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일반적인 가치관에서 말하자면, 책을 많이 읽는 것이 별로 안 읽는 것보다 교양이 몸에 배고 사고가 깊어지며 인생이 풍부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소설이나 시를 읽음으로써 뭔가 마음이 풍부해질 거라고 맹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소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풍부해진다’고 할 만큼 믿을 수 없는 말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책을 읽게 되어 세상의 일반 사람들이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이점은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이점을 얻음과 동시에 독도 얻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삶의 태도란 무엇일까요? 자신이 갖고 태어난 운명이나 숙명이 있다면 순순히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운명이나 숙명이란 무엇일까요? 주로 그 사람과 어머니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일 겁니다. 그것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외에 좋은 삶의 태도란 없지 않을까요?
저는 문예비평을 통해 작가나 작품을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설령 대체적인 평가가 정해진 작품이라도 다시 한 번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봅니다. 그리고 저 나름의 관점을 가다듬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비평이라는 것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싱에서 같은 강도의 펀치를 내면 첫 한 방은 효과가 있지만 그 뒤로는 효과가 없어 상대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강약의 펀치를 낼 경우 약할 때는 상대를 쓰러뜨릴 수 없지만 약한 펀치 이후에 내는 강한 펀치는 효과가 있어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문장에서도 그런 펀치의 강약은 중요합니다. 운동성과 함께 수련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부분이 기술적으로 가장 달라지는 점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몸을 움직이는 것을 수반한 훈련을 한 사람은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을 교대로 반복하고, 게다가 문장을 리듬감 있게 써나갑니다. 그런데 그런 수련을 하지 않는 사람은 같은 의미의 말을 써도 밋밋한 문장을 씁니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경우에도 가능한 한 말하기 힘든 것을 쓰려고 합니다. 말하기 쉬운 것, 말하면 칭찬받을 것 같다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의식적으로 그다지 말하지 않기로 하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하기 힘든 것을 말하는 것이 왜 좋은가 하면, 그 행위가 자기 해방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주위의 사회나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다양한 울적함에서 해방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하기 힘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직책에 의해 인간의 상하가 정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는 성격이 어떻고 어디가 결함이며 또는 가정 안에 문제가 있는가 하는 것과 그 사람 자신이 프로로서 뛰어난가 어떤가 하는 것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같은 의미를 갖겠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 장면에서 착각하는 일이 있을 겁니다. 예컨대 소세키든 오가이든 상관없는데, 그 사람은 대예술가라서 인격, 기질, 그 밖의 면에서도 결함이 없는 완벽한 인물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착각하는 일이 있을 겁니다.
총리대신이니까 훌륭하다거나 대학 교수라서 훌륭하다, 또는 유명한 예술가라서 훌륭하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을 볼 때 좀 더 중요한 것을 들자면, 그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티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모티프를 갖고 있어서 지금까지 이러이러하게 해왔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그 모티프 안에서 훌륭하다거나 잘했다고 평가하고, 전반적으로 또는 인간적으로 훌륭하다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문학의 유효성이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요. 결국 처음에는 오로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남몰래 썼던 것이 왠지 모르게 남의 눈에 띄게 되어 고정 독자가 늘어갑니다. 그리고 고정 독자에게도 작품이 그 사람을 위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문학의 본질적인 유효성이 아닐까요.
그러나 인간은 설령 금전적으로 혜택을 받아 아무런 부자유함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정신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법입니다. 인간의 어딘가에 그런 기질이 남아 있는 한 문학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지 못하지만 쓰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는 사람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존재하겠지요.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복잡함의 표현이고, 그것이 동물과 약간 다른 점입니다. 사람으로서 나쁜 일을 해서는 안 되지만,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하는 것을 봤을 때는 자신도 같은 처지라면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화를 낼 수만은 없습니다.
청춘기를 지나면 성격이 자연스럽게 변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나머지는 인공적, 의식적으로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든 크든 작든 그런 일을 해나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청춘기 이후 어른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의식적으로 바꾼 부분끼리 맺어진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상은 잘 모르지만 성숙한 현대 미국 사회에서는 공공연하게 전쟁 반대를 외치는 것도 허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독일이나 일본에서는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미성숙한 사회가 건강함을 흉악함으로 변화시키는 토양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