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앙 시선-일하며 부르는 노래>를 펴내며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상을 노래하는 시를 모은 시집 <일하며 부르는 노래> 시리즈 네 번째 책 『불량 시민』(하태성)이 나왔다. 시인 하태성은 현재 노동조합 간부로 활동하고 있다. 시리즈 첫 번째 책(곽장영, 『가끔은 물어본다』)과 두 번째 책(이성우 『삶이 시가 되게 하라』)은 2005년 5월에 출간됐으며 세 번째 책(김홍춘, 『강』)은 2006년 9월에 나왔다.
도서출판 레디앙은 앞으로 시집 발간을 계속 하면서 다양한 현장에서 일하는 다채로운 노동자 시인들이 이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시와 노동자, 시 쓰기와 노동운동이 행복하게 만나, 노래가 힘이 되고 무기가 될 때, 노동자들의 삶은 풍성해지고, 투쟁은 힘을 얻고, 희망의 싹은 무럭무럭 자랄 것이라는 믿음이 이 시리즈를 기획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 <일하며 부르는 노래> 시리즈는 ‘시 쓰는 노동자’를 찾아내고, ‘시 읽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며 계속 된다.
특히 시집 출간 비용은 출판 취지에 공감하는 ‘아마추어 시인’ 주변의 ‘동지’들과 지인들이 ‘시집 만들어 주는 노동자’들이 돼 십시일반 힘을 모아 시집 출간 비용을 후원해 주고 있다. 또한 시집의 판매 수입은 이후에 계속 나올 시집 제작비에 투입돼 시리즈 발간의 지속성을 확보할 방침이다.
“불량 시인의 불온한 시 쓰기”
불량함의 정체
1967년 1월 어느 날, 어디에서 시를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의미’로서의 시가 안 된다고, 그냥 글씨의 나열이라고 자학하던 시인이 있었다. 김수영이다(「글씨의 나열이오」, 1967. 1에서). 그 비명의 이유는 시의 새로움 때문이다. 자신의 시를 신용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바로 현대의 명령이라고 믿고 있는 카뮈나 랭보처럼 자신의 시를 절대적으로 경멸하는 자만이 시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자학과 자기경멸은 정당하다.
하태성의 시적 근원도 이 언저리 어디쯤이지 않을까. 불량 시민을 자처하고 나선 그의 시는 현실의 중심에서도 시의 정수에서도 자꾸 미끄러지고 있어 의미의 본질을 찾기가 힘겹다. 그렇다면 하태성의 시는 소위 무의미 시인가. 그럴 리 없다. 너무 꽉 찬 의미의 포만으로 독자는 금세 나가떨어질 것이다. 어쩌면 구호처럼 쏟아진 의미의 바다는 하태성이 자신의 시의 통점을 숨기려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독자 역시 삐딱하게 불량한 시선으로 그의 시를 촘촘히 살펴보길 청한다.
작은 나무가 큰 나무에게
철 지난 꽃들이 활짝 핀 꽃들에게
다치고 병든 사람이 성한 사람들에게
공장에서 쫓겨난 사람이 이제 막 첫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해고 500일을 맞은 노동자가 파업을 시작하는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더 아프고 더 소외되고 더 보잘것없는 이들이 가진 자들에게
‘괜찮다’고 어깨 다독거리며 하는 말
나, 지금껏 위로만 받아왔다
-「위로」 전문
바슐라르에 따르면 시의 새로움은 직관과 사적 경험과 최초의 실재에서 벗어나 전복하고 해체하며 논쟁하여 통합하는 데서 시작된다. 위 시에서 하태성의 시적 상상력을 감지할 수 있다.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다윗의 돌팔매질이다. 큰 것, 화려한 것, 온전한 것, 생기발랄한 것, 안정된 것, 풍요로운 것이 행사했던 지배적 가치가 작고, 보잘 것 없고, 불완전하며, 시들어 버린, 불안한, 결핍이 지닌 소수적 가치에 된통 얻어맞는 역설이며 극적 아이러니다.
이처럼 하태성 시의 불량함은 양질에 반대되는 그저 ‘나쁨’ 정도의 사전적 개념을 뛰어 넘는 것이다. 좋고 나쁨의 이분법적 분리에서 벗어나 그 판단의 주체를 바꾸고, 주변적이고 배제적인 가치의 전복을 통해 변두리성, 혹은 지역성의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는 당당함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는 식의 하태성의 시는 위악(僞惡)의 태도를 드러낸다. 건들대며 껄렁껄렁한 빗나가는 시의 기울어짐은 그래서 의미를 가득 담고 있지만 진정 읽어야 할 것은 남은 잔해와 같은 쓸쓸함이다.
한 솥에 삶아진 뼈다귀 해장국
뼈와 살 발라가며 빈속을 채워 본다
뚝배기에 곰삭은 깍두기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도
뼈와 살이 떨어지지 않는
아! 얼마나 뜨거운 몸부림인가?
쓴 소주 한 잔에 떼어놓은 뼈마다
뼈 속 사이 사이 하얀 골수가
과거처럼 아프다
떼어지지 않으려는 힘줄 하나
아! 얼마나 뜨거운 사랑인가?
그러나 보아다오 철저하게 발려진
빈 그릇에 수북이 쌓인 빈 뼈다귀들
뻘건 깍두기 국물로도 달랠 수 없고
소주 한 잔으로도 보낼 수 없었던
아! 지금은 발려진 뼈처럼
내 안에서 쓸쓸하게 끓어오르는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의 한자리
-「그리움의 한 자리」전문
‘뜨거운 몸부림’과 ‘뜨거운 사랑’이 차갑게 ‘그리움’으로 바뀌는 이 순간에 불량함의 정체가 드러난다. ‘철저하게 발려진/빈 그릇에 수북이 쌓인 빈 뼈다귀들’이 발산하는 형해(形骸)의 이미지다. 하태성의 시적 지향은 열에 들뜬 공간 속으로 몰고 가는 듯하지만, 그래서 불량해 보이지만 거기 막다른 곳에 연민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의미의 저장이다. 뼈아픈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태성의 시를 시답게 만드는 자질로서 불량함은 역설과 아이러니의 언어와 지역의 공간성이라는 소수 담론과 연민이라는 인간적 공감을 뼈대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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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함은 불온하다
하태성의 불량 시론은 단적으로 시의 위악(僞惡)이 핵심이다. 짐짓 과하게 보일 수 있는 시의 행보는 투박함과 단순함에 함몰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는 시의 지역성이 지닌 특질이며 한계이기도 하다.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원심적 사유는 시의 성숙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핵심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심적 긴장을 저버릴 수 있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불량 시민이 자유와 해방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불온의 재전유가 있어야 한다. 다시 김수영을 끌어들이면, 불량을 넘어 불온을 구가하기 위해 ‘숨어있는 검열자’를 두려워해야 한다. 하태성에게 노동의 가치가 절대 불가침 영역으로 규정되는 순간, 시는 자유를 잃고 진부해질 것이다. 시의 새로움은 어떤 두리번거림도, 머뭇거림도 없어야 획득되는 진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던 일들이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었다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에서
불온한 시인은 삶과 세상을 변혁하려는 목적을 앞세우는 자가 아니다. 무관심 속에 놓인 미미한 존재에 대해 눈길을 두어야 한다. 숨어있는 검열자가 관심 두지 않는 곳에 시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래서 이번 시집을 기점으로 하태성의 불온한 시 쓰기가 시의 위악을 넘어 시의 위의(威儀), 즉 안으로 뜨겁고 밖으로 서늘한 경지에 가 닿길 고대한다.
꼬여서는 풀리지 않는 세상
꼬인 덩이 풀어내는 건
뜨거운 국물이다
-「뜨겁다는 것」에서
이처럼 하태성은 이미 안으로 뜨겁다. 현실과 대응하여 꼬인 삶의 질곡을 풀어내기 위해 투신할 의지와 용기로 충만하다. 그러나 이는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진 엠페도 클레이스의 단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신화적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신이 되려는 욕망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 뜨거운 시적 열정으로서 불량함을 다스리고 제어하려는 형식적 절제 또한 절실하다.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은 모름지기 경계에 서 있어야 한다고 노자(老子)는 말한다. 하태성의 불량 시론도 바다 위를 밟고 서 있으면서 거대한 파도에도 휩쓸리지 않으며, 또한 바다 밑으로 빠져버리지도 않는 수면의 위와 아래의 경계에 서있는 불온한 길이었으면 한다. - 이민호(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