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빛줄기로 기록한 노래”
b판시선 26번째로 『회색빛 베어지다』를 펴낸다. 이 시집은 박선욱 시인이 25년 만에 출간하는 네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그동안 시집 제외한 다양한 장르와 유형의 책들을 출간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시에 대한 갈망이 더욱 강해졌다. 따라서 시인이 오랜만에 시집을 출간하면서 밝히는 다음과 같은 소회는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해묵은 노트를 들여다보다 덮곤 했던 일들을 비로소 마무리 짓는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이번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는 개인과 역사를 넘나들고 서정과 서사를 교차시키면서 가능한 한 모든 세계를 아우르기 위해 힘쓰고 있다. 세상 만물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불의나 폭력적 상황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시편마다 깊숙이 배어 있다. 시집을 펼치면 첫 시편에서부터 맑고 뜨거운 마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눈부신 향내(「부용」)와 분홍빛 흩뿌려지는 소리(「나팔꽃」), 뜨거운 눈물(「목포의 동백」)과 맑은 웃음(「라일락」)이 은빛 우주(「산세비에리아꽃」)에서 “지친 하루 끝에 무지개가 뜨기”(「하늘」)를 바라는 시인의 바람이 서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한편 이번 시집에는 잔잔한 물결 같은 시들 이외에도 생명에 대한 사랑과 만물의 화평을 굵직한 선으로 그려낸 시편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국가적 폭력이 자행된 곳의 참상을 강력하게 규탄하기도 하고, 억울한 죽음에 대한 곡진한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고, 인간의 폭력에 속수무책인 땅과 강들 나무와 숲에게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보낸다.
시인은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5월은 사랑이다”라고 “붉디붉은 사랑이라고”(「이 살가운 봄날에」) 선언하며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이라크 전쟁의 아비규환을 보면서는 “전쟁의 노래가 끝없이 되풀이되는 유령 같은 대낮”에 “평화와 번영이라는 말을 누가 함부로 입에 올리”(「모래바람 부는 사막에서」)느냐며 분노한다.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에는 수많은 억압받은 자들의 아우성이 담겨 있다. 전쟁에서 무고하게 학살당한 사람들(「고봉산에 다시 피는 꽃), 미선이 효순이(「악의 축」), 세월호 참사(「그날」, 「푸른 꿈」), 4대강사업으로 죽은 강들(「한반도 대운하 걷어치워라」), 4·3제주항쟁(「상처」).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는 국가 간 폭력에 시달리는 가난한 나라들, 소외당하고 차별받는 약자들 바로 그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철은 표제작인 「회색빛 베어지다」를 바탕으로 시집 전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시상 전개로 볼 때 부용과 연꽃과 연장선상에 있는 수양버들을 그린 이 시에서는 이렇게 역류, 반란, 혁명정신을 읽을 수 있다. 시인의 어렸을 적 순정과 그런 순정을 잃지 않고 현실과 역사를 헤쳐 온 진솔한 체험이 이렇게 우리 사는 세상을 정토(淨土)로 가꾸려는 혁명의 서정과 서사가 한데 어우러진 시집이 『회색빛 베어지다』이다.”
나해철 시인 또한 “박선욱 시인이 이 땅을 사랑하는 민족시인이고, 신자유 자본주의를 헤쳐 나가는 서민의 삶을 사는 민중시인이라는 것을 아름답게 증언하는 시집이다”라고 신의를 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