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 배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 아홉 명을 찾을 것만 같아 애타게 물 밖으로 나오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노란 리본을 달며 기다렸다.
2017년 3월 31일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도착하고, 4월 11일 드디어 육상에 거치된다.
마침내 거대한 몸집을 수면 위로 드러낸 세월호는 아홉 명의 가족에겐 희망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희망이 점점 절망으로 변해가리라는 것을. 재개된 미수습자 수습 과정에서 넷은 유해라도 찾았는데, 끝내 다섯은 유해를 찾을 수 없었다. 미수습자 다섯 명의 네 가족은 다시 절망했다. 가방과 유류품이 나온 경우는 그래도 다행이었다. 유류품 한 점 찾지 못한 가족도 있었다.
유해를 찾은 미수습자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고 목포신항을 떠나면서 남은 네 가족은 막바지로 몰렸다. 미수습자 네 가족은 2017년 11월 16일 해양수산부의 수색 종료 방침을 수용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년 7개월 만이다. 11월 18일 그토록 기다리던 유해 한 점 찾지 못한 가족들은 결국 목포신항을 떠났고, 11월 20일 빈 관의 장례식을 치렀다.
빈 관에는 시신 대신 병풍도 앞바다의 해저 흙이 담겼고, 가족들의 간절한 편지와 꽃들이 채워졌다. 마지막에 들른 단원고에서는 가족들에게 운동장의 흙을 넘겨주었다. 빈 관의 장례식을 마지막까지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지켜주었지만, 다시 미수습자 가족들은 절망의 시간 속에 놓였다. 그렇게 마지막 네 가족은 고스란히 절망을 받아들이며 세월호 곁을 떠났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2017년 11월 18일 오전 목포신항에서 합동 추모식을 치른 뒤 안산 제일장례식장과 서울아산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저자들인 오마이뉴스 기자들은 세월호 참사 후 3년 7개월의 시간을 고통 속에 보냈지만 결국 뼛조각조차 찾지 못하고 떠나야 할 미수습자 네 가족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내기 위한 동행을 준비했다. 목포신항에서 추모식이 엄수된 11월 18일까지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들은 세월호 주변을 거닐고, 함께 밥을 나누고, 컨테이너 숙소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자들에게 속내를 들려주었다. 기자들은 목포신항의 합동 추모식, 서울과 안산의 장례식, 2018년 1월 사십구재, 현충원 안장까지 함께 했다.
만일 일어날지도 모를 ‘영원한 미수습’이라는 문제
2018년 5월 초. 이제 목포신항에서 세월호를 바로 세우는 일을 앞두고 있다. 타기실과 기관실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조타기 조절기 고장 등 세월호 침몰의 원인을 정밀히 살피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이 마지막 수색 과정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미수습자 가족들이다. 미수습자 유해를 찾을 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목포신항에서 오는 소식을 기다릴 것이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얼마나 간절할까.
하지만 여기서마저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을 관심 갖고 지켜보는 많은 이들의 마음 한편에는 그런 불길함과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이분들 중 끝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분이 계시면 어쩌나. 혹시 누구라도 영원히 미수습자 가족으로 남게 되면 어쩌나.
지금은 그래도 세월호 선내 수색을 더 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그것마저 다 끝나고 나서도 못 찾는 분이 계신다면….” (유경근 위원장의 발문에서)
바로 ‘영원한 미수습’ 문제다. 영원한 미수습자 가족이라는 이름이 주는 고통의 무게를 누가 알 수 있을까.
1편의 편지와 16편의 일기
남현철 군 아빠 남경원 씨는 “죽고 싶을 때마다 한장 한장 썼다”고 했다. 아빠는 참사 이후 일기를 쓰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2017년 11월 20일 시신 없는 아들의?관이 타오를 때?남경원 씨는 뼛조각조차 찾지 못한 아들 대신 새로 마련한 교복과 속옷, 신발을 관에 넣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이후 아들을 기다리며 썼던 자신의 일기도 인쇄해서 함께 넣었다.
진도 실내체육관이 처음에는 가득 찼다가 서서히 시신을 찾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느끼는 공황 상태, 아이가 없는 아이의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겪은 감정의 소용돌이, 처음에는 그토록 미웠던 세월호가 나중에 목포신항에 올라와 가까이 마주하게 되면서 친구처럼 친숙해지는 사연 등 긴 어둠 속 터널 같은 시간을 보내온 기록이다.
1313일 동안 한결같이 ‘오늘은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설렘과 미안함’으로 기다렸다. 목포신항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세월호를 보며 아이를 빨리 돌려달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했다.
양승진 교사의 딸 양지혜 씨는 2017년 11월 18일 진행된 입관식에서 아버지의 유품이 담긴 관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관과 함께 태워진 편지의 재는 영원히 열리지 않을 아버지의 봉안함에 안치됐다.
아내는 세월호에서 남편의 체취를 느낀다
세월호는 남편의 체취를 담은 마지막 존재. 장례를 치르고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야 한다. 아내만 느낄 수 있는 공감각적 체취. 1313일 동안, 세월호에서 남편의 흔적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지옥에서의 3년 7개월
미수습자 권재근 씨의 형인 권오복 씨는 지친 유가족들이 하나둘 떠날 때도 사고 해역을 지켰다.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218일, 팽목항에서 862일, 목포신항에서 233일. 그는 “아직 미수습자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버텨야 했다”고 말한다. 오기로 버틴 것도 있다. “자, 봐라. 여기 지금 시신 못 찾은 미수습자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
편지와 일기에서
“캄캄한 바닷속에서 여전히 당신은 굶주리는데 밥을 넘기고 있는 저를 용서하세요. 낮과 밤 구분 없는 당신은 여전히 어둠 속인데 밝은 빛을 보고 있는 저를 용서하세요. 당신을 딸로서 지켜주지 못해, 찾아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양승진 교사의 딸 양지혜 씨가 아버지에게 부치는 마지막 편지에서)
“어제 저희 부부가 진도 팽목항에 가 울면서 아이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외로움과 공허함뿐이었습니다. 저 지평선 넘어 아이가 있어 바닷속에서 건져달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요. 하느님, 이제 아이를 돌려보내주시면 안 되나요. 십 프로조차 안 되는 확률도 제 욕심일까요?” (남현철 군의 아버지 남경원 씨의 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