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시간을 위하여
젊음보다 치열한 노년이라는 문제
톨스토이는 《인생론》에서 “자기 생존의 무의미함과 비참함을 느끼지 않고서는 계속 살아나갈 수 없는 때가 머지않아 닥쳐올 것”이라고 말했다. 노년에 접어든 인간이 일반적으로 겪는 심적 고통을 거론한 내용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노인들에게는 톨스토이의 고민이 한가해 보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노인으로 사는 일은 정신적 결핍감 이전에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신적 갈등까지 이중으로 더해져, 노년은 괴롭고 외로운 시기라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미술 작품을 통해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해온 저자 박홍순은 이 책에서도 이중섭, 박수근을 비롯한 유수의 한국 화가들과 고야, 렘브란트, 고흐 등 친숙한 외국 화가들의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사유의 출발을 알린다. 박수근 작가 특유의, 화강암에 새겨놓은 듯한 그림의 질감에 퇴락한 노인의 신세를 투영하고, 이를 또다시 최인호의 소설에 나오는 ‘고궁에 돌처럼 버려진 노인’과 연결한다. 익숙한 고전을 비롯해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소설가들이 주인공으로 다룬 노인의 모습은, 언젠가 들었거나 만났던 제삼자가 아니라 나 자신의 미래를 비추는 듯한 현장감을 선사한다. 이미지와 언어를 통해 구체화된 노년의 삶은 혹독할 만큼 현실적이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남은 삶을 어찌할 것인가.’
지금 그 자리로부터, 의미 있는 여정을 이어가도록
한국에서 노인을 둘러싼 논의는 부양 문제에 초점을 맞추거나 통계적 차원에 머물러왔다. 그러나 경제적 영역의 중요성이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노인 문제 전체일 수는 없다. 노인 한 명의 삶에, 각 영역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엉키고 뒤섞여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년의 삶을 총체적으로 다루기 위해 현실적으로 맞닥뜨리는 빈곤과 역할 갈등으로부터, 톨스토이가 주목한 생존의 무의미와 비참함이라는 영혼의 문제까지 폭넓게 접근한다.
안정적인 노후를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와 노인이 소외되는 문화 속에서, 그렇다면 개인은 ‘나이 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공을 떠나 본질적으로 냉혹한 노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도 치열한 성찰을 멈추지 않았던 보부아르와 마르쿠제, 니어링 부부 등을 통해, 자존을 지키며 의미 있는 여정을 이어가는 방법을 고민해볼 수 있다. 과격한 세대 단절을 극복하고 젊은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란 무엇인지, 살아온 세월만큼 풍요로운 상상력을 어떤 방식으로 남은 삶에 동원할 수 있을지,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길을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