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江戶時代) 260년 동안, 조선에서 12차례나 외교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다. ‘조선통신사’로 불렸던 그들은 1회 평균 450명. 한성(서울)에서 에도까지 국서를 휴대하고 가는 약 1년의 긴 여정이었다. 악대와 문인, 화공과 마상재를 포함한 이국적인 행렬은 그 당시 일본인들에게 컬처 쇼크를 던지며 각지에서 다양한 사건과 문화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켰다. 현대에 내려오는 도진 오도리 춤이나 인형들에는 일본민중의 놀라움과 조선 붐의 열기가 넘쳐흐른다. 통신사와 인연이 있는 고장을 그림, 사진과 더불어 찾아가며 한일양국의 우호와 문화교류 역사를 더듬어본다.
조선통신사는 현재의 나침반이다
강남주
역사는 살아 있는 사람이 기록한다. 그러나 그 역사를 만든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경우가 허다하다. 역사는 오직 후세에 의해서 평가받을 뿐이다.
신기수 선생이 쓴 일본어판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이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책을 손에서 놓으며 아득해지는 심정이 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바로 이 책이 신선생의 따님 신이화씨에 의해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된다. 참 잘 된 일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느낄 것이다. 어떻게 한 개인이 이렇게 방대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가. 시간과 열정, 수집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가. 그것이 궁금해질 것이다. 설령 시간과 자금이 있다고 해도 열정과 역사에 대한 안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이 책의 몇 장 책갈피만 넘기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신선생은 조선통신사가 들렀던 곳 모두를 직접 방문했다. 엄청난 발품으로 이 책이 이루어졌다. 가는 곳마다 조선통신사가 남겨 놓은 문화적 소산물을 구할 수 있는 데까지 구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교류하는 장면을 낱낱이 조사해서 이 책에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1979년 불후의 역사적 고증의 작품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남겼다.
이 영화는 조선통신사에 대한 일본인과 한국인의 오해와 편견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조선과 일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불구대천의 원수 나라가 되었을 때 그 원한관계를 어떻게 청산하고 전후 2백년 이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현미경처럼 보여준다.
만일 신선생의 이와 같은 노력이 없었더라면 2017년 10월 조선통신사 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문화교류의 현장, 그런 곳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은 이제 한국과 일본의 것만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이 전쟁을 슬기롭게 처리하고 평화를 일구어낸 세계적인 유산으로 격상되었기 때문이다.
신기수 선생의 생전의 그 노고는 이제 역사 속에 온전히 보존될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고인이 되었다. 전후 2백년 간 한일 간에 있었던 그 인고와 결과적 성과는 그가 지나간 발걸음, 그의 손이 쓰다듬은 흔적에 의해서 온전히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흔적을 우리는 ‘조선통신사의 여정’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 귀한 책이 그의 딸 신이화씨에 의해 우리나라에 번역된다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는 살아 있는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며 현재의 시점에서 해석된다는 사실, 그 사실이 미래의 나침반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는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흐렸다 개였다 하는 어수선한 한일관계를 보면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이 책의 소중함을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 일독을 권한다. (전 부경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