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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

이탈

  • 권서현
  • |
  • 가하
  • |
  • 2018-08-14 출간
  • |
  • 518페이지
  • |
  • 148 X 200 mm
  • |
  • ISBN 979113003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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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책속으로 이어서]
탁.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해준이 사라지자 태혁은 그제야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두고 해준이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괜한 두통이 올라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던 태혁은 피식 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그런 고백을 받은 게 15년도 더 된 듯하다. 일하는 기계처럼 살았는데 자신을 남자로 봐주는 여자가 있다는 걸 고맙다고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거기까지.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상사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거로 착각하는 건 자기 선에서 잘라줘야 했다. 이렇게 대하는 걸 보았으니 해준도 이제는 마음을 정리하고 그냥 상사로서 대하겠지.

다시 모니터를 보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태혁의 눈이 커졌다. 조용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던 해준이 다시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태혁의 눈에 놀라움과 의문이 어렸다. 조금은 화난 듯, 당당하게 걸어오는 폼이 왠지 귀엽기도 했다.

“사장님. 할 말이 있어서요.”
“뭔가요?”

해준은 숨을 고르며 할 말을 생각하는 듯 한 박자를 쉬었다. 그리고 이내 당차게 얘기했다.

“전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술 마시고 실수로 한 말도 아니에요. 그 말이 꼭 하고 싶었어요. 저 장난 아니고 진지해요. 태어나서 처음 해본 고백이었어요.”

태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상상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어제 그 고백을 끝으로 해준이 더 이상을 말을 꺼내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여러모로 그의 기대를 뛰어넘어버리는 여자였다.

“하지만 술 취한 김에 우발적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해준은 당황했다.

“그게…… 술 때문에 우발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술의 힘을 빌려서 용기를 낸 거예요.”

당당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작아졌다.

“그게 그거야. 맨정신으로 못 하는 걸 술김에 하는 건 옳지 않아.”
“그럼 술 안 취하고 말하는 건 괜찮나요? 지금처럼?”

태혁은 겨우겨우 웃음을 누르며 애써 딱딱한 표정을 유지했다. 왠지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해준.”
“네, 사장님?”

해준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참 예쁘다. 이런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게 과분할 정도로 예쁘고 맑은 여자다.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휘젓고 싶지 않았다.

어제 그렇게 가차 없이 말해놓고 생각이 많았던 건 태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재고할 가치조차 없었다. 두 사람은 가야 할 길이 명백히 달랐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힐 열병 같은 감정일 거였다.

“여긴 회사야. 연애하는 놀이터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네 맘 이제 네가 정리해.”

그의 단호한 말에 해준의 표정이 부끄러움과 서러움을 담은 채 극적으로 바뀌었다.

“이해준 부하직원으로 맘에 들어. 아니, 인간 이해준도 좋아. 이제껏 부하직원에게 말을 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것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편하고 마음에 들어. 이런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게 네가 잘 알아서 했으면 해.”

태혁은 최대한 완고한 어조로,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단호하게 얘기를 했다. 더 복잡한 관계가 되기 전에 끊어야 했다. 그녀의 마음도 그렇지만 헷갈리고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시들어가는 해바라기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있던 해준이 입을 열었다.

“부하직원으로도 좋고, 그냥 이해준도 좋은데……. 그래도 여자로는 싫단 말씀인가요?”

태혁은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손가락으로 잠시 미간을 눌렀다. 할 말 다하는 성격이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직구를 날릴 줄은 몰랐다.

여자로 보인다. 그게 문제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순 없었다. 태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태하에게서 두 번이나 여자를 떼어놓고, 자신은 저 좋다고 하는 여자를 당당하게 만날 자격이나 있을까.

“이해준, 잘 들어. 나 열흘 동안 출장 가 있는 동안 잘 정리해. 정리하고 밝은 얼굴로 봐. 네 표정 보면 나까지 기분 좋아지니까.”

태혁은 사랑만큼 헛된 약속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감정이란 시간이 지나면 바뀌게 마련이다. 해준이 순수하게 그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차피 그 감정 역시 오래가지 못할 거였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선을 보고, 다정하고 멋진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면 지금의 일쯤은 사소한 추억으로 치부되겠지.

걸어가는 해준의 어깨가 유난히 처져 보였다. 태혁은 그 어깨를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느꼈다.

맑은 눈이 항상 그를 좇고 있는 것을. 그때부터였다. 마음 한편에 살랑, 봄바람 같은 바람이 분 게. 작은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가슴이 간질간질한 게.

하지만 이런 감정의 사치는 여기서 끝.

태혁은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목차


프롤로그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에필로그 I
에필로그 II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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