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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파리

로맨틱, 파리

  • 데이비드다우니
  • |
  • 올댓북스
  • |
  • 2018-09-10 출간
  • |
  • 472페이지
  • |
  • 152 X 211 X 25 mm /628g
  • |
  • ISBN 9791186732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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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다른 도시에 비해 유독 예술과 낭만의 도시로 기억되는 파리. 아름다운 건축물과 교회들, 광장과 개선문, 센 강변과 섬들, 부두, 멋진 다리, 세계적인 박물관들이 곳곳에 있는 파리. 그래선지 파리로 떠나 그곳의 자유롭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고 그만큼 파리에 관한 여행서들은 많다. 이 책은 일반 여행서가 아니라 프랑스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사진계를 주름잡던 낭만주의 시대 인물들의 삶이 녹아 있는 장소들에 대한 일종의 기행문이며 순례기라 할 수 있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와 추천의 말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그냥 지나쳤던 파리의 속살을, 진짜 얼굴을 저자 특유의 재치있고 솔직한 필체로 보여준다.
저자는 오노레 드 발자크, 샤를 보들레르, 프레데릭 쇼팽, 외젠 들라크루아, 앵그르, 알렉상드르 뒤마, 귀스타브 플로베르, 테오필 고티에, 빅토르 위고, 마르셀 프루스트, 알퐁스 카, 프란츠 리스트, 프로스페르 메리메, 앙리 뮈르제, 알프레드 드 뮈세, 펠릭스 나다르, 제라르 드 네르발, 샤를 노디에, 자메 프라디에,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 가스통 르루, 조르주 상드, 모딜리아니, 피카소 등 세계적인 문학가, 예술가들이 깃들어 있던 곳들을 직접 찾아가보고 감상하고 탐구하고 그들의 사랑과 인생, 해프닝, 작품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파리지앵들의 "신기혐오증"이나 우울함과 우수, 열렬히 사랑할 권리에 대한 비호뿐 아니라 현재의 파리가 있기까지 중요한 문화, 역사, 정치적인 사건들을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곳들은 대부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들ㅡ몽마르트르 언덕, 노트르담 대성당과 시테 섬, 바스티유 광장, 팡테옹, 몽파르나스 타워, 뤽상부르 공원, 콩코르드 광장, 페르 라셰즈 묘지, 상젤리제 거리, 리볼리 거리, 퐁네프나 퐁데자르 다리ㅡ이지만, 마레지구, 라틴지구, 파시지구, 볼테르 부두, 생 루이 섬 등 관광코스로는 다소 낯선 장소들도 등장한다. 낭만주의 작가들, 화가들, 연인들이 즐겨 찾던 많은 카페들, 한때 귀족이나 세력가들의 저택이었던 카르나발레 박물관, 발자크 박물관, 낭만주의 박물관, 모로 박물관 등의 개인 박물관이나 하우스 박물관, 낭만주의자들의 아지트였던 아스날 도서관 등을 조명한 것도 새롭다.
100여 컷의 역사적이거나 현대적인 사진이나 스케치, 그림들은 저자의 생동감 넘치는 글을 보완하고 더 빛나게 하며, "사연이 있는" 조각상들과 공원, 부두와 섬과 언덕과 교회에 가 있는 것 같은 실감이 나게 해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은 파리를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단순히 많은 관광명소를 가진 세계적인 여행지가 아니라, 화려한 이면에 드리워진 우수와 반항과 낭만과 사랑의 도시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런 "스토리" 때문에 아마 파리가 더욱 매혹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빛의 도시이기도 한 파리의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과 낭만적인 분위기는 낭만주의 시대의 체제 전복적인 문학과 미술, 음악이라는 어두운 근원을 바탕으로 자라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기 바란다.

[책속으로 이어서]

149-150쪽) 보들레르는 1840년대 초에 생 루이 섬으로 이사한다. 스물한 살에 불과했던 그는 그때 이미 수많은 시를 창작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훗날 그의 걸작으로 남은 《악의 꽃》도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는 이미 많은 곳을 여행했고, 계부와 다투고 완전히 갈라섰고, 주소를 수십 번 바꾸면서 완벽하게 방탕한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다. 나중에 그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는 성병도 앓았고, 그만큼 소란스러운 펠릭스 나다르, 앙리 뮈르제, 발자크 같은 예술가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상속받았던 상당한 액수의 유산 대부분을 다 탕진해버렸다. 결국 그는 짧지만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던 일생 동안 그의 신탁재산 관리인, 끝없는 갈등을 겪었던 어머니, 몇몇 친구들에게 돈을 구걸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는 1867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사망한다. 형편없는 비즈니스 감각에 씀씀이가 헤펐던 보들레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놀랄 만한 체력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는 자신이 쓴 시, 산문시, 에세이, 기고문을 계속해서 다시 고쳐 쓰는 작업을 하지 않을 때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전작全作을 번역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176-177쪽) 너무도 많은 측면에서 헤밍웨이는 위고를 닮았기에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특히 이상해 보인다. 아마도 그는 무의식적으로는 위고의 흔적을 따랐지만, 위고는 그냥 건너뛰고 지나간 부분에서 흔들렸던 것 같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돈에 집착했으며, 벽을 바라보며 일어서서 글을 썼다. 두 사람 모두 계속해서 바람을 피웠고, 생 쉴피스 성당에서 각자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을 경험했다. 이곳에서 위고는 결혼을 했고 헤밍웨이는 파이퍼와 자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두 사람 모두 우울증과 자살로 고통받던 탄탄한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으며, 둘 다 바다에 매료되어 있었고 노인과 바다에 대한 소설을 썼다. 두 사람은 두려움을 몰랐고, 자신을 희생하는 성향에 영웅적이었으며 재능도 있었는데, 이런 면들이 그들의 자아도취 성향을 보상해주었다. 둘 다 턱수염이 있어서 서로 닮아 보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턱수염은 멋지고, 눈에 띄고, 매력적인 자산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두 사람은 생 쉴피스 성당 바로 코앞에서 살았다. 그래서 만약 이들이 같은 시기에 살아 있었더라면 서로 지척에서 살았던 셈이 된다. 만약 그랬다면 두 사람은 어떤 말을 주고받았을까?

191-192쪽) 파리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이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노트르담 대성당에 들어가거나 탑에 올라가려고 수백 미터씩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놀라고 만다. 수차례 복원된 고색창연한 대성당은 지어진 지 8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가장 많은 방문객 수를 자랑한다. 연간 이곳을 찾은 사람의 수는 1,350만 명으로, 이는 에펠탑 방문자의 두 배에 육박할 뿐만 아니라 팡테옹을 찾은 사람의 수보다 스무 배 더 많은 수치다. 비올레 르 ?의 환상적인 복원을 두고 순수주의자들이 뭐라고 하건,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관광객들 때문에 노트르담 성당에 서 영적 명상과 기도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불평을 하건, 이 건물은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여기서는 인위성, 모르는 게 약, 자기기만. 이런 것이 바로 그 성공의 열쇠다. 노트르담 대성당에 있는 조각상들이 복제품이며, 성당 건물에 사용된 돌 대부분이 새것이고, 스테인드글라스는 대체로 다시 만들어진 것이며, 원래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던 이 성당의 모습을 보면 복원된 것보다 현저히 덜 고딕스럽다. 그런데 과연 이런 사실을 알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197-198쪽) 라틴지구에 있는 모든 것은 남성과 여성의 신체 치수에 따라 만들어졌다. 사람을 기준으로 한 인간적인 비율 덕분에 우리는 보는 순간 너비와 높이가 얼마인지 알아챌 수 있다. 도시의 전경, 거리와 건물 안에 있는 커브, 고르지 않은 모습들, 다양한 질감과 재료 ? 돌, 벽돌, 목재, 주석, 타일 ? 는 유기적일 뿐만 아니라 단순한 눈요기 그 이상이다. 이런 것들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마치 긴 세월 동안 성장하고 선별적으로 잘리고, 다시 자라고 자라서 곳곳에 빈터와 들판이 섞여 있는 삼림지대나 숲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라틴지구에는 똑바른 것, 균형이 잘 맞는 것은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창문이 없는 건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지역 곳곳마다 생기가 넘치고 바쁘게 움직인다. 창문과 문이 많아서 어디든 들어갈 수 있고, 진열장은 보고 즐기라고 유혹한다. 이것은 사옥들이 몰려 있는 업무단지, 커다란 상자처럼 생긴 상점과 쇼핑몰로 대표되는 거대한 단일사회, 고층빌딩, 근대주의적 효율성을 바탕으로 한 설비 등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라틴지구의 풍경은 소박하고, 토속적이고, 독립적이고, 혼돈스럽고, 예측을 불허하며 철저하게 파리다운 모습이다.

209-210쪽) “파리 시민들에게 물과 공기, 햇빛을 피할 그늘을 달라!”는 유명한 말을 한 인물이 루이 필립 시대에 센 지역의 지사이자 랑뷔토 공작이었던 클로드 필리베르 바르틀로Claude-Philibert Barthelot다. 그런데 그는 이 말을 할 때 물, 공기, 그늘 외에도 “빛”을 추가했어야 했다. 그는 왕정복고 시대의 선조들이 이미 시작해놓은 것을 바탕으로 파리를 “빛의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이 방면에서 그는 나폴레옹 3세나 오스만보다 더 높은 점수를 딸 만하다. 하지만 이것은 파리에 대한 신화 중 일부다. 제2제정 덕분에 어떻게든 문명과 안락함, 모더니티가 등장했고,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의 위협을 받고 있던 어둡고 더럽고 무지몽매한 소도시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신화 말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내용이 진실이다. 제2제정은 파리를 폐허로 만들고 파산하게 했으며 프랑스를 25년은 뒷걸음질치게 만들었다.

217-218쪽) 위고를 위시해서 팡테옹에 안장된 그 다음 급의 위인들?그중에서도 뒤마와 졸라?을 보는 것 외에도 이곳이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는 이유는 더 있다. 돔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인데, 에펠탑과 몽파르나스타워에서 보는 것보다 친밀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돔에서 보는 전망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것이 바로 팡테옹 중앙에 있는 푸코의 추다. 이동이 가능한 이 유명한 추는 팡테옹 경내에 여러 차례 전시되었다. 파리에 있는 많은 것들이 그렇듯,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이 추 역시 복제품이다. 하지만 복제품이라고 해서 이 추의 경이로움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수십 년간 팡테옹에서 볼 수 없었던 이 추가 1995년에 재설치되는 장면을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몇 년에 한 번씩 이곳을 찾아와 추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예언적인 의미를 명상한다.

264-265쪽) 상드는 사람을 볼 때 ? 그녀의 기준에 따라 ?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보았다. 상드는 잘생긴 베니스 출신 의사 파젤로 와의 염문은 자신에게 곤란한 부분이므로 삭제하는 등 역사를 정당화하고 수정하고 편집하고 다시 썼다. 파젤로는 병든 뮈세의 목숨을 구해준 의사였다. 그녀는 뮈세를 버리고 파젤로를 품은 다음, 자신이 미친 남자로 표현했던 뮈세를 다시 만나더니 갑자기 두 남자 모두를 버리고 노앙으로 달아났다. 그랬으면서도 상드는 소설 속에서 자신의 갑작스런 변심에 대해서는 생략했다. 물론 주색에 빠졌던 뮈세의 행실이 용서받지 못할 만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상드의 위선은 그보다 더 고약했을지도 모른다.
“조르주 상드는 그녀의 나비를 잡아 우리에 가두고 꽃과 꿀을 먹이로 주면서 길들인다. ?그녀가 사랑에 빠져 있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그녀의 절친한 친구였던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는 두 사람 사이의 친분에 금이 가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밝혔다. “그런 다음 나비가 몸부림치면 그녀는 나비에 핀을 꽂는다. ? 이렇게 이별이 이루어지는데, 이별은 늘 그녀가 주도한다. 그 후 그녀는 나비를 해부하고 박제한 다음, 나중에 소설에 쓸 주인공 컬렉션에 포함시킨다.”
.
271-272쪽) 아름다운 만큼 위험하고 뻔뻔스러웠던 콜레는 욕정으로 가득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 11살 연하의 노르망디 출신의 순진한 시골 청년이었던 ? 애송이 플로베르를 샹젤리제 거리에서 흔들리는 마차 안에 태우고 천천히 덜컹거리며 달렸다. 바로 그때의 두 사람 사이의 열정이 에마 보바리의 이야기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루앙Rouen 주변을 드라이브하는 장면으로 변형되었다.(.........) 뿐만 아니라 콜레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플로베르의 연애편지는 지금껏 내가 읽어본 연애편지들 중 가장 아름답고 총명한 편지 중 하나다. 상드와 미미처럼 콜레도 신뢰할 수 없는 배신과 낙원 같은 성행위를 일삼는 여사제로 군림하면서 그에게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306쪽) 발자크와 뮈세, 나다르가 영원한 청춘이라고 한다면, 역설을 좋아하는 외젠 들라크루아는 영원한 고대인이었으며, 젊은 이상주의자만큼이나 늘 착실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과묵하고 예의발랐으며, 때때로 다정다감했다. 다른 한편으로, 41년간 불규칙하게 쓴 그의 일기와 그의 미술 작품을 보면 내면의 고통과 열정, 갈망, 그리고 어두운 천재성이 엿보인다. 무게 잡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을 잘 하고,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며 걸핏하면 싸우기 좋아했던 그였지만, 공감능력도 많고 매우 관대한 사람이기도 했다. 박식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역시 캔버스나 종이, 석고로 표현하는 것만큼 언어로 솜씨 있게 표현하는 데도 능했다. 뤽상부르 공원 하면 위고와 상드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상 이 공원은 들라크루아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는 혁명적 색채주의자 들라크루아의 초상화가 하나도 둘도 아닌 세 개나 있다..

314-315쪽) 배가 고프면 또렷하게 생각할 수 있어서 헤밍웨이는 배고픔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가 가장 또렷하게 사고했던 순간은 당시 뤽상부르 박물관에 걸려 있던 세잔의 그림을 감상할 때였다. 그의 글을 보면, 이 박물관은 그가 지독히 가난하게 살던 집에서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뚫고 하염없이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그가 거처했던 각양각색의 방이나 아파트는 모두 마법처럼 뤽상부르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었다. 심지어 그가 살았던 금박으로 장식한 듯 화려한 보헤미안 거처는 불과 반 블록 떨어져 있는 페루 거리에 있었다. 헤밍웨이가 이렇게 자신의 그림을 주시하는 것을 세잔이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세잔이 피카소와 브라크Braque가 창안한 미술사조인 입체파의 조상격인 원조 입체파이듯, 헤밍웨이는 아마도 원조 입체파 문인이 아니었을까? 헤밍웨이는 그의 단순한 문장을 조각하는 법을 세잔에게서 배웠다고 주장했다. 세잔은 들라크루아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의 눈에는 이들 간의 연결고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입체파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이 세잔이나 피카소나 브라크 같은 미술가가 아니라 시인 아폴리네르Apollinaire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미술과 문학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폴리네르와 피카소, 두 사람 모두 들라크루아의 열성적인 숭배자였다..

354쪽) 뒤마는 예술 후견인으로서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구입했고 마치 ‘모두 하나가 되어’라고 부르짖는 총사처럼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옹호했다. 또한 전위적인 화가였던 들라크루아가 수명이 아주 짧으면서도 당대에 가장 위대하고 유례없는 최첨단 작품 중 하나를 그리도록 유도했다. 이 작품은 일종의 자유로운 형식의 액션 페인팅으로 단 하룻밤 동안만 전시할 의도로 그려진 것이다.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의 이 위대한 예술 행위가 일어난 장소는 볼테르 부두도 아니고 센 강 좌안 어디도 아니다. 바로 파리 낭만주의의 새로운 아지트로 부상한 곳, 즉 좌안에서 멀리 떨어진 우안에 있는 신아테네 [Na Nouvelle Ath?nes / The New Athens]로 알려진 곳에서, 그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뒤마의 작은 아파트에서 일어났다. 오늘날에도 낭만주의 정신이 살아 있는 성지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신아테네 지역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408-409쪽) 몽마르트르라는 이름은 마르스의 산이라는 뜻을 지닌 몬스 마르티스Mons Martis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곳은 이제 20세기 후기 낭만주의적 낭만주의와 현대적 관광의 요람이자 진원지가 되었다. 하지만 2천 년 전의 이곳은 신아테네 지역의 여배우 마드무아젤 마르스가 아니라 격노한 이교도의 신 마르스에게 바쳐진 곳이었다. 그런데 몬스 마르티스라는 이름은 중세 때 잘못 알려져서 그리스도교 성인전에 적합하도록 마르스Mars가 마르티르martyr 로 바뀌었다. 성 드니 성인은 이 언덕 면에 있는 성스러운 샘물 근처에서 참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샘물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었고, 그래서 길 건너편에 있는 “안개의 성”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안개의 성은 최근에 약 천만 달러 가격에 시장에 나왔다. 요즘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마차나 말을 타고 오지는 않는다. 원한다면 시에서 운영하는 소형버스나 몽마르트르 코끼리열차를 타고 올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낫고 훨씬 더 품위 있는 방법은 사크레 쾨르 대성당 근처 언덕 꼭대기의 테라스에 있는 손바닥만 한 작은 공원인 나다르 공원 행 케이블카를 타는 것이다. 그렇게 정상에 도착한 다음에는 힘들이지 않고 언덕을 내려가면 된다. 이때 아래로 기분 좋은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419쪽) 무명 화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으로 유명한 테르트르 광장에는 라 보엠보다 더 오래되고 더 유명한 레스토랑 라 메르 카트린La M?re Catherine이 있다. 늘 빈털터리였던 모딜리아니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수중에 돈이 몇 푼 생기면 이곳에 와서 싼 값으로 밥을 먹고 술을 진탕 마셨다. 워낙 술을 마시고 주사가 심했던지라 그의 별명 모디Midi 는 본명 모딜리아니Modigliani를 짧게 줄인 말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로 ‘빌어먹을, 저주받을’이라는 뜻의 단어 모디Maudit 를 가지고 말장난을 한 것이기도 했다. 모딜리아니는 숫총각 시인이자 저주받은 시인 보들레르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는 피카소, 브라크와 대립했고, 종종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모딜리아니는 전면적인 낭만주의자였으며, 후기인상파에서 야수파, 특히 입체파, 그리고 다양한 초기 모더니즘까지 모든 사조를 거부한 구상 화가였다.

423-424쪽) 쇼팽이 신아테네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을 때 조르주 상드가 그가 연주한 “블루 노트”를 감지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아마 피카소도 들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카소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건 몰랐었건, 그는 푸른색이 수세기 동안 영성과 신성한 사색, 우수를 나타내는 빛깔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1900년부터 1904년 사이에 몽마르트르에서 그린 피카소의 작품들은 구상적이었고 배색, 주제, 분위기가 푸른빛에 우울했다. 이는 그가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던 그 안의 낭만주의가 반영된 결과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비전문가들이나 전문 컬렉터들 사이에서나 지금도 가장 인기있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가령 그의 작품 〈파이프를 든 소년〉은 2004년에 1억 4백만 달러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었다. 바토 라부아르에서 작업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구상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그렸던 피카소는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색조와 주제가 부분적으로 겹치는 시기를 겪으면서 더 낙관적인 장밋빛시대로 조금씩 접어들었다. 밝은 느낌이 지배하는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여인과 까마귀〉나 〈곡예사〉와〈어릿광대〉그림들을 떠올리면 된다.

443-444쪽) 아마도 고티에는 더 통찰력 있게 글을 읽었던 것 같다. 그는 발자크가 “근대적 아름다움을 독창적으로 이해한다”고 추켜세웠다. 또한 그의 글에서는 책략과 속도가 모든 것을 능가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스타일이 거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보들레르가 발자크를 금세기의 천재라고 찬양한 이유도 바로 이 근대성 때문이다. 낭만주의자의 심장을 감춘 반고전주의자였던 발자크는 패션, 거리 위의 삶, 음식, 술, 오락, 범죄, 매춘, 살인과 폭력의 매력을 자랑스러워했다. 아무리 추하고 역겹고 공격적이고 모순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살아 있고 변할 수 있는 동시대적인 모든 것을 그는 기뻐했다. 발자크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글쓰기 방식과 영화적 기법은 주제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출간 계획에 따라 글을 쓸 수 있는 시간 제약이 살인적인 수준인 그의 형편에도 딱 맞는 것이다. 그의 책은 마치 영화나 TV 시리즈처럼 읽히며, 실제로도 시리즈로 나와서 발자크는 마라톤 명문장가가 되었다. 빚과 야망이 그를 계속 달리게 만들었다.


목차


*감사의 말
part 1 하녀의 다락방에서 낭만적으로 만나다
01 기구를 타고 머리 위를 날다
02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파리를 해독하다
03 페르 라셰즈 묘지로 가는 증기선

part 2 첫번째 위대한 낭만주의 서클을 발견하다 ㅡ 마레지구, 생 루이 섬
04 프랑스 혁명 기념일
05 게스트의 출현
06 반항의 낭만
07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다:낭만주의
08 시詩라는 무기를 보관하고 있는 무기고
09 빅토르, 아델, 생트뵈브의 삼각관계
10 에르나니 전투
11 로미오, 줄리엣을 찾다
12 빅토르에게 정복당하다
13 템플 기사단
14 역사적인 선물
15 발자크의 마레지구

part 3 보들레르의 섬
16 기쁜 슬픔 혹은 낭만적인 불행
17 성性, 마약 그리고 멋진 포즈
18 꿈속의 섬

part 4 위대한 남성(그리고 여성)을 숭배하다 ㅡ 노트르담 대성당, 팡테옹
19 낭만의 건축
20 반反낭만주의자
21 죽은 자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part 5 낭만적인 유희 ㅡ 뤽상부르 공원, 라틴지구, 생 제르맹 데 프레
22 녹음이 우거진 낭만의 팡테옹
23 상드의 자리/ 24 나비 수집가
25 회전목마와 사연을 품은 조각상들
26 슬며시 보헤미안이 되다
27 물 마시는 사람들
28 정답은 모뮈스
29 색이냐 선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30 술 취한 배, 배고픈 작가, 커다란 클라리넷 두 개
31 들라크루아의 마지막 저항

part 6 볼테르 부두
32 센 강변의 무대
33 달타냥과 아몬틸라도의 술통
34 뒤마, 들라크루아에게 퇴짜 맞다

part 7 낭만주의의 전성기부터 모더니즘의 탄생까지 ㅡ 신아테네와 몽마르트르
35 들라크루아의 수명이 짧은 작품, 길이 남다
36 파리의 아크로폴리스
37 쇼팽의 손
38 언덕 중의 언덕
39 악마가 보살펴 주리니
40 빈민가에 출입한 부유한 문인 스타인과 피카소의 푸른 장미
41 돌 안에 깃든 영혼

part 8 열린 결말
42 길고도 험난한 길
43 파시지구의 고요한 나날들
44 SMS를 보내며: 발자크가 사랑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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