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사 체험을 소설로 담은
보기 드문 해양문학 작품집
1997년 [광주매일]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응순 소설가가 첫 창작집 『저녁과 아침 사이』(문학들 刊)를 출간했다. 모든 작가에게 창작의 시원이 있다면 박응순 소설가의 시원은 ‘바다’가 틀림없다. 이번 소설집 『저녁과 아침 사이』에 실린 총 7편의 작품 중에서 중편 「쑥대머리가 들린다」를 제외한 나머지 6편이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 배가 있었다」에서 가로등이 서 있는 물막이 장소는 박응순 작가의 고향과 인접한 고흥 앞바다다. 바다를 돈으로만 보는 외부 사람들(양식업자)과 그 돈에 현혹되어 고향 바다를 등진 마을 사람들에게 맞서는 정수의 아버지는 고향 바다를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마지막 양심이자 자신의 생명력을 끝까지 사수하려는 바다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탐욕에 정수 아버지가 수정되고 마는 것처럼, 바다 또한 황폐해지는 씁쓸한 결말에 가닿는다.
「조경역」은 라이따이한, 즉 아버지가 한국인이었던 베트남 선원 닥뚱에 대한 이야기다. 높은 인건비 때문에 한국인 대신 외국에서 온 선원들을 고용해야 하는 원양어선 위에서, 닥뚱은 참치잡이에 쓰이는 낚싯바늘에 팔의 뼈까지 긁히는 사고를 겪고, 제때 올바른 치료를 받지 못해 팔을 잘라내고야 만다. 그가 출국하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는 선장의 시선이 폭풍 후의 고요한 바다처럼 적막하고 쓸쓸하다.
「마젤란 해협」은 운하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정해진 해로를 잃어버리고 만년설을 향해 나아가는 배와 선장의 이야기를 그렸다. 소설집 전반을 꿰뚫고 있는 리얼리즘 성향과 달리, 일상의 권태를 뿌리치고자 노력하는 구성이 돋보인다.
표제작 「저녁과 아침 사이」는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 다시는 남의 것에 손을 대지 않기로 결심한 잠수부 형구의 이야기다. “그 사람들 만나려고 나서는 건 아니지?”라며 병원 침대에 누운 채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아내의 애잔한 눈빛이 형구를 저녁과 아침 사이의 시간에 갇힌 새까만 바다로 이끌었다. 섬과 섬 사이에는 온통 양식장만 있고, 남의 이목을 속여야기에 랜턴의 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캄캄한 바다, 그리고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거친 파도. 주인 몰래 키조개를 쓸어 간다는 소문 탓에 쫓겨났던 그 바다로 형구는 새까만 잠수복을 입고 뛰어든다. 탐욕으로 황폐화되는 바다, 아버지의 고향으로 왔으나 상처만 안고 떠나는 사람, 위치를 잃고 만년설로 향하는 배, 태어날 생명을 위해 다시는 남의 것을 훔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잠수부까지. 바다와 인간을 향한 맑고 정직한 눈이 살아 꿈틀거리는 서사를 낳았다.
층층의 바다를 건너 마지막 작품에 도달하면 중편소설 「쑥대머리가 들린다」가 기다린다. 자신의 생명이자 근원이며, 문학적 시원이기도 한 바다를 고향처럼 생각하는 박응순 소설가이기에 나올 수 있었던 이 중편소설은 비록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지만, 고향 땅의 절절한 목소리를 담고 있어 필독을 권한다.
박응순 작가는 전남 보성에서 출생했다. 보성예당중학교 3학년 시절, 한여름 직원실에서 소설을 쓰다가 원고지를 마구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국어교사 이지흔 소설가의 모습에 반해 작가의 꿈을 가졌다. 여수수산대학을 졸업 후 2년 동안 항해사로 해외 송출선과 어획물운반선을 탔으나 소설 쓰겠다는 일념으로 배에서 내린다. 이지흔이 강사로 있던 YMCA 문학창작반에서 정식으로 소설을 배우면서 1997년 [광주매일] 신춘문예로 등단한다. 등단 후에는 체계적으로 소설을 공부하고자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 편입해 문순태, 유순영 선생에게서 소설을 배웠다. 이후 광주전남소설가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줄곧 소설가로서의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