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식은 얼핏 보기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특별히 무언가를 해야 할 관계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한 장소에 살고, 부모는 자식의 선천적 기질과 성장과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가 있다. 부모와 자식은 같은 장소에 살고 있지 않다. 부모를 지금의 부모로 만든 그의 유년시절은 마을에 있고, 자식의 유년시절은 뉴타운에 있다. 부모는 마을에 살고, 자식은 뉴타운에 산다. 산골 사람과 바다 사람이 도시의 여관에서 만난 것과 같다.
산골 사람이 바다 사람을, 그리고 바다 사람이 산골 사람을 이해하려면 각자의 땅을 떠나 타인의 땅으로 여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에 부모의 마을과 자식의 뉴타운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얘기를 담는다.
나는 이 책에서 부모와 자식의 애증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건축도시이론을 도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건축도시공간의 물리적 구조 = 특정 행동 양식 = 가치관’ 이란 등식을 사용한다. 프로이드나 세대차이와 같은 또 하나의 이론이다. 하지만 자식이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부모의 가치관이 성립된 이유를 건축도시공간의 물리적 구조에서 찾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변명이다. 부모가 부모의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변명이다. 나는 유학 시절 만난 일본인 친구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과 가치관을 그의 집을 방문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상당히 흥미로웠던 그 경험을 기초로 나는 부모와 자식 간의 얽혀 있는 관계를 변명해보고자 했다. 그리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부터는 평생을 맞닥뜨리게 되는 부모의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과 행동을 정말 이해하고 싶다면 부모가 유년기를 보낸 그의 마을로 여행을 떠나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은 자영업자들이 정주하는 곳이고 뉴타운은 직장인들이 유목하는 곳이다. 정주민과 유목민이 서로를 당장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유목민이 정주민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마을을 찾아 그들의 전반적인 생활 습성을 알아가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것이다. 거기서 유목민은 정주민을 이해할 확실한 방도를 찾지는 못한다 해도 정주민의 이야기를 들어 볼 기회는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골 사람과 바닷가 사람이 만나서 얘기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