에서 남구로 1년 만에 옮겼는데 뭘… 현대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이동하면서 살 수밖에 없잖아.”
내 말에 유가 픽, 하고 웃더니 그래, 노숙자나 트럭운전사도 이동하면서 길거리에 허비하는 시간이 태반이지, 했다. 유의 말은 수시로 칼이 되어 내 살을 벴다. 이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사한다는 내 말에 유는 사람이 사람에게 관심 갖는 게 당연하지, 이층 남자가 좀 쳐다보고 101호 여자가 관심 좀 가지면 어때, 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사람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지 못한다고 항상 핀잔을 주며 쓸데없는 사진 그만 찍고 좋은 남자 만나 연애나 하라고 부추겼다. 나는 마치 동네 아무개 이야기 하듯 인정 없이 툭 던지는 유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에 달고 사는 세상 뭐 별거 있는 줄 알아, 라는 말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보고 싶지 않았다.
“나라고 머, 언니 보고 싶은 줄 알아?”
“뭐?”
“지금 날 안 보고 살 수 없나 그런 생각 안 했어?”
“어떻게 알았어?”
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유가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유의 볼 한 쪽이 심하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유의 오래된 버릇, 아니 ‘틱’ 증상이었다. 자라면서 점차 사라졌던 틱 증상이 또 다시 나타나는 것일까.
유의 틱 증상은 중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보통 어려서 증상이 나타나고 나이를 먹으면서 사라진다는 틱 증상이 유에게는 늦게 나타났고 오래토록 사라지지 않았다. 이상한 건 학교 친구들은 유가 ‘틱’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자신의 장애를 숨기기 위해 유가 친구들과 말을 섞지 않고 지내나 보다 하고 무심히 넘겼다. 그래도 언제나 유의 씰룩거리는 볼이 마음에 걸렸다. 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엄마도 와 보고 싶어 해.”
유의 말에 가슴 한 쪽이 뻐근해져 왔다. 나도 이모가… 보고 싶었다. 몸이 불편한 이모는 유에게 받은 용돈을 차곡차곡 모았다가 내 주머니에 넣어 주곤 했다. 그 돈을 거절하고 돌아오는 내 뒷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할 이모를 생각하고 나는 이모를 보러 가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온통 사진뿐인 벽과 액자, 탁자 아래 놓인 카메라와 렌즈, 삼각대 등을 눈으로 훑던 그녀가 말했다.
“왜 너는 사람은 안 찍어, 니 사진 보면 맥이 풀려, 사람이 있어야 생동감도 있고 살아있는 것 같지. 아니 집이 뭐란다고 온통 집 사진이야, 앙꼬 빠진 찐빵 같아.”
기분이 나쁘면 갑자기 호칭을 바꾸는 건 유의 특기였다. 나는 차라리 언니라는 호칭을 쓰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유는 평상시 나를 꼬박꼬박 언니, 라고 불렀다. 그러다 갑자기 유의 너, 라는 호칭을 들으면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이 밀려왔다. 간혹 유가 교묘히 그런 내 기분을 알고 일부러 언니라는 호칭을 쓰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 기분은 아랑곳없이 유가 계속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람들한테 관심을 안 두면서 무슨 사진을 찍는다는 거야. 결국 사진도 사람 사는 이야기 아니야?”
거기까지만 했어도 좋았다. 그런데 결국 그녀는 자기 할 말을 다 뱉어냈다.
“그래서 니 사진은 감동이 없어.”
유는 오기 싫으면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보내, 라고 말하며 현관문을 꽝 소리 나게 닫고 가버렸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다 DVD 플레이어 버튼을 눌렀다. 생모를 뒤로 하고 아비가 쓸쓸히 돌아서 가고 있었다. 유가 유난히 싫어하는 장면이다. 나는 영화 ‘아비정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줄기차게 보는 영화가 아비정전이다.
막 중학생이 된 유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이 본 영화가 아비정전이었다.
유일하게 영화보기라는 취미가 같았던 유와 나는 휴일,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아비정전’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유가 집 앞 명작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팬티 바람에 맘보춤을 추는 아비를 따라 춤을 추던 유는 흥미롭게 영화를 봤지만 나는 별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마음 둘 데 없어 방황하던 아비가 생모를 뒤로 하고 돌아설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우는 날 멍하니 바라보던 유가 내게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내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 그런 동네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대형 마트와 근접한 아래 주택단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주민센터에 전입신고를 하고 산책을 하기 위해 동네를 한 바퀴 돌던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을 보게 되었다. 산책로처럼 조성된 계단을 따라 오르자 ‘안동네 벽화거리마을’이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안동네, 라는 평범하지 않은 이름과 벽화거리.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고 있는 듯했다. 벽화 그려진 마을은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과 골목이 그야말로 혈관처럼 뻗어있었는데 그 혈관을 타고 조금만 걷다보면 커다란 암덩이처럼 무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덤 옆에 지은 집의 허술한 담과 묻어두고 싶은 사연을 덮듯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넝쿨의 잎사귀가 빛을 찾아 골목을 내달리고 낮게 자리한 집들 위로 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있는 꽃 그림, 그네 타는 아이와 목이 긴 기린 등 진한 원색의 그림들이 허름한 마을로 가는 눈길을 낚아챘다.
골목을 빠져나와 앞쪽 건물의 곱게 꾸며 놓은 화단을 바라보는데 그 또한 화단을 가장한 무덤이었다. 방으로 보이는 창문 바로 아래였다. 창문을 열면 무덤이 있는 집이라니. 조금 더 발길을 옮기자 두 기의 무덤이 연달아 어느 집 출입문과 맞닿아 있었다. 골목을 비껴가는 모퉁이에도 무덤이 보였다. 길게 놓인 나무 의자에 머리 하얀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앉은 의자 끝에 가만히 앉았다. 앞집 축대 옆에 서 있는 나무에서 잎사귀 하나가 떨어져 허공을 느리게 맴돌다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나뭇잎 앉은 자리, 옹기종기 자라고 있는 쑥부쟁이 옆에 바닥으로 꺼질 것 같은 낮은 봉분이 보였다. 바람이 불자 보랏빛이 살짝 도는 쑥부쟁이가 살랑살랑 허리를 흔들었다.
할머니가 나를 건너다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 힘을 얻은 나는 저 무덤들은 주인이 있나요, 하고 물었다.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고 그래, 주인 있는 무덤은 명절이면 와서 절도 하고 차례 지내고 가.
저런 무덤 보면 무섭지 않으세요?
할머니의 대답에 이어지는 내 물음.
“예전에 새끼들하고 복닥거리고 살 때는 무서울 때도 있었지. 죽은 구신이 내 집에서 나가라고 무덤에서 일어나 나올 것도 같고 말이야. 흐흐흐 지금은 하나도 안 무서 무섭긴 뭐가 무서버, 무덤에 혼자 누운 구신이나 방안에 혼자 누운 내나 뭐 다를 게 있다꼬. 혼자 누우면 딱 맞는 둥그런 지붕이 아담하고 을매나 이쁘노.”
골목을 돌고 돌아도 그 길이었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데 나는 같은 골목을 몇 번째 계속 돌고 있었다.
안동네에서 찍어 온 사진들을 기존의 집 사진 옆에 줄줄이 매달았다. 예상 밖의 사진이었다. 내 사진의 단골 메뉴는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창 넓은 집들이 주류를 이뤘다. 내가 집이나 집이 있는 풍경만을 찍게 된 건 이모와 함께 살던 집을 나와 독립하면서부터였다.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집에 들어서면 마치 내가 무덤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럴 때 주홍빛이 넓은 창에 가득 비치는 집 사진을 보면 기분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행복감이 밀려왔다. 보이지 않는 집 안 풍경을 상상하는 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돌아올 가족을 기다리는 안주인이 된 듯한 포근함. 마치 그 집의 주인이 나인 것처럼….
유는 왜 사람을 찍지 않느냐고 사진에 인물이 없으니 생동감도 감동도 없다지만 사람을 찍은 사진에서는 왠지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듯 했다. 그 냄새를 견딜 수 없었다.
내 카메라 안에 사람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모텔로 보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와이셔츠 소매 단추를 풀고 있는 남자 사진이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했고 죽는 순간까지 곁에 있었으면 했던 남자, K였다. 보고 싶어 입 맞출 때도 눈 감지 못하던….
사진 속 그 남자 등 뒤로 침대가 보였고 침대 옆의 옷걸이에 유가 즐겨 입는 분홍색 원피스가 곱게 걸려 있었다. 마치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것 같았다. 유의 솜씨였다. 그 사진을 본 후론 사람이 찍힌 사진을 보면 이상하게 역한 냄새가 났다.
이모에 대해 잊고 있던 기억을 유가 되살려 주었다. 이모와 같은 행동으로 또 한 번 내게 상처를 입힌 유와 한 집에 살 수 없었다. 유를 더 용서할 수 없었던 건 내가 쳐다보기에도 아까웠던 K를 버리고 돈 잘 버는 남자를 택해 결혼했다는 것이다.
이모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행복하지 못했다. 아니다, 엄마 아빠는 나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라면서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딱 한 번, 싸운 적이 있었는데 죽기 며칠 전이었다.
그날 엄마 아빠는 언성도 높이지 않고 별다른 말도 안 했지만 그들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된 나는 왠지 엄마와 아빠가 서로의 가슴을 긴 칼로 깊이깊이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제와 그럴 맘이 생기디, 니들이 인간이야? 엄마의 이를 가는 듯한 낮고 매정한 소리, 한숨을 쉬는 듯한 아빠의 긴 호흡과 뒤섞여 나오는 너 그럴 때마다 죽고 싶어, 그만해, 라는 짧은 말. 그뿐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친척 결혼식에 함께 가다 버스 전복 사고로 죽고 나서 상가에 모인 친척들은 날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등을 다독였지만 그들이 내두르는 혀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사람들은 엄마 아빠를 두고 징그러운 인연이라고 했다. 부부가 한 날 한 시에 죽는 것만큼 더한 연은 없다느니, 동생이 낳은 애까지 기르면서 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느니, 지가 뿌린 씨 지가 거둬 기르겠지, 라는 이야기들을 남들 듣지 못하게 속살거렸지만 상을 치르는 3일 내내 그 말들은 상가를 떠돌았다.
유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왠지 안동네를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유는 내게 집에 한 번 다녀가라고 보챘다. 이모가 보고 싶어 한다고. 나는 무심하게 알았어, 바쁜 일 끝나면 한번 갈게, 라고 말했다. 바쁜 일이 뭔데? 유의 목소리가 좀 격앙되어 있었다. 맨날 하는 일이지 뭐, 하는 내 말에 유는 휴,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 후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던 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너 정말…, 엄마 보러 집에 한 번 오랬잖아!”
신경질적으로 급히 현관문을 밀고 들어온 유가 말했다. 전화를 끊은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유가 집으로 찾아왔다. 문을 잠그고 들어서는 날 바라보며 유는 마치 후려치기라도 할 듯 주먹을 쥔 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차 마셔! 내 말에 유가 나를 힐긋 쳐다보더니 찻잔을 들었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연초록색 장미 차는 신경과민으로 불안한 유의 마음을 진정 시켜줄 것이다. 나 역시 찻잔을 들고 장미 차의 향내를 오래 들이마셨다.
“니가 사람 마음을 얼마나 헤집어 놓는지 넌 모를 거야.”
냉랭한 공기를 타고 건너온 유의 말이 내 찻잔에 물방울처럼 똑똑 떨어졌다.
고개를 들던 나와 찻잔을 입에 댄 채 나를 바라보고 있던 유의 눈빛이 부딪쳤다. 얼른 내게서 시선을 거둔 유가 새롭게 찍은 안동네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이젠 하다하다 별…혼잣말처럼 낮게 내뱉는 유의 말소리를 듣던 나는 다소 거칠게 잔에 찻물을 부었다.
“너, 내가 초등학교 때 얼마나 머리카락을 기르고 싶었는지 모르지? 엄마는 밥 하고 우리들 준비물 챙겨주느라 바쁜 아침시간에 니 머리카락 땋고 묶고 예쁘게 모양내면서 더 바빴어, 품에 안긴 듯 엄마 앞에 앉아 머리에 방울 다는 널 보며 내가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넌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야. 그렇게 니 긴 머리카락을 예쁘게 묶어주던 엄마가 나는 항상 단발로 잘라줬잖아. 학교에서 내 별명이 귀밑 3센티였던 거 너 아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의 별명…, 단발… 생각해 보니 내 머리카락이 짧았던 적은 없었다. 항상 모양내기 좋은 길이였다. 언제나 치렁치렁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니는 유를 나는 새삼스럽게 쳐다봤다.
그래서… 그래서 유는 내 소중한 사람이었던 K를 빼앗고 싶었던 걸까.
“너덜너널해진 실내화에 주머니 떨어져 나간 해진 체육복을 입고서도 니 하얀 실내화와 체육복을 탐낸 적 없어. 난 엄마 웃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았으니까. 엄마가 제일 기분 좋게 웃을 때가 언제였는지 너 알아?”
나는 말없이 찻잔 놓인 탁자 위에 동그라미만 그리고 있었다.
“니가 뭘 조금만 잘 해도 엄마는 기분 좋아했어, 니 기분이 상해 있거나 밥을 먹지 않으면 안절부절 불안해하고, 어렸을 때 너 까딱하면 밥 안 먹고 토라져 있었잖아, 엄마는 그저 니가 잘 먹고 잘 웃으면 세상에 바랄 게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 관심은 항상 너였어, 내 틱 장애도 너 때문에 생긴 거 모를 거야. 첨엔 엄마 관심을 끌려고 시작했는데… 근데 그게 어느새 버릇으로 굳어져 버리더라.”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찻잔만 홀짝였다. 유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넌 뭐야? 유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져 있었다.
“영화에서 껄렁껄렁한 놈이 지 엄마 찾아다니는 장면이나 보고 눈물 흘리고, 그런 널 보며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아니, 엄마가 그렇게 극진하게 잘 해 줘도 아무 소용없었던 거야, 그래 무덤처럼 어두운 방에서 이렇게 혼자 사니 좋디, 너 나가던 날 엄마가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울었는지 알기나 해, 전세금 까먹으면서 이사 다니기 바쁜 주제에 집 나가 한번 찾아와 보지도 않고…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니?”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만 가, 피곤해.
“… 엄마가 아무래도 이상해, 날 너로 착각하는지 자꾸 나한테 이정아, 이정아 하고 불러. 그러니까 엄마 보러 내일이라도 당장 와, 알았어?”
그녀는 끝내 내 대답을 듣겠다는 듯 뚫어지게 날 쏘아보았다. 유의 한 쪽 볼이 심하게 씰룩거렸다.
유가 돌아간 지 30분쯤 지나 전화를 걸어왔다.
“… 난 엄마 병이 더 심해졌으면 좋겠어. 널 영영 못 알아보게 됐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한테는 더 좋을 거야.”
유가 말로 내려치는 칼은 항상 가슴 깊숙이 박혀 살점을 한 움큼씩 도려내는 듯했다.
휴일. 현관에 쳐놓은 성긴 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거실 바닥에 일렬로 누워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던 나는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섰다.
조붓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길게 이어진 시멘트 담을 타고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들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마치 나를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바람에 펄럭이던 옷가지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벽 쪽으로 최대한 몸을 밀착시켰다. 좁은 골목을 지나는 나를 위해 길을 넓혀주는 것 같았다. 낡고 허물어질 듯 아슬아슬한 벽을 타고 뻗어있는 넝쿨의 잎사귀가 집집마다 무성했다. 산동네 바람이 키우는 시간의 기록….
골목을 빠져나오자 발밑으로 슬레이트 지붕이 나타났다. 그 지붕보다 키가 더 큰 나무의 가지가 어깨에 팔을 올리듯 내가 딛고 선 땅 위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키 큰 나무 아래 옹기종기 핀 들국화의 노란 색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들국화 향에 홀린 듯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국화 옆에 낮은 봉분이 보였다. 언뜻 보면 봉분이 낮아 무덤이 아닌 것처럼도 보였다. 바람이 국화 향을 몰고 마을로 내달리듯 스쳐갔다.
벽화를 구경하며 위쪽으로 올라가니 ‘돌산공원’이 나타났다. 허름하고 을씨년스러운 마을과 달리 정갈하고 고급스럽게 단장되어 있었다.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공간. 단풍 든 키 큰 나무마다 새들은 떠나고 형형색색의 예쁜 새집만 덩그러니 매달려있었다.
“사진 찍으러 왔는가, 이짝 사진 찍는다꼬 많이들 오는디.” 화들짝 놀라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나를 보며 할머니 세 분이 휴, 한숨을 돌리며 의자에 앉았다. 내 사진도 많이 찍어갔는디 보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드만, 할머니 한 분의 말에 사진 워따 쓸라꼬, 하며 옆의 할머니가 핀잔을 놓았다.
나는 스스럼없는 할머니들의 말에 궁금한 속내를 드러냈다. 여기서 언제부터 사셨어요? 내 말에 가운데 앉은 할머니가 말했다.
“뭐 할라꼬?”
“음… 그냥 궁금해서요, 국화꽃이 참 탐스럽게 피었어요.”
울타리 아래 무리지어 피어있는 국화꽃을 보며 내가 한마디 하자 “여는 국화만 잘 되는 줄 아는가. 고추, 배추, 무, 토마토 심는 족족 잘 되제.”라는 할머니의 대답이 돌아왔다. 무덤가에 핀 노란국화가 마치 할머니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이 바람에 가만가만 몸을 놀렸다.
내사 여기 들어와 산 지도 벌씨로 50년이 넘어가는구먼, 하고 할머니 한 분이 살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연탄 배달하던 영감 월급에서 월세 내고 나면 생활이 안 되는 거라. 그래 월세 낼 필요 없는 여기로 와 살게 된 거지. 가마니 깔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 바닥을 다지고 판자로 지붕과 벽을 만들어 살았는디 비가 오면 흙탕물로 범벅이 됐지. 흐흐흐 우리 첫째 낳을 때도 비가 모지락시럽게 왔는디 내 손으로 태를 끊고 피범벅인 아를 안고 을매나 울었던지. 질긴 게 목심이라고 그래도 여서 자식 셋 낳고 살았어.”
거기까지 말한 할머니가 오른팔을 올려 소맷부리로 눈물을 훔쳐내며 에고 마를 때도 됐구마는 주책없이 또 눈물이 나오는구먼, 했다. 곁의 할머니가 우는 할머니 등을 토닥이면서 덩달아 눈물을 닦아냈다.
“자녀분들은 다 잘 사시지요?”
멀리 나무 뒤에 숨은 벽화 속 꼬마를 바라보던 나는 일부러 조금 높은 톤의 목소리로 물었다.
나와 제일 먼 쪽에 앉은 할머니가 눈물 흘렸던 할머니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 할마씨는 첫째 아들이 장만한 요 아래 아파트 들어가서 잘 살고 여기 이 할매도 자식들이 장사해서 번 돈으로 용돈도 보내주고 허능만.”
말을 잠시 멈춘 할머니가 한숨을 폭 내쉬더니 우리 새끼들은 여길 못 빠져나가 안달을 해 싸?마는 고등학교도 채 졸업 몬 허고 다들 나가 버렸어. 첫찌 허고 둘찌는 가끔 오기도 허고 연락이 되는데 세찌는 워디가 뭘 허는지 도통 연락이 읍써, 내 그거 보기 전에는 여기를 어찌 떠나것노, 지 에미 여 있는 줄 아니께 살아 있으면 언진가는 오것지, 라고 말하더니 만지면 부서질 낙엽 같은 손을 들어 바람에 흘러내린 머리를 가다듬었다.
신산한 세월이 만들어 놓은 주름진 할머니들 얼굴 위로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아랫동네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가 먼저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할머니가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봉분 앞의 대문으로 들어가는 할머니 한 분이 마치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안동네에서 찍어온 새로운 사진을 종이끈에 연결된 집게에 매달았다. 각종 벽화와 슬레이트 지붕 얹은 집들, 무성하게 벽을 덮은 넝쿨의 잎사귀, 국화가 무리지어 피어있는 낮은 무덤 사진이었다. 봉분 사진을 보자 무덤에 혼자 누운 구신이나 방안에 혼자 누운 내나 뭐 다를 게 있다꼬. 혼자 누우면 딱 맞는 둥그런 지붕이 아담하고 을매나 이쁘노, 하던 안동네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여러 가지 집 사진과 나란히 걸린 안동네 무덤 사진이 할머니의 말처럼 둥근 지붕을 가진 예쁜 집처럼 보였다. 죽음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진흙탕에서 아이 낳고 모진 목숨 연명하게 한 아름다운 집으로…. 어둔 무덤가에 내린 따뜻한 햇볕으로 꽃도 피게 하고 열매도 맺게 해주며 삶을 살아가게 한 세상에 둘도 없는 집.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찍어온 집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멋진 집이었다. 아름다운 집을 안은 어두운 내 방이 갑자기 안온하게 느껴졌다.
창문을 열었다. 속이 칠흑처럼 어두운 카메라가 사진을 완성시키기 위해 빛을 품듯 어두운 방에 햇빛이 스며들었다. 최상의 빛을 얻기 위해 조리개를 조절했다. 내가 서게 될 거리를 정하고 카메라 앵글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카메라의 타이머를 작동하고 셔터를 힘 있게 눌렀다. 나는 어제 짧게 자른 머리를 양손으로 가지런하게 다듬고 카메라의 깜빡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자꾸 시야가 흐릿해졌다. 카메라의 불빛이 희미해진다고 느끼는 찰나 하늘로 오르는 불꽃처럼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어둠의 방」


목차


어둠의 방
안전지대
그림자 춤
쇄골의 품격
몰디브의 비상
상해 편지
침묵의 새
망望

해설·불온한 삶의 심연 끌어안기와 그 확장­ 최학림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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