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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1875~1961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융 1875~1961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 디어드리베어
  • |
  • 열린책들
  • |
  • 2008-07-20 출간
  • |
  • 1166페이지
  • |
  • 223 X 152 mm
  • |
  • ISBN 9788932908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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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카를 융의 삶을 놀랍도록 포괄적이면서도 생생하게 담아 낸 디어드리 베어의 『융: 분석심리학의 창시자』가 정영목의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디어드리 베어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지만,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한 사뮈엘 베케트의 전기를 비롯해 아니스 닌,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전기 작가로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연구자이다. 융의 생애와 작업이 매혹적이고, 압도적이고, 모순적이고, 흥미로우며, 무엇보다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느낀 그의 노력은 1995년 융의 문서 대부분이 보관되어 있는 취리히의 스위스 연방 과학기술 전문대학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조사를 시작한 이래 서문을 쓴 2003년 2월 17일까지 8년간 계속되었다. 디어드리 베어는 1년에 한 달에서 넉 달 동안은 취리히에 살았다. 최첨단 과학기술을 갖춘 도서관에서 컴퓨터 사용이 허락되지 않아 열람실에서 자료를 읽으며 힘겹게 연필로 기록하였다. 또 융의 상속인과 후손들, 퀴스나흐트의 융 연구소에서 훈련받은 사람들, 융 학파 공동체와 그 외부 사람들, 자신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융에 대해 한마디라도 언급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상적이고 되풀이되는 질문을 하고는 참을성 있게 대답을 들으며 이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완성해 갔다. 그가 읽고 베껴쓰고 만나고 통화했던 노력은 3000개가량의 각주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디어드리 베어가 이 책을 쓰기 30년 전, 융의 길고 다사다난했던 생애를 기록으로 남기자는 이야기는 전기 작가 위원회를 꾸려 전기를 쓴다는 구상으로 이어졌지만, 두 명의 전기 작가(베넷과 필프스)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융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직접 쓰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이것이 『기억, 꿈, 사유Memories, Dreams, Reflections』(융의 말을 빌리면 <이른바 자서전>)가 되었다. 이 자전적 회고록은 융의 일상생활이나 일에서 겪은 경험은 배제하고 개인적 신화, 내적인 경험, 채색된 주관적 자료에 충실하게 서술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서전을 둘러싼 30년간의 시행착오를 마친 뒤 완성된 『융: 분석심리학의 창시자』는 균형 잡힌 객관적인 시각으로 주의 깊게 관찰한 융의 일상과 삶을 집대성해 낸 최고의 전기이다.

융의 <이른바 자서전>에 관련되고, 기여한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
융 전기에 대한 이야기는 1930년대 중반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볼링겐 시리즈(가장 두드러진 작업은 융의 영어판 <전집> 출판) 출간 계획이 공식적으로 가동되면서 다시 거세게 쏟아져 나왔다. 융의 인생 이야기가 <전집>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논리적인 연관성을 지녀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논의는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전히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었다.
사실 1930년대 초에 융이 먼저 전기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캐리 베인스(이미 훌륭한 의사이자 융의 친구이며, 엄중한 비평가이기도 했다. 독일어와 영어를 구사하여 두 출판물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에게 전기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융의 표현에 따르면 그녀는 <야하고, 쾌활하고, 솔직하고, 매우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사생활 침해를 걱정하는 융의 가족부터 융 주변의 동료들에 이르기까지 융의 전기 작가가 마주칠 정치적 음모와 개인적 간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녀는 스스로 피했다.
1936년, 루시 하이어 그로테가 자청하고 나섰다. 융 협회 연설 차 베를린을 방문한 융에게 한 페이지짜리 <내용 요약서>를 제출해 융을 깜짝 놀라게 했다. 융은 그녀의 분석 능력을 존중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했지만(남편인 구스타프 리하르트 하이어와도 친분이 있었다), 글 쓰는 능력은 의심쩍어 했다. 전쟁 와중에 작업은 잠시 보류되었고, 1953년 그녀는 다시 융의 전기를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캐리 베인스는 루시가 융의 미묘한 면에 둔감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마찬가지로 융은 루시의 질문들을 듣고 그녀가 <지적인 전기를 쓸> 능력이 없다고 확신했다.
생물학자 아돌프 포르트만은 융의 전기를 한 권으로 만들 경우 도저히 그의 삶과 연구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캐리에게 말했다. 융을 이해하려면 <몇 가지 화산학(火山學)> 연구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융의 고집을 무시한 루시가 융의 <조상 연구>에 집중하자, 융은 화를 폭발시키는 대신 캐리에게 루시가 부담만 준다고 화풀이를 했다. 캐리는 라인 출판사의 다니엘 브로디 박사가 루시를 부추겼을 것이라며 비난했다.
이때 영국의 신학자 H. L. 필프스가 융에게 종교 전반, 특히 선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나섰는데, 융은 루시와 다른 그의 통찰에 감명받았으며, 지적이고 재치있는 그와의 즉답을 즐겼다. 필프스는 베넷에게 융의 원고를 보내 줬고 평소 <융의 졸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갖고 있던 베넷은 융이 원하는 대로 책이 진행되도록 융에게 원고를 보여 준 뒤 수정할 사항을 다시 필프스에게 전달했지만, 필프스는 그것이 융의 견해인지 몰랐다. 베넷은 어니스트 존스가 쓴 프로이트 전기가 나오자 융의 이름이 거론된 모든 구절을 찾아내 융에게 그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한 뒤 수정하고 정정해야 할 내용을 존스에게 보냈다.
융의 전집을 진행하던 쿠르트 볼프는 볼링겐 시리즈가 아니라 팬시언 북스 이름으로 전기든 자서전이든 융의 책을 출간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1955년 융의 건강 상태가 나빠지자 융은 자서전은 쓸 수 없다고 판단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때부터 온갖 부류의 낯선 사람들이 융의 전기를 쓰겠다고 했다. 1956년 쿠르트 볼프는 어떤 형태이든 전기가 필요하다고 융을 설득했다. 융이 건강이 좋지 않아서 최대한 편하게, 융이 마음에 드는 아무 이야기나 하고, 아닐라 야페에게 그의 말을 속기로 받아 적도록 했다. 비공식적인 면담은 9월에 시작되었다. 융은 신에 대한 개인적인 개념과 명상, 그리고 그것이 다른 문화, 사회, 종교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했고 야페는 종잡을 수 없고 긴 문단 하나를 기록했다. 기록은 11월 10일이 되어서야 다시 재개되었다.
중년의 자식들이 자서전을 쓰지 말라고 조르기 시작했을 때 융은 이미 여든셋이었다. 천천히 계속해서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1960년 발터와 마리안네(아들과 딸)에게 보낸 연하장에서, 융은 발터에게 〈나의 이른바 자서전〉을 도와준 데 감사한다고 말했다. 융이 이 책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발터가 그렇게 구술을 했는지 몰라도, 융은 이 책이 자신의 책이 아니라 〈명백히 야페 부인이 쓴 책〉이라고 강조하여 법적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융이 쓴 장들은 〈(그녀의) 책에 투고한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마지막 문장이 결정적이었다. 〈이 책은 야페 부인의 이름으로 나와야지 내 이름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이 책은 나 자신이 쓴 자서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모두가 그렇게 알게 되었으며, 이것이 그 이후 이 책의 저자 문제를 둘러싼 학자들의 모든 논쟁의 기초가 되었다.
융의 저술을 영역한 사람으로 유명한 리처드 프랜시스 캐링턴 헐은 융이 몹시 흥분해 있었다고 표현했다. 헐은 보고서에서 융이 자신의 〈진짜〉 텍스트가 많이 바뀐 데 몹시 괴로워했다고 묘사했다. 〈융은 나에게 자신은 자신의 방법으로, 《가끔은 약간 무뚝뚝하면서도 서툴게》 하고 싶은 말을 했으며, 자신의 글이 아줌마화되는 것tantifiziert을 원치 않는다고 매우 힘주어 강조했다.〉 융이 새로 만들어 낸 〈아줌마화〉라는 말은 곧 헐과 출판사들의 내부 암호가 되었다. 헐은 처음에는 융이 볼프 부부를 겨냥해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석 달 뒤 헐은 윈스턴의 영어 번역 원고 첫 세 장(章)을 읽고 난 뒤에야 〈아줌마화〉가 융이 다름 아닌 야페를 지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줌마화〉는 야페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곧 확대되어 마리안네와 발터 니후스도 포함되었다. 때로는 라셔와 밀턴 월드먼을 포함하기도 했다. 월드먼은 콜린스의 대표로, 자신이 제기한 모든 쟁점과 관련해 혼란을 일으키고 혼동을 가져오는 데 한몫했다.
오해도 많았다. 그러나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던 중에 1961년 1월 9일 융이 갑자기 헐에게 영어 번역판 감독을 맡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융은 헐의 정신분석 〈용어〉 번역 때문에 그를 〈높이 평가〉했지만, 이 원고는 〈전문 용어를 특별히 고려한〉 정밀 검토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의 경우 그런 용어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윈스턴 부부는 융 이론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매번 구체적인 사항을 설명할 때마다 다른 말을 사용해 혼란을 주거나 모순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융은 리처드와 클라라의 〈묘사 방식〉(야페는 이것을 〈축복받은 창의성〉이라고 불렀다)이 마음에 들었다. 〈전체적인 묘사의 생생함〉이 잘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융은 진짜 이유를 고백했다. 너무 늙고 너무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헐은 아마 다른 차이점도 많이 찾아낼 것이 틀림없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아진다.〉
융은 헐을 텍스트 감독 자리에서 밀어내겠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쿠르트는 이 소식을 헐에게 전했고, 상처 입고 분노한 헐은 팬시언이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선인세로 지급한 돈을 돌려주었다. 쿠르트는 〈의지와 변덕 사이의 이 전투에 이제 약간 지쳤다〉고 캐리에게 말했는데, 이것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상황을 축소해서 표현한 말이었다. 이윽고 융이 다시 마음을 바꾸어, 헐이 〈언어를 정정하는 일만 한다면〉 윈스턴의 번역을 감독하게 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쿠르트가 처음에 제안한 바였기 때문에, 결국 〈취리히 사람들〉 --- 쿠르트는 그들을 싸잡아 그렇게 불렀다 --- 을 이성적으로 상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쓸모가 없다는 증거가 된 셈이었다.
융이 마음을 바꾸었다는 소식은 1961년 1월 18일에 쿠르트의 귀에 들어갔다. 1월 26일,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약간 더 피곤했던〉 것인지, 쿠르트는 야페에게 자신은 〈이 책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부인과 아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상대할 수 없어. 답이 안 나와. 이건 이제 내용의 문제가 아니야. 모두 권력의 문제야.〉
야페가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쿠르트의 퇴진은 가장 참을성 있는 동맹자가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이제까지 쿠르트의 보호를 받다가, 처음으로 직접 출판계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뉴욕의 볼프강 자우어란더와 런던의 밀턴 월드먼은 엄격한 제작 일정을 그녀에게 들이밀었으며, 개인 면담 약속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야페와 니후스 부부는 둘 다 그들을 무시하거나 피할 방법을 찾아냈으며, 그렇게 해서 책의 출간은 더 미루어졌다. 쿠르트의 역할을 물려받은 게리 그로스는 야페와 두 번역자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노력했다. 자우어란더와 그로스는 원거리에서 책을 감독하여, 마침내 1962년 말 원고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바퀴의 비녀장 역할을 한 사람은 헐이었다. 자우어란더와 그로스 모두 그때까지의 상황을 헐의 관점을 통해 전해 들었다. 헐이 스위스를 떠나 말로르카에서 살게 된 뒤에도 융을 위해 훌륭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헐은 더 나은 기후를 찾아 팔마로 이사했다. 1961년 3월에는 취리히로 가서 융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육감〉 때문이었다. 그는 융이 〈늙고 비틀거리지만〉 여전히 〈자연의 힘〉 같은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다. 〈수호신이 그를 끝까지 힘차게 밀어붙였다.〉 헐은 스위스를 떠나는 것으로 번역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고가 최종적인 형태를 갖추려면 아직도 1년여를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기쁜 마음으로 융에게 원고를 한 부 주었다. 그 원고가 곧 인쇄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융은 그 보답으로 〈《유명한》 빨간 책〉을 읽으라고 권했다.
『기억, 꿈, 사유』는 잉태되고 나서 6년 뒤에 마침내 출간되었으며, 즉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은 지금도 판을 거듭하고 있으며, 많은 저명한 정신분석가들이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이야기해 왔다. 앤서니 스티븐스나 앤서니 스토가 그런 사람들이다. 프로이트의 〈우상 파괴적인〉 편집자인 애덤 필립스는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정신분석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평범한 시민을 포함한 다른 많은 사람들은 융 학파의 정신분석을 받은 적도 없고 융의 다른 글을 전혀 또는 거의 읽지 않았음에도, 이 책의 아름다움과 이 책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을 서정적이고 매우 감동적인 언어로 찬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자신의 〈이른바 자서전〉이라는 융의 말을 단지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표현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헐을 비롯해 이 책에 관여한 많은 사람이 지적했듯이, 융은 이 책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은 융이 이것을 쓸 때 제1인격이었는지 아니면 제2인격이었는지에 달려 있다. 안타깝게도 융이 이 책을 쓰는 것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으며, 이 때문에 융의 인격의 두 측면 사이의 경계도 많이 흐려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하자〉고 싸운 사람들도 있었다. 쿠르트 볼프부터 게리 그로스와 리처드 헐,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래, 아닐라 야페에 이르기까지 헐이 제안한 대로 자축하며 스스로 등을 두드려 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게르하르트 아들러는 『기억, 꿈, 사유』를 읽고 이렇게 썼다. 〈엄격하게 말해 이것은 자서전이 아니라 융이 심리의 내적 세계와 만난 보고서다.〉 아들러의 서평은 그 이후에 나온 서평과 논쟁의 기준이 되었다. 이후 논평자 가운데 대부분이 〈내적인〉 것 대 〈외적인〉 것의 대립에 초점을 맞추면서, 융의 글에서 각각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려 했기 때문이다.
원안, 손으로 쓴 원고, 타자 원고 등 결국 이 책의 바탕이 된 거의 모든 자료에서 융은 자신이 이 책에서 보여 주려는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표현은 최초의 원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본문 38장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감사할 줄 모르는 자서전 저자올시다!>,
39장 <죽음의 얼음 같은 고요>, 에필로그 <이른바 자서전>에서 요약

내 전기는, 또는 내가 전기라고 여기는 것은 많은 점에서 아쉽게도 다른 전기와 다르오. 나는 가치 판단을 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과 관련된 수도 없는 세세한 내용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도 못하며, 어떤 일이 벌어진 뒤에 그것을 대단하게 여겨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이야기하지도 못하오. 나는 그런 일을 도저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생전에 이미 자신의 전기 속에 살면서 이미 책의 한 부분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에게 인생이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것이었소. 더욱이 나의 관심은 늘 적지만 핵심적인 것들을 파악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어차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소. 한마디라도 해보려면 오랜 시간 곱씹으며 다녀야 했소. 나는 또 〈중요한 대화〉를 전혀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줄곧 받아 왔소.- 머리말, 23면

우리에게 아이들의 놀이부터 진지한 인성 검사까지 널리 사용되는 단어 연상 검사법을 전해 주었고,
우리에게 콤플렉스, 원형, 내향성과 외향성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가르쳤던 융.
융을 깔보지는 않더라도 대개 프로이트에 비해 부차적인 자리에 갖다 놓게 되는 까닭은?

근거가 있든 없든 융에 대한 비난은 융이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융은 왜 그것을 거부했을까? 그 뒤로 융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둘이 결별하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진실은 무엇일까? 융은 프로이트가 공격한 대로 반유대주의자였을까? 융의 이론은 자신을 신으로 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였을까?
어떤 비난은 융이 정부(情婦)를 둔 이후에 쏟아졌다. 그는 정부를 제2의 부인처럼 대했으며, 이들의 신중한 삼각관계는 평생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융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낙인을 찍은 대로 영락없는 바람둥이였을까?
나치 치하 독일에서 한 전문가 학회 회장직을 받아들이면서 융의 평판에 오점이 번졌다. 융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에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나치 부역자였을까? 그런데 미국 정보원들은 왜 그를 연합군을 위해 일하는 전략사무국`OSS 요원으로 징발한 것일까?
이런 모든 공격은 융이 자신의 심리학의 초석을 이루는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지도하던 의대생에게서 훔쳤다는 비난 때문에 더욱 힘을 얻었다.

융은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면서 프로이트와 이 꿈 이야기를 하려고 했고, 이 꿈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후 그들의 대화에서 몇 차례나 그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결국 융이 설명하려고 하던, 자신과 프로이트의 차이를 보여 주는 이정표가 되었다. 훗날 융은 호네거의 슈비처 병례 연구를 평가하다가, 그 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꿈 가운데 하나임을 깨달았다. 여기에 그가 훗날 〈집단무의식〉이라고 부른 것의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호네거는 융이 시키는 대로 1909년 12월 31일부터 1910년 2월 말까지 슈비처가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그는 슈비처가 망상에 젖어 중얼거리는 소리를 약 240페이지 정도 손으로 받아 적었고, 여백에 자신의 관찰과 해석을 붙여 놓았다. 그 뒤에 호네거의 학위 논문 초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따라붙었는데, 이 비판적 분석만도 1백 페이지가 넘었다. 융은 그 분석을 읽기도 전에 호네거의 총명함을 확신하여 프로이트에게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호네거가 슈비처 프로젝트에 〈뛰어난 이해력〉을 보여 주기 때문에 〈그에게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맡겨 좋은 결과를 얻어 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융은 호네거에게 〈과학적 관찰〉을 더 빨리 진행하여 1910년 3월 30일부터 31일에 걸쳐 뉘른베르크에서 열리는 제2차 국제 정신분석 대회에서 발표하라고 이야기했다.
호네거가 이 자료를 발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야 여러 정신분석자들이 갑자기 신화에 관심을 보이는 상황에서 융이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석자들은 모두 호네거가 융의 피후견인으로 발표한 것을 융이 자신의 견해를 직접적으로 표명한 것과 다름없이 받아들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융의 독창적 사고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여겼다. 융은 다른 사회나 문화의 신화와 특정 환자 사이의 직접적 관련을 처음 제시한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전히 어설프게 정리되어 있는 집단무의식을 처음으로 밝히고 규정하여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어 했다. 융은 호네거에게 더 열심히, 더 빨리 일하라고 엄청난 압력을 가하여, 1909년 10월부터 1910년 여름까지 그들의 생활은 직업적 스트레스와 개인적 긴장으로 숨이 가빴다.
본문 13장 <태양 음경 사나이>, 319~322면

호네거가 죽은 뒤 그의 문서들을 모아 정리하려고 했을 때, 융 역시 같은 결론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즉 호네거가 수집한 자료는 일관성 있는 실체를 이루지 못하며, 분석심리학의 대의를 높이는 데도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따라서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호네거 문서는 젊은 의사의 정신병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에, 또 이 연구가 사생활을 존중하는 데 강박을 가진 나라와 문화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융은 어쩌면 그의 가족을 호네거의 공개된 정신병과 그 이후의 자살이라는 오명에서 보호해 주려고 호네거의 연구 참여를 언급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호네거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슈비처의 망상을 모았지만 그것을 정리할 수는 없었으며, 환자의 망상을 자신의 망상으로 잘못 해석하여 정보를 잘못 처리한 예가 많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호네거는 환자의 병력과 자신의 슬픈 이력을 혼동해 판단한 듯하다. 이것은 융이 호네거의 주치의로 보호하려고 매우 노력했을 만한 부분이며, 그는 아마 그것을 공개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을 것이다.본문 13장 <태양 음경 사나이>, 336면

프로이트는 엠마 융을 〈수수께끼의 해결사〉라고 불렀다. 프로이트와 남편 사이의 이론적 차이를 둘러싸고 점점 팽팽해지는 긴장을 중재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엠마는 본능적으로 프로이트가 융과 같은 주제, 즉 종교의 기원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프로이트는 마지못해 융에게 〈혼란을 줄까〉 걱정이 되어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식으로 인정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연감』에 실린 융의 『리비도의 변용과 상징』의 1부를 읽은 뒤에 한 말이었다. 융의 이 글에는 원래 〈무의식의 심리학Psychology of the Unconscious〉이라는 영어 제목이 달려 있었으며, 나중에는 〈변용의 상징들Symbols of Transformation〉로 바뀌었다. 융의 책은 고전 신화와 보편적 전설들이 기본적인 심리학적 개념들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긴 글로 시작된다. 이 책의 2부가 될 글을 발표할 무렵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에 대한 원래의 정의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성적 에너지가 모든 정신적 기능 장애의 뿌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융은 그 나름으로 이 정의를 수정했다. 그는 성적 욕구가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일차적 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똑같이 복잡한 다른 영향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집단무의식에서 나오는 보편적 원형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역사적 자료(즉 신화, 전설이나 기타 상징적 정보의 표현들)를 이용한 1부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Totem and Taboo』보다 먼저 인쇄되었음에도, 프로이트는 융의 글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연구를 계속 비밀에 부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즉 프로이트는 누가 어떤 생각을 표현하든 그 창시자는 자신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정신분석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궁극적 권위를 내세우려 한 것이다. (……)
그러나 프로이트가 『변용』 1부에 대한 의견을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융이 2부를 계속 쓰지 못한다는 것은 엠마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오히려 융은 프로이트가 못마땅해할 가능성을 구실로 그 글이 요구하는 〈자기분석〉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마침내 『변용』 1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했다. 그는 수줍음을 타는 사람처럼 말했다. 이것은 〈잘 알려진 저자가 쓴, 내가 (다시) 읽은 가장 훌륭한 글 가운데 하나요〉. 그럼에도 그는 여기에 단서를 달았다. 융의 접근 방법이 〈기독교로 인해 지나치게 편협해졌으며〉, 또 〈자료 안에 들어가 있다기보다는 위에 있는〉 느낌을 주었다. 프로이트는 그것이 지금까지 나온 융의 저작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는 모호한 찬사를 보내면서도, 〈하지만 앞으로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은근히 악평을 했다. 프로이트는 이번에도 융이 〈(프로이트 자신이) 이미 한 말이나 하고 싶은 말〉에 동의한 것이 기쁘다고 함으로써 자신이 으뜸가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했다.
프로이트는 우회적인 태도를 버리고, 자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융이 제시한 구상을 전유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고 직접적으로 인정했다. 그의 탄식은 진짜였다. 그들의 연구가 발전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내 굴이 당신의 갱보다 훨씬 더 깊은 지하로 들어갈지도 모르겠소. 우리는 서로 엇갈릴 수도 있소.〉
취리히에서는 온갖 복잡한 일이 늘어만 갔다. 융은 얕게든 깊게든 추문에서 탈퇴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취리히 학회는 다루기가 힘들었으며, 융이 프로이트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을 놓고 질투심 때문에 쪼개져 있었다. 융과 프로이트 모두에게 가장 충실한 사람은 파러 오스카 피스터였다. 개신교 목사인 피스터는 목회 활동, 특히 아동 교육에 정신분석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엠마는 프로이트를 달래려 하면서도 여전히 재치 있게 자신이 이전에 했던 말을 정당화했으며, 프로이트는 그것을 〈상냥한 잔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그녀는 융이 자신의 글에 대한 프로이트의 의견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을 할 생각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권위를 인정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변용』 1부에 대한 의견을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융이 2부를 계속 쓰지 못한다는 것은 그녀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오히려 융은 프로이트가 못마땅해할 가능성을 구실로 그 글이 요구하는 〈자기분석〉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피스터 사건이 터지면서 그렇지 않아도 〈빈에서 오는 사악한 것〉에 대해 못마땅해하던 스위스 대중은 융도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 그전부터 몇 년 동안 신문에는 〈순수한 정신의 스위스인〉에게 프로이트의 성 이론에 오염되지 말라고 촉구하는 글이 넘쳐났으며, 그 때문에 스위스 분석가들은 〈매우 불행한 시기〉를 보냈다.(……)
돌이켜 보면 프로이트에게 가장 편파적인 전기 작가 어니스트 존스가 융과 프로이트의 점점 암울해진 관계를 가장 객관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은 얄궂은 일이다. 1911년이 저물면서 협력의 마지막 해가 시작되었다. 존스에 따르면 균열의 이유, 프로이트를 가장 화나게 한 점은 다른 많은 논평가가 이야기하는 것, 즉 두 학자의 리비도 개념 해석이 점점 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융이 자신의 연구에 집중하면서 (프로이트가) 맡겼던 회장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프로이트의 머릿속에서 융의 일차적 역할은 〈자신의 직접적인 계승자로 모든 정신분석 활동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리비도에 대한 융의 새로운 개념은 프로이트가 오래전에 생각했던 개념과 일치한다. 프로이트는 그 이후 리비도의 개념을 약간 수정했다. 내가 보기에 현재의 이 리비도 이론은 전체적으로 명료하지 못하다. 따라서 나는 아무런 판단도 내리고 싶지 않다. 한편 융의 글은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몇 년 만에 그렇게 많은 자료를 모았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다. 부차적인 문제에서도 기발한, 그리고 상당 부분 훌륭한 구상이 많이 엿보인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현재로서는 또 아마 앞으로 10년 동안은 그 글 전체에 대해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본문 15장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들]

디어드리 베어는 새로운 소재를 객관적이고도 자세한 묘사를 통해 잘 파헤치는 작가다. 이 책은 학자들의 찬사뿐 아니라 독자들로부터 열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융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논란거리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훌륭한 전기 문학이라면 꼭 갖춰야 할 것들이다. -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이 시대 몇 안 되는 중요한 전기이자 지금까지 접했던 융의 삶을 다룬 책들의 최고봉! - 보스턴 글로브

초지일관 인내심과 세심한 관찰력을 놓지 않은 채, 방대하면서도 세밀한, 그리고 자세하면서도 포괄적인 융의 일상생활을 그려 낸 역작! - 워싱턴 포스트 북 월드

현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칼 융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마치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중립적인 자세로 일관한 디어드리 베어의 책을 현대 정신분석학 역사상 최고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 휴스턴 크로니클

카를 융을 둘러싸고, 우리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수많은 논란거리와 추종자들의 신격화 사이에서,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논지로 적절한 균형점을 마침내 찾아냈다. 염세적 이기주의, 기회주의, 도덕적 해이, 역설적인 불안감, 그리고 수많은 신봉자들을 낳았던 카리스마까지, 그야말로 융의 모든 것을 이 책에 재현해 냈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위대하지만 수많은 논란으로 얼룩진 정신분석가의 삶을 디어드리 베어가 재조명했다. 이 전기는 지금까지 물음표로 가득했던 정신분석학의 한 선구자에 대한 세밀하고도 생생한 초상화이다. - 북 리스트

기록과 문헌을 철저히 고증한 정교한 작업이 완성되었다. 융 전기를 통해 베어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무한대로 자극하고 있다. 융의 모든 것, 심지어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단점까지 찾아내어 복원한 그녀의 시도는 정말 높이 살 만하다. 공감하며 동정심을 느끼게 하면서도 냉철하고 분석적인 날카로운 시각으로 인상적이고 세련된 최고의 전기를 창조했다.- 옵저버

이 책은 융에 관한 중립적이며, 방대하고, 면밀한 분석서이다. - 더 뉴요커

디어드리 베어는 얕잡아볼 수 없는 작가이다. - 시카고 리더


목차


저자의 말
일러두기
머리말 희미한 실마리와 에움길

1 융 집안이 스위스인이 된 사연
2 목사 아들 카를
3 비관습적인 가능성들
4 받아들여지지 않는 의심, 받아들여지지 않는 걱정
5 여자들에게 소심하게 예의를 지켜
6 뭔가 무의식적으로 운명적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7 누가 이 병원 운영자인가?
8 이혼/힘, 선택/고통
9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늘 이곳에 있다
10 나의 쌍둥이 형제처럼
11 시
12 미국
13 태양 음경 사나이
14 가족의 철학자
15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16 크로이츨링겐 시위
17 나의 <자기>/<나 자신>
18 <심리학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
19 속물이자 신비주의자의 작품
20 서문과 출발점들
21 인생의 후반부
22 볼링겐
23 이 분석의 화약고
24 부기슈 심리학 원정대
25 융 <교수>
26 비관습적인 분석 시간
27 위험한 유명세
28 매우 힘든 시간
29 역사와 충돌하다
30 우리 땅에 뿌리를 내리다
31 요원 488호
32 1944년의 환상
33 카를 융, 전복 활동 관련
34 융 학파 대학
35 남자들이 싸우고 떠나는 이유
36 사라져 가는 세계의 추억
37 미래를 위해 융을 모은다
38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감사할 줄 모르는 자서전 저자올시다!
39 죽음의 얼...음 같은 고요

에필로그 이른바 자서전
부록 호네거 문서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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