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물든 저녁노을 멀리서 손짓하네』
딸, 아내,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로 살아온 91년의 기록
인생의 겨울에 남기는 따뜻하고 시린 이야기들
여기, 빨간 댕기머리를 한 소녀가 있다. 충남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 사움말의 평온한 마을, 유복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그늘 없이 자란 아가씨, 그러나 6.25 전쟁은 집안을 송두리째 뽑아놓았다. 전쟁의 참혹한 상흔 속에서 스물 두 살에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하여 아내가 되고, 스물 세 살에 엄마가 되고, 쉰 두 살에 할머니가 되고, 여든 세 살에 증조할머니가 된 저자의 90년 삶의 기록이 여기 있다.
4남매의 어머니, 8명의 할머니, 3명의 증조할머니인 저자가 풀어낸 삶은 이땅의 수많은 여성들이 살아낸 각고의 궤적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은 일제 치하에서 성장하고, 6.25 전쟁 중의 혼란기에 결혼한 후 품어온 친정 부모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 친정 형제 자매와의 각별한 사랑을 애틋하게 펼쳐내고 있다. 또한 교사의 박봉으로 손톱으로 바위를 뜯는 듯한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자녀를 키워 교육시키고 결혼시킨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남편이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기까지, 남편 타계 후 16년 동안 몸이 허약해져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면서 91세에도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삶의 굽이굽이를 생생히 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 즉 사남매와 어려서 부모님을 잃은 친정 동생들에게 남기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사랑의 이야기이며 수많은 사연으로 흘린 각기 다른 색깔의 눈물의 자취라고 했다. 저자가 살아낸 90여년 생애의 기록은 혼란스럽고 빈궁한 우리나라의 근대사와 현대사에 맞물려 있다. 91세의 저자는 인생의 겨울을 살고 있지만, 삶의 고비고비를 한걸음한걸음 넘어 도달한 그 겨울은 불모의 혹한이 아니다.
겨울의 혹한 속에서 따뜻한 안방이 더욱 소중한 것처럼, 세월이 힘들수록 혈육의 정은 더 도타와지고 안으로 안으로 당겨앉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장작불 활활 타는 아궁이, 밤새 식지 않는 화롯불처럼 여겨진다. 엄혹한 겨울, 따뜻한 아랫목에서 화롯불에 둘러앉아 인절미 구워 먹으며 나누는 정다운 이야기꽃 같다. 겨울나무는 앙상한 빈가지인 듯 보이지만, 그 여린 가지에 잎눈이 있고 꽃눈이 숨 쉬며 새봄의 꿈을 꾸고 있듯이 이 책은 저자의 뒤를 이어갈 다음 세대에게 예쁘고 튼튼한 새봄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