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과 그리움의 사모곡
1993년 2월 주요 일간지의 지면 한 켠을 차지하던 사연이 있다.
와병 중인 어머니의 병간호비를 위해 법복을 벗어야했지만 변호사 개업 6일 만에 어머니가 명을 달리하셨던 한 판사의 이야기였다.
예부터 산과 강으로 둘러있는 이상향으로 불리며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경남 하동 악양에서 유년기를 보낸 저자는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린 시절 가족들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그려냈다. 그럼에도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유려한 표현과 정감 있는 단어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저자의 노스탤지어에 함께 빠져들게 만든다. 또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더 잘 모시지 못했다는 회한은 부모님을 여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일으킨다.
서른 아홉 늦은 나이에 막둥이인 저자를 낳고 남편을 먼저 보낸 어머니는 자녀 넷을 홀로 힘겹게 키웠다. 논 여덟 마지기와 밭 한마지기에서 일군 쌀과 농작물로 먹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풍족하지는 못했던 생활에도 어머니는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으신 마음에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어릴 적부터 명석하기로 소문났던 저자의 미래를 위해 고등학교를 부산으로 유학 보내는 큰 결정을 내리신 것도, 홀로 농사를 지으며 뒷바라지 하신 것도 전부 어머니였다. 당시는 본인의 외로움과 학업에 대한 압박감으로 어린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늘 지니고 사셨을 어머니의 심정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위해서도 목표했던 바를 이뤄야한다는 또다른 압박감에 자기 자신을 옥죄었다. 덕분에 그는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하여 사법고시에 합격, 법관으로서의 꿈을 이뤘지만 계속 앞만 보고 달려온 그에게 언제나 뒤에서 묵묵히 지켜주셨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제주지법으로 발령받아 일하던 2-3년 간은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들과도 행복하게 보냈지만 잠시뿐이었다. 법관으로서의 책임감과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어머니와 가족들은 늘 그의 뒷모습만 볼 뿐이었다.
연로하신 어머니가 계속 쇠약해지기만 하시다가 결국은 혼자 음식을 드시지 못하시는 지경에 다다라서야 저자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부모님은 기다려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간병비를 감당하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조금이라도 어머니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판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사무실을 꾸렸다. 첫 수임비를 받고 닷새 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잘 모시기는커녕 일 따위를 핑계로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기 못했다는 자괴감에 괴로워하며 모든 것을 손에서 놓고 방황했다.
그 방황 길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도 어머니였다. 이 모습은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잡으며 그리움과 송구함을 담은 글을 써내려갔고, 언제나 주어진 대로 최선을 다하셨던 모습을 기리며 어머니의 이름을 붙인 장학회도 설립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썼다는 그 글을 모아 이 책으로 엮었다. 저자 개인의 상념과 그리움이 담겼을 뿐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독자들에게는 공감을, 아직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는 독자들에게는 자기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