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백제’에 대한 인식은 오랜 고정관념 때문에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일본은 『일본서기』 신공기와 임나일본부설을 맹신하여 명문(銘文)에 대한 해석이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 한국 학계는 『삼국사기』를 신봉하기 때문에 자연 백제는 삼국 중 왜소한 나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530년경에 제작된 남조의 『양직공도』에 의하면, 백제는 진말(晉末)에 요서군과 진평현을 영유하고, 거기에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하며, 본국에는 반파·사라 등 9개국의 방소국(旁小國)을 거느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양직공도』에 대한 신빙성을 들어 부정하고 있다. 백제가 외교적으로 능숙했기 때문에 중국 측 기록은 과장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는 한반도 3국왕의 서거를 모두 훙薨자로 표기하고 있으나, 1971년 무령왕릉 출토의 지석에서는 무령왕의 죽음을 붕崩자로 표기하고 있다. 일본국보 2호인 인물화상경에서는 무령왕의 연대를 대왕년·계미년(大王年·癸未年)이라고 했다. 이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백제사를 해석하는데 운신의 폭을 크게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오래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광서장족자치구의 남령시 근교에 있는 광서 백제향면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지방의 주민 장족들은 백제향(百濟鄕)의 중심지인 백제허(百濟墟)를 가리켜 대박체·Daejbakcae·大百濟라고 발음하였다. 대백제가 실재로 이 땅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인데, 대백제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아직도 이 땅에서는 숨 쉬고 있는 것이다.
■ 서문 중에서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간 ‘한·일 고대관계’의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필자는 많은 시간과 여러 곳을 탐방한 바가 있는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무한한 감동과 희열(喜悅)을 느끼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희열과 감동을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심정에서 붓을 들게 된 것이다.
필자는 30여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일본국 국보 제2호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의 명문(銘文)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명문48자의 양각 속에는 제작자인 「斯麻사마」의 이름과 「大王年대왕년」, 「男弟王남제왕」과 같은 한시대의 ‘정치체제’를 확인할 수 있는 글귀가 있어, 나는 이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왜냐하면, 이 거울의 제작자인 「斯麻」는 백제 무령왕(武寧王)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학계는 이 「斯麻」를 그저 「男弟王」의 신하(臣下)로 만들어, 「大王年」을 「男弟王」의 연호라고 해, 이 거울은 신하인 「斯麻」가 「男弟王」에게 헌상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으로서 주객(主客)이 완전히 전도된 것이다.
일본학계의 이러한 해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