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잘 알려진 고전을 영어 원서로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것을 목표로 쓰여졌다. 즉, 이 영한 대역의 두 관심 주제는 ‘공리주의’라는 고전과 ‘영어 원서 읽기’라고 하겠다.
공리주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공리주의는 벤담(Jeremy Bentham)이 처음 제시하였고, 그 후 밀(John Stuart Mill)이 이어받아 이 사상을 발전시키고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유명한 문구가 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은, 사실 쾌락(pleasure)이 궁극적 선(goodness)이라는 고대 에피쿠로스(Epicurus)의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이 되는 하나의 포괄적 원칙을 지향한 공리주의는, 개인의 윤리 강령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 입법, 공공 정책 등 인간사의 많은 영역에서 명시적 또는 암묵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표적 사회 과학인 경제학에서 “효용의 극대화”는 거의 모든 경제 이론의 당연한 전제가 되고 있다. 이 밖의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중요한 결정들이, 그 결정의 주체들이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공리주의적 원칙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공리주의에 대한 이해는 사회 전반의 여러 이슈들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와 함께 공리주의만큼 사람들의 의견이 극명히 구분되는 주제도 드물다. 처음 제시되었던 시대부터 지금까지 공리주의는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다. 대표적인 사람이 니체(Friedrich Nietzsche)로서 혐오에 가까운 비판을 공리주의 그리고 밀에게 가하였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초인(?bermensch)을 이상으로 삼았던 니체로서, 대중의 행복을 도덕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는 공리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또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공리주의’를 부정적인 의미가 그 말에 이미 담겨 있는 단어로서 사용하는 것을 발견한다. 마치 ‘편협’하다거나 ‘천박’하다거나, 또는 원칙이 없이 ‘편의주의적’이라는 함의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밀이 그의 저술에서 공리주의에 대한 오해나 비판에 대해서 왜 그토록 많은 부분을 할애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공리주의의 타당성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사실 어떤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원전을 읽을 필요는 없다. 요즘 같이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는, 물론 정보의 질을 판단할 분별력이 필요하겠지만, 잘 정리된 글이나 동영상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따라서 짧은 시간에 공리주의를 이해하고자 하는, 또는 그래야만 하는 분들에게 이 책은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상의 결과물을 요약해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상의 전개 과정을 논리적으로 숙고하거나, 또 명문장가로 알려진 밀의 글 자체를 음미하고자 한다면 Utilitarianism이라는 그의 에세이를 직접 읽어보는 것을 권할 만하다.
영어 원서 읽기와 번역의 방식
독서에 있어 책의 내용 못지않게 글 자체의 훌륭함도 중요하다. 밀의 문장은 논리나 분명함에 있어서 좋은 글의 모범이라고 생각하며, 이것이 Utilitarianism을 영어 읽기의 교본으로 삼은 기본적인 이유다. 한편 이 에세이의 많은 문장들은 그 당시 대부분의 지적인 글들이 그렇듯이, 관계대명사 구문이나 다른 수식구들(qualifying phrases)을 길게 연결시킨, 소위 만연체로 구성되어 있어 현재의 영어 문장들과는 그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역자는 이 점이 영문 독해를 연습하는 데 있어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길고 복잡하게 구성된 문장에 익숙해지면 현대의 비교적 간결한 문장들은 훨씬 수월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독자의 관점에서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의 조금은 거창해 보이는 표현들을 읽어보는 즐거움도 있다.
영어 원서를 읽는 방법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문장 하나하나에 매달리지 않고 전체의 흐름, 저자의 의도 등을 빨리 파악하는 연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게 읽는 것이 적절한 경우도 많이 있지만, 그럴 경우 장기적으로 독해 능력은 제자리에 머물기 쉽다고 생각한다. 익숙해질 때까지는 문장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구조가 문법과 괴리가 없는지 자신에게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연습을 꾸준히 하면 한 문장을 왔다갔다 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쭉 읽어도 자연스럽게 끊어서 읽게 된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역자 자신도 아직 그런 노력의 과정에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함에 있어서 문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되도록 드러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영문과 우리말이 대응이 되도록 노력하였고, 내용의 흐름상 중요하지 않은 부수적인 영어 표현도 빠짐없이 옮기려 했다. 문장이 관계대명사 구문같이 긴 수식구들로 인해서 읽는 호흡이 너무 길어질 경우에는 괄호나 쉼표를 이용해서 문장 구조를 분명히 하였다.
판본과 기호들, 그리고 추천하는 독서 방법
Utilitarianism은 1861년 Fraser’s Magazine이라는 잡지에 시리즈로 게재되었고, 이들을 묶어 1863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번역은 1863년의 초판(London: Parker, Son, and Bourn, West Strand)을 근거로 했고, 1879년에 발간된 7판(London: Longmans, Green, and Co.)과 대조하면서 약간의 오류 등을 교정했지만, 되도록 초판을 따랐다. 초판과 7판을 비교했을 때, 7판에는 주석이 하나 더 추가된 것과, ‘정의’(justice)의 어원에 대한 언급을 초판에 비해서 더 상세히 한 점을 빼고는 거의 동일하다.
문장 구조가 비교적 어렵다고 역자가 주관적으로 판단한 문장의 앞에는 ♠표시를 하여 독자들이 참고하도록 했다. 번역 문장에서 괄호 ( )는 원문에 있는 보조적인 수식구를 묶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대괄호 [ ] 안의 내용은 역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단한 설명을 삽입한 것이다. 영어 원문의 문단 전환은 가로줄을 그어 표시하였다.
추천하는 이 책의 독서 방법은, 우선 영문을 직접 읽고 이해가 되면 번역 부분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나, 조금 이해가 되지 않거나 의심이 가는 부분은 번역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책을 읽는 진도가 너무 늦어질 때에는 영문들은 무작위로 건너뛰면서 글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건너뛴 부분은 표시했다가 후에 천천히 읽어보면 좋겠다. 어쨌거나 독자들의 개별적 익숙함의 정도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방법으로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중요한 점은 즐겁게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공리주의에 따르자면 바로 그것이 작지만 분명한 선(善)을 이루는 것일 테니 말이다.
2019년 2월 서교동에서
이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