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이광수(李光洙, 1892~1950)
문학가·언론인·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춘원(春園)이다.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출생.
1903년 동학(천도교)에 입도.
1904년 일본 관헌의 동학 탄압으로 상경.
1905년 6월 일진회(一進會)가 만든 광무학교에 입학.
1907년 홍명희·문일평 등과 재일본 조선인 유학생 모임인 소년회(少年會) 조직.
1911년 1월 105인 사건으로 이승훈이 구속되자 오산학교 학감(교감)으로 취임.
191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매일신보에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 연재.
1918년 12월 서춘, 전영택, 김도연 등과 함께 재일 조선청년독립단 조직.
1919년 도쿄(東京) 유학생의 2·8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 2월 선언문을 해외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고 상해로 넘어가 4월 여운형이 조직한 신한청년당에 가담함.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8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맡아 활동함.
1920년 흥사단(興士團)에 입단.
1922년 2월 흥사단의 측면 지원 조직인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를 조직.
1926년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에 취임.
1933년 동아일보사 사임하고, 8월 조선일보사 부사장에 취임.
1934년 5월 조선일보 사직.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경성부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38년 11월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으로 활동. 8월 일본 패망으로 조국의 해방을 맞음. 친일파로 지목받아 사회의 비난을 받음.
1949년 1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2월 건강 악화로 출감, 8월 반민특위 불기소로 자유로워짐.
1950년 5월 홍명희의 도움으로 만포의 한 병원에서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 악화로 숨을 거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