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희 변호사의 첫 산문집. 법조계뿐 아니라 영화계와 문학판에서도 꾸준히 활동해오고 있는 저자가 여러 지면에 발표한 글들을 묶었다. 60편가량 되는 산문은 대체로 이명박 정부에서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퇴행하기 시작한 2008년 여름부터 지난해 장미대선 직전까지 기고한 글들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산문집은 작가가 살아가며 마음을 깊게 쏟았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뚜렷이 보여준다. 1부는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글을 모았다. 2부는 법조인으로서 생각한 법에 대한 이야기로, 3부는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한 글들을 묶었다. 영화사 대표로 일하기도 했던 저자가 사랑한 영화에 관한 글들은 마지막 4부로 삼았다.
이 책의 제목인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은 오에 겐자부로의 표현을 변주해서 제목으로 삼았다.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 소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에 이런 표현이 있다.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 “그래봐야 영화, 그래도 영화!” 정도로 번역해볼 수 있는 이 문장은 단순하면서도 아이러니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영화’라는 단어를 다른 어떤 장르로, 아니 인간이 욕망하는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해도 뜻이 생겨난다.
“그래봐야 소설, 그래도 소설!” “그래봐야 인간, 그래도 인간!”……
나는 이 문장을 ‘영화는 삶에 우선하지 못하지만, 삶의 불완전성을 채워줌으로써 삶을 완전하게 해줄지도 모른다’라는 의미로 읽는다. 장미는 자기가 장미인 줄도 모르기에 스스로 또 다른 장미를 꿈꾸지 않는다.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매우 성숙한 인간은 그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장엄한 것인가를 터득하기도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미처 살아내지 못한 다른 삶들을 생각하며 잠을 뒤척인다. 영화는 자연의 장미에 인공적으로 파란색을 입힌 ‘파란 장미’이고, 삶이라는 재료에 빛을 입힌 셀룰로이드다. 영화는, ‘이야기’는, 그리고 예술은 파편화된 삶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이고, 잃어버린 삶의 조각을 찾아 삶을 완전하게 하려는 시도이다. 나는 ‘파란 장미’가 과연 가치 있는 것인지, 그것을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의미 있는 작업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가 그게 아니라면 무엇을 무기로 도저한 현실의 중력에 저항할 수 있는지는 가늠조차 못하겠다.
민주주의나 정치에 관한 관심과 견해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가슴 속에 외로운 소년의 정체성을 간직한 저자가 풀어내는 사려 깊고 서정적인 문장들이다.
가랑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아버님이 내게 준 도시의 삶에 대하여 생각한다. 광속으로 움직이는 도시의 메트로놈. 이글거리는 욕망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순간들. 쉬기 위해 숨어들어가는 찻집, 술집, 노래방 따위가 주는 공허한 만족. 그가 그것들의 실상을 알았더라면 과연 내게 그러한 삶을 주고 싶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는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는 도시에 남은 아들의 몫이다. 아들이 풀어야 할 숙제는 무엇일까. 몇 년 전 집에 놀러 온 후배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서가의 책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어떤 책이죠?” 나는 니체라거나 라캉이라거나 파스칼이라거나 하는 거창한 사람들이 쓴 책들을 떠올렸지만 결국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라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또는 우리 강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주인공 소년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사랑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자기 앞의 생』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진심으로 좋아한 영화는 「빌리 엘리어트」, 「정복자 펠레」, 「허공에의 질주」이며, 하나같이 외로운 소년의 이야기다. 비는 여전히 내린다. 나는 술에 취한 이 새벽에 서재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오르고 싶었던 그 모든 절벽, 얻고 싶었던 그 모든 지혜, 버리고 싶었던 그 모든 욕망, 낙오하지 않으려는 그 모든 몸짓은 ‘혼자 버스를 타고 이 종점에서 저 종점까지 다녀오는 것을 낙으로 삼아야 했던 어느 소년’의 것이었다는 것을. 번듯한 직업을 가지게 되고, 무언가 이룬 듯 행세를 하고, 짐짓 거만하게 철학과 정치를 논하고 있는 이 속된 자의 가슴 한편에는 땅에서 뿌리 뽑힌 채 돌아갈 고향을 가지지 못한 아스팔트의 소년이 있다는 것을. 그 소년은 내 안에 유폐된 채 끊임없이 독백을 한다. ‘이 사막 같은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람들은 번듯하게 살기 위해 도시에 몰려든다. 켜켜이 쌓인 그들의 욕망은 도시라는 거대한 성채를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도시의 주인이라기보다는 ‘도시의 내장을 기어다니는 벌레’일지도 모른다. 도시는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했지만, 경쟁에서 진 사람들은 하수구에 던져지고, 이긴 자들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시달린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던 삶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바로잡을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적응하거나 낙오하거나 도망하는 것만이 허용되어 있다. 모르겠다. 괜찮다던 그의 삶보다 내 삶이 더 괜찮은지. 언젠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성모병원에서 아니면 그 어떤 요양원에서 내 삶을 마감할 때, 개울도 아니고 개천도 아니고 병원에서 태어난 딸에게 “내 인생은 괜찮았어”라고 나도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말했던 아버님은 진심이었을까. 아버님이 시골을 떠난 것과 같은 결단이 도시에서 태어나서 그 가공할 속도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온 나에게도 필요할지 모른다. 그런데 아버님의 결단이 고향을 떠나는 것이었다면 나의 결단은 세상 어딘가에서 고향을 찾아내는 것일까.
마침내 비가 멎었다. 아내는 여전히 잠들어 있고, 모모는 내가 서재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딸이 그리워 전화를 하려다 딸이 의아하게 생각할까 봐 그만둔다. 대신 나는 고향에 묻힌 아버님에게 전화한다. “당신의 인생은 정말 괜찮았나요? 이젠 솔직히 말해주세요. 제 인생도 괜찮을까요? 아니,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나는 서재에서 나와 내 안의 소년에게 멜라토닌 한 알을 준다. 눈을 뜨면 문득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