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까지 주한미군에 배치된 미국의 단거리 핵무기는 총 611개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배치한 핵무기의 30퍼센트가 넘는 규모였다. 1967년에는 총 949개의 미군 단거리 핵무기가 배치되어 사상 최대 수량을 기록했다.6 이후 미국은 1970년대 중・후반에 일본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대부분에서 핵무기를 철수했지만 한국에서는 600개가량의 단거리 핵무기 배치를 지속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과 중국의 침략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발발할 경우, 이들 단거리 핵무기를 전쟁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다시 말해 공산군이 서울 등 한국의 수도권 지역을 단기간 내에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비무장지대(DMZ)를 비롯한 휴전선 전방 지역에서부터 주한미군의 핵무기를 사용하여 공산군의 진격을 저지한다는 것이었다.7 이를 위해 주한미군은 자신들의 단거리 핵무기를 전방 지역에 배치시켜 유사시 신속한 동원 태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는 핵무기를 전방 지역에서 사용함으로써 자칫 수도권까지 방사능 피해에 노출시키는 매우 위험천만한 전략이었다. 11~12쪽
197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이미 핵무기의 설계・제조에 필요한 주요 기술과 장비, 물질 대부분을 입수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뿐만 아니라 1974년에는 프랑스의 기술 지원을 통해 매년 20킬로그램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시설 설계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이는 매년 2개의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해당 설계도는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기술 실무진으로 참여했던 김철 아주대학교 명예교수가 2004년 언론에 공개했다.17 그리고 1975년에는 핵탄두의 설계까지 마무리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은 끝내 미국에 노출되고 말았다. 미국은 1974년 5월 인도가 세계 6번째로 핵실험을 실시한 것에 경악했으며, 국무성과 중앙정보국(CIA)을 중심으로 핵무기 개발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의 능력과 의도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얼마 후 미국은 한국이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장비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깨달았다. 19~20쪽
이듬해인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소련의 해체, 더 나아가 냉전의 완전한 종식이 현실화되었다. 이에 조지 허버트 부시 미국 대통령은 1개월 만인 9월 27일 해외 기지에 배치된 모든 지상 및 해상 배치형 단거리 핵무기를 자발적으로 철수・해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같은 해 11월 8일에는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구축에 관한 선언」(이하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발표했다. 여기서 노태우 대통령은 “핵에너지를 평화적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핵무기를 제조, 보유, 저장, 배치,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천명했다. 2개월 전 미국이 선언한 ‘전 세계적인 단거리 핵무기의 철수・해체’에 따른 주한미군 핵무기의 철수 현실화를 반영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의 핵사찰 요구를 거부하려는 더 이상의 명분을 없애기 위한 결단이었다. 그리고 다시 1개월 후인 12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내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이 시각, 우리나라의 어디에도, 단 하나의 핵무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밝히는 「핵무기 부재(不在) 선언」을 발표하여 주한미군의 핵무기 철수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했다.27 이로써 한국은 33년 동안 계속되었던 미군 핵무기의 배치를 마감하고, 공식적으로 비핵화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30~32쪽
그뿐만 아니라 북한은 6차 핵실험으로부터 12일 후인 9월 15일,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 Intermediate Range Ballistic Missile) ‘화성-12형’을 일본 상공 너머 북태평양으로 시험 발사했는데, 비행거리가 3,700킬로미터에 달했다. 이는 북한이 발사한 탄도미사일 가운데 가장 먼 비행거리로, 한반도 유사시 핵우산 제공을 담당할 무기들(장거리 폭격기 등)이 다수 배치된 서태평양의 괌에 위치한 미군 기지까지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다시 말해 미국의 핵우산 제공 능력이 북한의 직접적인 공격 위협에 노출된 것이다. 그 결과 한국 내부에서는 만약 북한이 ICBM 등으로 미국에 직접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게 된다면, 미국은 ‘서울을 지키기 위해 뉴욕을 희생시켜야 하는가?’라는 고민에 직면할 것이며 결국 한국에 대한 핵우산 공약 실행을 포기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43쪽
2017년 5월의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주요 후보들 가운데서 핵무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총 득표 2위를 차지한 홍준표(자유한국당) 후보는 ‘미군 핵무기의 재배치’를 주요 정책 공약에 포함시켰고, 4위인 유승민(바른정당) 후보도 선거 기간 동안 TV 토론 등을 통해 미군 핵무기의 재배치를 거듭 주장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로부터 3개월이 지난 8월 16일, 제1야당이자 국회 내 의석수 2위를 차지하는 보수 성향의 자유한국당이 미군 핵무기를 재배치하는 방안을 공식 당론으로 채택・선언했다. 자유한국당은 2017년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을 계기로 미군 핵무기의 재배치를 촉구하는 1,000만 명 서명 운동에 나서는 등 미군 핵무기 재배치 주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전례 없이 높아진 국내의 핵무장 요구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1990년대부터 유지되어온 비핵화 정책 노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특히 2017년 5월의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지지 및 계승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고수할 것임을 강조하는 정치 세력이 다시 집권했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한국 정부가 핵무장을 추구할 가능성이 낮을 것임을 암시한다. 아직 한국에서 핵무장에 관한 요구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주류라거나 대세라고 불릴 정도 수준이 못 되는 것이다. 47쪽
2016년 11월 미국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한국 내부에서는 트럼프의 취임 이후 미국이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할 가능성에 기대감을 나타내는 이들도 있었다. 이는 트럼프가 선거 당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표어 아래 우방국・동맹국들에 대한 방위 공약 축소를 비롯한 대외 외교・군사 개입의 재조정을 주장했던 것에 근거한 것이었다. 심지어 트럼프는 “일본, 한국 등이 미군 주둔에 관한 기여를 확대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미국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핵무기의 개발을 허용할 가능성까지 암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트럼프가 소속한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비판받아 결국 트럼프는 이를 철회해야만 했다. 만약 한국이 핵무장을 결심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추진한다면 미국은 한국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여러 정치적・외교적・경제적 조치들을 차례로 실천에 옮길 것이다. 여기에는 국제적인 제재에 동참하여 한국의 경제와 원자력발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맹국으로서 한국에 제공해왔던 안보 공약을 약화 또는 포기할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즉 주한미군의 감축 및 완전 철수, 핵우산의 철회 등이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 93쪽
핵무장=영구 분단
설령 한국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핵무기의 독자 개발・확보에 성공하거나 미군의 핵무기를 재배치한다고 해도 한국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한국의 핵무장은 북한에 더 이상 비핵화를 요구할 근거를 없앨 것이며 지난 1990년대부터 한국과 국제사회가 추구해왔던 한반도 비핵화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귀결될 것임에 분명하다. 동시에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한반도 통일’이라는 7,000만 한민족의 염원도 불가능해지고 남북한은 영원히 분단 상태에 놓일 것이다. 그것도 미국-캐나다, 독일-오스트리아, 호주-뉴질랜드와 같은 우호적인 공존이 아니라 역시 핵무장국인 인도-파키스탄처럼 정치적・군사적 분쟁과 전쟁의 공포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적대적인 병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결과 한반도는 두고두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근심거리로 남을 위험성이 크다. 95쪽
따라서 한국과 미국, 국제사회는 북한이 아무리 핵무장 능력을 강화하더라도 감히 한반도의 평화, 안전을 일방적으로 위협하지 못하도록 전쟁 억지력을 굳건히 보장할 수 있도록 군사적 능력을 유지·확보해야 한다. 또한, 핵무장을 통해 기대하는 이익과 효과를 훨씬 압도하는 정치·외교·경제적인 불이익으로 북한을 압박해야 한다. 특히 필요할 경우 북한을 상대로 역벼랑 끝 전술을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 발전시켜 대비해야 한다. 이는 북한 정권에게 핵무장의 무익(無益)함을 일깨우고 다시 대화의 길로 복귀하도록 유도하여 평화적인 비핵화가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북한의 비핵화는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그것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비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한국은 스스로의 능력, 그리고 동맹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공조를 통해 이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 비핵화의 성공 여부에 따라 한민족의 장래, 그리고 아시아・태평양과 세계의 평화가 결정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