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된 이래 가장 서툴고 낯설었던 1년,
그때마다 위안이 되어준 그림들…
거칠지만 매력적인 도시, 뉴욕에서 진짜 나를 발견하다
“이 책의 주제는 ‘뉴욕’이지만 사람들이 기대하는 화려하고 세련된 뉴욕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온 적 없는 30대 후반 여성이 난생처음 해외에서 살며 모든 계급장을 떼고 뉴욕이라는 거친 도시와, 그리고 스스로와 한판 붙으며 겪은 좌충우돌의 견문록이다.”
직장생활 14년 차에 주어진 해외연수 기회. 지은이는 단기 이민에 가까웠던 뉴욕에서의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접하면서 스스로를 보다 명료하게 바라보게 됐고, 그리하여 자신을 더욱 성장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고백한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다보던 미지의 도시, 뉴욕. 때로는 거칠고 빠른 도시의 파도에 떠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그림과 예술작품 들이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책에서는 뉴욕에서의 경험담을 비롯하여 로버트 인디애나, 에드워드 호퍼 등 낯선 도시에서 위로가 되어준 작품들도 함께 소개한다.
▶뉴욕의 FOB◀
FOB는 ‘fresh off the boat’의 줄임말로, ‘배에서 갓 내려 세상 물정을 모르는’이라는 뜻의 속어다. 이는 미국에 갓 도착한 이민자나 외국인 유학생을 은근히 얕보는 의미로 쓰이곤 한다. 그리고 여기, 자칭 타칭 ‘뉴욕의 FOB’가 되어버린 한 사람이 있다. 10년을 훌쩍 넘긴 직장생활 중에 찾아온 해외연수의 기회. 대학 때 조차 어학연수 한 번 가본 적 없는 30대 후반의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하게 된 외국 생활은 그야말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많은 뉴요커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하는 “This is New York(이곳은 뉴욕이야)”이라는 말은 이 풋내기 뉴요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하면서도 거친 도시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로 다가오기도 한다.
처음 뉴욕에 도착해 두 발이 부르트도록 집을 구하러 다니고, 어렵사리 구한 집에서 룸메이트들과 복닥대며 생활하고, 쉬도 때도 없이 울리던 업무 전화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처음 만난 자유 속에서 자꾸 허방을 짚는 듯 손 안에 쥐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기도 한다. 장기 여행이라고 여기며 떠나왔지만 막상 겪어보니 뉴욕에서의 생활은 단기 이민에 가까웠고, 여행과 달리 ‘삶’은 뿌리내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은이는 스스로 루틴을 만들고 비일상을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숱한 해프닝을 겪으면서 그녀가 찾은 것은 무엇일까.
“여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별다른 계획 없이 나라와 도시만 정해 연수를 오면서, 가장 자주 생각한 인물이 괴테였다. 그가 바이마르를 떠나 이탈리아로 떠난 건 더 큰 세계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쓴 이탈리아 체류기 『이탈리아 기행』은 세계적인 명저로 꼽힌다. 나 역시 비슷한 나이에 해외로 온 거였기 때문에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괴테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예술가들에게 여행은 자극이다. 샬럿 브론테는 벨기에에 다녀왔다. 보스턴 파인아트뮤지엄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처음 알게 된 미국 화가 윌리엄 메릿 체이스는 뮌헨에 있었다.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기 안의 세계에서 또다른 문을 열어주는 일인 걸까.”(292쪽)
▶낯선 곳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들◀
“나처럼 살지 않기 위해 뉴욕에 왔는데, 나는 이곳에서도 정말 나처럼 살고 있었다. 낯선 곳에 오니 내가 누구인지가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잘 보이는 것만 같았다.”(28쪽)
‘나처럼’ 살지 않기 위해 분투했다고 말하는 지은이. 하지만 그곳에서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들린 건 내면의 울림이었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일 때 가장 나다워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곧 앞으로의 삶을 보다 더 행복하게 해줄 거라는 믿음을 키웠다.
“1년간 나는 많이 바뀌었다. 떠나기 전의 나는 누군가 정해놓은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살았다.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말 잘 듣는 맏딸로 자란 탓인지 내 감정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었다. (……) 만 15년간의 직장 생활을 대개 남의 눈치를 잔뜩 보면서 했다. 그러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기자답지 않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고, 전형적인 기자답지 않은 나 자신이 안쓰러우면서도 싫었다.”(299쪽)
어쩌면 우리는 익숙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내면의 목소리를 지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편이 사는 데 더 편하다며 자기 자신을 설득해왔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지은이가 그랬던 것처럼 낯선 세계를 경험하게 되면 자기 안의 또다른 문이 열리며 그 문 앞에 선 ‘나’와 직면하게 된다. 낯설기 때문에 더욱 선명해지는 자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곳을 찾아 기를 쓰고 떠나는 것일 터다. 나 자신과 조우하기 위해.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뉴욕에서 혼자 외롭지 않았느냐고. 그렇지 않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1년간 죽 나와 함께 있었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내가 너무나 크고 무거워서 종종 버겁기도 했지만, 그리하여 나는 나를 좀더 잘 알게 되었다. 내가 나를 데리고 다닌 1년이었다.”(12쪽)
책에는 미술사를 공부하고 일간지에서 미술 담당 기자를 맡기도 한 지은이의 이력답게 현대미술의 중심지 뉴욕의 미술시장을 경험한 에피소드들도 가득하다. 인스티튜트오브파인아츠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알브레히트 뒤러의 실물 작품을 보며 연구하고, 세계 굴지의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에서 운영하는 크리스티에듀케이션에서 아트 비즈니스를 체험했다. 이밖에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모건라이브러리, 현대미술관, 브루클린미술관 등 뉴욕 곳곳에 자리한 미술관들을 다니며 작품을 감상하고 체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뉴욕에서 만난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은 지은이의 뉴욕 생활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작품이자, 힘들 때마다 위안이 되어준 그림으로 책을 관통하는 주요한 작품으로 자리하고 있다.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라고 맺는 지은이의 좌충우돌 뉴욕 방랑기. 그 1년의 시간을 함께 여행할 독자를 초대한다.
[책속으로 추가]
미국에 대해 무조건적인 환상을 갖지 않게 된 것은 뉴욕, 그중에서도 맨해튼에 살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 귀국 후 나는 서울이 다정한 도시라고 느꼈다. 공항 직원들은 친절했고 식당 종업원들은 깍듯했다. 지하철은 절대 늦지 않았고 깨끗한데다 쾌적했다. 뉴욕에서의 삶은 거칠었다. 매일매일 긴장해야만 했다. 꼭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뉴욕은 모든 외지인에게 거친 도시였다.
_「미국이라는 환상」에서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그 맹세대로 뉴욕에 있는 동안 정말 열심히 놀았다.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놀았다. 학교도 다니고 크리스티 수업도 들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 시간들은 공부라기보다는 유희에 가까웠다. ‘생산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노는 것에 대해 때때로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 마음을 버리려 노력했다.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건 책을 통해 쌓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체험이었다. 몸으로 배운 건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벗어나 최대한 많이 경험하고 견문을 넓히자고 결심했다.
_「프로 놀러」에서
자식의 고통을 예견하는 거창한 일과는 거리가 멀지만, 내게도 독서란 일종의 제의(祭儀)적 성격을 띠고 있다. 책읽기란 오래전부터 내게 또다른 세계와의 만남, 일종의 접신(接神)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1년간은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곳은 내게 이미 ‘다른 세계’여서 굳이 책읽기를 통해 또다른 세계를 꿈꿀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뉴욕 구석구석을, 서점을, 낡은 책들로 가득한 헌책방을 탐험하는 방식으로 내면의 성채를 쌓아올릴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책이라는 오래된 친구를 만나고 다녔다.
_「뉴욕의 서점」에서
단기 이민에 가까웠던 뉴욕 생활. 나는 묘한 동질감과 연대감을 느끼며 이민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은 노스탤지어의 용광로 같은 나라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고향을 떠난 자들이 품은 꿈을 의미하니까.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세운 도시 뉴욕은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에서도 가장 이민자들의 도시 같은 곳이었다. 이민의 역사가 뉴욕의 각 지역에 또렷했다.
_「이민자들의 나라」에서
귀국을 3주 앞둔 이듬해 7월, 나는 엘리스아일랜드에 가는 배 안에 있었다. 1892년부터 1924년까지 미국의 이민심사국 역할을 한 허드슨강의 섬 엘리스아일랜드는 1954년에 이민심사국이 폐쇄되고 이후 재건을 거쳐 1990년에 이민박물관으로 재탄생한다. (……) 박물관을 보면서 복잡한 마음이 들었는데 역시나 미국 이민의 역사는 백인의 역사이고 미국은 백인들의 나라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강하게 들어서였다.
_「이민자들의 나라」에서
‘뉴욕의 기록자’라는 임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한 슬론은 워싱턴스퀘어파크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젖은 밤, 워싱턴스퀘어」 역시 사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취임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든 워싱턴스퀘어아치와 그 앞의 분수, 그리고 아치 뒤에 늠름하게 서 있는 아르데코 양식의 빌딩 원피프스애비뉴(1 Fifth Avenue)……. 비 오는 밤, 가로등 빛에 비친 젖은 거리의 모습은 우아하면서도 격조 있는 도회적 애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림 속 풍경은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모습이지만 지금의 워싱턴스퀘어파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짧은 뉴요커 시절 나는 워싱턴스퀘어파크에 갈 때마다 사진을 찍어 ‘오늘의 워싱턴스퀘어파크’라는 제목으로 인스타그램에 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 공원의 아름다운 순간을 그림으로 기록하고자 했던 슬론에게 자그마한 동질감을 느꼈다.
_「그리니치빌리지」에서
미국에 오기 전까지 내게 인종차별이란 단지 개념에 불과했다. 실제로 내가 그런 일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뉴욕에 살면서 나는 매일 내가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 인종차별이 무서운 것은 인종차별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교양을 통한 의식적인 자기 교화가 끊임없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백인과 흑인과 히스패닉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인종적 우열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동종(同種)이 아니라는 이질감에 대한 것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다른 인종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인종적 편견을 갖지 않는다는 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_「할렘에서」에서
여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별다른 계획 없이 나라와 도시만 정해 연수를 오면서, 가장 자주 생각한 인물이 괴테였다. 그가 바이마르를 떠나 이탈리아로 떠난 건 더 큰 세계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쓴 이탈리아 체류기 『이탈리아 기행』은 세계적인 명저로 꼽힌다. 나 역시 비슷한 나이에 해외로 온 거였기 때문에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괴테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예술가들에게 여행은 자극이다. 샬럿 브론테는 벨기에에 다녀왔다. 보스턴 파인아트뮤지엄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처음 알게 된 미국 화가 윌리엄 메릿 체이스는 뮌헨에 있었다.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기 안의 세계에서 또다른 문을 열어주는 일인 걸까.
세계의 확장에 대해서도 여러 번 생각했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을 겪었을 때나, 대체 내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때도, 내가 찾은 답은 한 가지였다. 세계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_「기차여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