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하다!
사유는 굳건하나 실천은 온건하다.
이 우주 자연과 인간 세상에서
시공간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삶의 가늠자가
경敬일 수 있을까?
이 책은 동양철학, 특히 유학에서 ‘경敬’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겨나서 사용되고,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를 시대적 순서에 따라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전통 유학이 추구한 경敬에는 공경의 의미로만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숭고하고 존엄한 인간학이 서려 있다고 말한다. 경敬이란 무엇인가?
경敬의 문자적 발전
경의 초기 형태는 아래 부분에 ‘말 마馬’자가 붙어 있는 ‘경驚’으로 ‘놀라다’라는 뜻이다. 말이 앞발을 쳐들고 뒷발로 서서 위를 쳐다보면서 ‘히이힝’ 하고 깜짝 놀라는 모양이다. 여기엔 세상의 변화에 주체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없다. 그야말로 동물적인 놀라움 그 자체다. 그런데 ‘마馬’자가 인간적 차원의 ‘언言’자로 바뀌면서 다른 수준으로 인식된다. 경警은 인간 자신이 터득하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 등에 의거하여 어떤 일이나 문제와 부딪치기 전에 스스로 경계하거나 응변하는 태세를 갖춘다는 의미다. 경警은 다가올 일을 대비하며 경계하는 심리 상태다. 더 후대로 와서 경敬은 동물적 차원의 놀람과 언어를 통해 경계하며 깨우침을 얻는 수준을 초월한 상태다. 경驚과 경警에는 자연의 현상이건 인위적 환경의 조성이건, 놀람이나 경계하는 심리를 가져다주는 외부 요인이 존재한다. 그러나 경敬은 외부에서 부여되는 어떤 요인도 모두 탈각되어 있다. 순수하게 내부 요인만 존재한다. 이 부분이 경敬을 해명하는 열쇠다.
경 공부의 존재 근거와 바탕
인간에게 갖추어진 훌륭한 본성, 이른바 선성善性을 잘 닦고 길러 인간의 완성을 꾀하는 일이 수양이다. 이런 점에서 유학은 천리天理 또는 천도天道인 자연의 질서가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인다는 점’을 철저히 인식하여, 인간의 내면적·자각적 도덕심을 밝혀 실천하는 학문이다. 그 수양의 두 축이 성誠과 경敬이다. 특히, 성誠은 ‘진실함, 참됨’이라는 학문의 존재 근거로 인간이 도덕적으로 실천하는 이유가 된다. 일반적으로 성誠이라고 하면, ‘정성스럽다’ ‘성실하다’ 등으로 이해하기 쉽다. 물론 정성을 다하고 성실하게 참됨을 추구하는 일이 성誠인 것도 분명하다.
천리天理로서 성誠은 자연의 질서이자 우주의 본질이다. 동시에 선한 마음을 지칭하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이렇게 진실무망眞實無妄한 성誠(천도天道)을 구체적으로 추구하여 실현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몫이었다. 그 노력의 실천적 행위가 바로 경敬이다. 유학은 성誠과 경敬의 관계를 통일된 유기체로, 밀접한 연속선상에서 바라본다. 때문에 사람이 진실[誠]하면 스스로 깨우치고 깨닫게[敬] 마련이라는 자연주의적 사유를 펼친다. 반대로 진실함에 이르지 못했다면, 스스로 깨달음이 부족하고 자기 공경과 배려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깨달은 후에 진실함에 이를 수 있다. 성誠은 언제나 지속적 본체를 지니는 온전한 선의 덩어리다. 그것의 발동 자체는 경敬이 된다. 성誠에 이르지 못한 경우, 인간이 의식적으로 행할 수 있는 수양의 제일 조건이 경敬이다.
무불경이라는 세 글자
마음 수양의 단초로 자리하는 경敬에 대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구절 가운데 하나가 “무불경毋不敬”이란 개념이다. 무불경, 즉 공경스럽지 않게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유학을 학문의 중심에 두는 수많은 사상가는 무불경을 삶의 지표나 좌우명처럼 여겼다. 경敬은 “무불경毋不敬”이란 이중 부정을 통해 강조되며, 『예기』의 맨 앞에서 인간의 예의를 선도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불경하면, 인간의 행동거지와 용모가 바르게 되어 포악하고 거만한 것과 거리가 멀어진다. 무불경을 바탕으로 엄약사儼若思 하면 얼굴빛이 온화하고 단정하게 되어 신의가 있어 보인다. 나아가 안정사安定辭 하면 말이 바르게 되어 비루하고 의리에 상반되는 말들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수신의 요점이다.
경의 존재 양식과 확장 논리
자신을 수양하는 방식으로서 경敬은 ‘수기이경修己以敬’에서 ‘안인安人’, 나아가 안백성安百姓으로 확장되는 특성을 보인다. 그것은 유학의 기본 원리인 수기치인이나 성기성물成己成物,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논리 그대로다. 경은 의와 짝을 이루면서 확장한다. 맹자는 “경敬으로 내면을 바로 세운다는 말은 자신을 다잡아 지키는 공부이고, 의義로 외면을 방정하게 한다는 말은 강학하는 공부다. 바로 세운다는 뜻은 아래위를 관통하여 가슴 속에 조금도 왜곡됨이 없는 것이다. 방정하다는 뜻은 잘라서 방정하게 만든다는 것이고, 이 일을 처리하는 데 모두 적합하여 자른 듯이 분명하여 바뀔 수 없다는 말이다”라고 했고 주자는 “정자는 경敬과 의義, 둘 다 지니는 것은 하늘의 덕에 도달하는 일의 시작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둘 다 지닌다는 표현이 아주 좋다”라고 했다.
퇴계와 남명의 경 공부
퇴계 이황의 학문은 한마디로 경敬으로 똘똘 뭉쳐진 ‘경 사상의 유기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주요 저술 가운데 하나인 『성학십도聖學十圖』가 그것을 대변한다. 『성학십도』의 열 가지 그림을 꿰뚫고 있는 핵심 내용이 경敬이다. 퇴계의 삶은 의식의 각성을 생명으로 하는 경敬을 주축으로 사람다움을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퇴계는 경敬을 공부의 핵심 방법으로 부각시켰다.
남명의 사상을 흔히 ‘실천’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남명 이외의 여러 학자가 실천 중심적이지 않고 이론 중심적이라는 암묵적 전제에서 강조된 표현이다. ‘실천’ 중심이라는 말을 남명의 학문이나 사상, 교육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한 언표로 채택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강조의 표현이 오히려 남명의 학문을 오독誤讀하게 만들 수도 있다. 저자는 남명이 결코 ‘경敬·의義’만을 앞세운 실천이 아니라 ‘지知가 먼저이고 행行이 나중인 주자의 방식을 따랐다는 점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