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와 ‘욕심’이 아닌 ‘느림’과 ‘비움’을 통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꿈꾸었던
우리 문학의 큰 별들이 피서지에서 보내온 따뜻한 위로와 응원의 문장
1941년 8월 5일 오전 8시 50분. 만해 한용운은 서울발 원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만원 승객으로 인해 차 안 공기는 후끈하고 불결했지만, 환갑을 넘긴 만해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다음 날, 원산 갈마역에서 내린 만해는 명사십리(明沙十里)로 향했다. 명사십리는 그 이름 그대로 가늘고 흰 모래가 십 리에 걸쳐 있고, 해송과 해당화가 어우러진 천혜의 해수욕장이었다. 또한, 해안 남쪽에는 서양인 별장 수십 호가 있고, 해수욕 절기에는 동경, 상해, 북경 등지의 사람들까지 몰려와서 피서할 만큼 당시 최고의 휴양지였다.
그곳에 이르러 만해는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급히 옷을 벗어 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명사십리와 인근에 있던 송도원 해수욕장을 오가며 해수욕을 했다. 그만큼 만해는 피서의 일환으로써 해수욕을 즐겼다. 심지어 해인사 순례 길에도 짬을 내 해운대에 들렀을 정도였다.
「명사십리」라는 글을 보면 만해가 ‘모든 방면으로 시끄럽고 성가시던 서울을 뒤로 두고’ 모처럼 명사십리 바닷가에서 얻은 마음의 평화가 글 곳곳에 배어 있다. 특히 ‘짓궂은 물결은/ 해죽해죽 웃으면서/ 한 발로 모를 차고/ 한 발로 샘을 짓는다’라는 대목에 이르면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으며 미소 짓는 그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하다. 이는 익히 우리가 알고 있던 근엄하고 엄숙한 만해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지친 마음과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했던 문인들의 행복 통신
80여 년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잔잔한 서사와 진한 서정의 페이소스!
『성찰의 시간』은 이효석, 백석, 이상, 한용운, 이태준, 정지용 등 우리 문학을 사로잡은 큰 별들이 피서지에서 보낸 글을 엮은 휴식 에세이다. ‘출세’와 ‘욕심’이 아닌 ‘느림’과 ‘비움’을 통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즉 ‘소확행’을 꿈꾸었던 문인들의 이야기는 몸과 마음이 지친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응원을 선물한다. 책 여기저기에 잘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오롯이 펼쳐지는 1930~40년대 피서지 풍경과 낭만, 서정 역시 짙은 페이소스를 낳는다. 80여 년의 시공간의 흐름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름 해수욕장은 어지러운 꽃밭이다. 청춘을 자랑하는 곳이요, 건강을 경쟁하는 곳이다. 파들파들한 여인의 육체, 그것은 탐나는 과실이요, 찬란한 해수욕복, 그것은 무지개의 행렬이다. 사치한 파라솔 밑에는 하얀 살결의 파도가 아깝게 피어 있다. 해수욕장에 오는 사람들은 생각건대 바닷물을 즐기고자 함이 아니라 청춘을 즐기고자 함 같다.”
─ 이효석, 「계절」 중에서
그들에게 있어서 피서는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닌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자 새로운 도약의 기회였다. 이에 한가한 곳을 찾아가 삶을 되돌아보며 재충전하기도 했고,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하지만 즐겨 찾는 장소와 성찰 방법만은 그들의 개성처럼 천차만별이었다. 예컨대, 만해 한용운 같은 이는 해수욕을 통해 심신을 단련했고, 이효석은 날마다 손수 만든 밤 샌드위치와 커피를 가지고 자신만의 장소를 찾아가 외로움을 즐기는 방법으로 피서를 했다. 또한, 춘원 이광수는 시원한 돌베개 하나에 의지해 순전히 집에서 더위를 피했고, 이상은 요양을 위해 지인의 고향에서 여름을 보내며 그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답다는 「산촌여정」을 썼다.
문인이기에 앞서 삶의 선배로서 삶의 요소요소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치 우리 앞에서 직접 이야기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꿈을 찾아 정처 없이 내닫고 싶은 마음, 한정 없이 간 곳에 필연코 찾는 꿈이 있으려니 짐작됩니다. 혹 없을지도 모르지요. … (중략) … 사람이란 천생 외로운 물건입니다. 외로운 속에서 모두 각각 자기의 꿈을 껍질 속에 싸가지고 궁싯궁싯 서글픈 평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 이효석, 「바다로 간 동무에게」 중에서
“인생이란 결국 물가의 모래 위에 써 놓고 가는 허무한 기록인가. 하지만 그것은 바닷물에 씻기고 또 씻기는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런 것을 우리는 좀 더 크게, 좀 더 길게 써 놓고 가려고 애쓰며 허덕이고 있지 않은가.”
─ 노천명, 「해변단상」 중에서
그들은 크고 허황한 꿈보다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 즉 ‘소확행’을 꿈꾸었다. 생각건대, 그들 역시 거기서 진정한 삶의 기쁨과 존재의 의의를 느꼈으리라.
이제 곧 피서 시즌이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것들을 되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친 마음과 몸을 위로할 소중한 기회다. 나아가 그것을 기회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여름휴가는 이 책의 주인공인 문인들이 그랬듯이 나만의 ‘소확행’을 이뤄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