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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

사필

  •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엮음)
  • |
  • 한국고전번역원
  • |
  • 2016-05-25 출간
  • |
  • 396페이지
  • |
  • 160 X 220 X 25 mm /728g
  • |
  • ISBN 9788928403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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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조선왕조실록을 남긴 붓, 사필(史筆).
오늘을 보는 눈이 되다

역사를 남기다 - 실록(實錄)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으로 1,893권 888책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그 안에는 위로 왕실의 동정과 임금의 언행, 조정에서 국사(國事)를 논의하여 처리하는 과정에서부터 아래로 백성들의 풍속과 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실록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귀중한 유산으로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한문으로 된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번역된 것은 1993년이다. 이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되어 일반 국민들도 손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실록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역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었고 한편으로는 소설, 영화, 드라마, 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흥미로운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했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의 역사를 이렇게 상세하게 알고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치열한 노력 덕분이다. 그리고 그 기록의 중심에는 사관(史官)이 있었다.

실록을 쓰다 - 사관(史官)의 붓, 사필(史筆)

사관은 7품 이하의 관원이었다. 이들은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겸직했던 예문관(藝文館)의 한림(翰林)들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지 얼마 안 된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임금과 가까운 자리에서 임금과 신하의 대화와 행동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승정원(承政院)을 거쳐 가는 국정의 주요 문건을 발췌한 뒤 공식 사초(史草)인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였다. 기록을 남기면서 사관들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꾸밈없이 적어 나가는 직필(直筆)을 견지하고 왜곡된 시각의 곡필(曲筆)을 경계하였다. 그러다 보니 지존인 임금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사관의 기록은 두려워하였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사필이 지닌 힘이 강해질 수 있었다. 사관이 직필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실록은 물론이고 사초까지도 당대 임금이나 신하 그 누구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한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사관들은 주위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관의 기록정신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론(史論)이다.

사필(史筆)로 말하다 - 사론(史論)

실록에는 사건의 시말(始末)이나 시비(是非)는 물론이고 관직 임명에 대한 의견, 생전 또는 사후의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주관적인 의견도 실려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사신왈(史臣曰)’, ‘사신논왈(史臣論曰)’ 등으로 시작하는 사론(史論)이다. 사론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은 조선왕조실록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서, 실록의 본질적 가치를 논할 때, 사론을 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론은 조선 전기의 실록에만도 3400여 건이 실려 있는데, 이 시기 사론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그 가운데 약 57%가 인물에 대한 논평이라고 한다. 그밖에 임금과 신료의 잘잘못, 사건, 제도, 재이(災異)를 비롯하여 당시 사회 모습에 대한 논평도 많다. 사관이 실록에 남긴 사론은 당대에 대한 논평이라는 점에서 다른 역사서의 사론과 다르다. 당대에 대한 논평이기 때문에 그만큼 사회에 대한 사관의 비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우리가 500년 조선 역사 기록의 중심에 있던 사관과 그들의 사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현안을 바라보던 사관의 시선이 담긴 사론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진단해 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찾아가는 ‘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권세가의 횡포를 꾸짖는 단호함과 시비를 가리는 엄격함은 물론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까지도 배울 수 있어서이다.

≪사필(史筆), 사론(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사관이 당대의 인물, 사건, 이슈 등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실록에 담고자 했던 본질적인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정종 1년(1399) 1월 7일, 지경연사(知經筵事) 조박(趙璞)이 아뢴 내용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한다.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이요, 사필입니다. 이 하늘은 푸르고 높은 저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관은 임금의 선악을 기록하여 영원히 남기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은 사론을 통해 실록의 본질적인 가치를 짚어 보고자 기획되었다.
전체를 2부로 구성하여 1부에는 실록 속 다양한 사안을 논평한 사론들을, 2부에는 사관과 실록의 발자취를 실었다.
1부 ‘사론(史論), 역사를 논하다’에는 ‘왕실을 논하다’, ‘신하를 논하다’, ‘사건을 논하다’, ‘제도를 논하다’로 주제를 나누어 대표적인 38건의 사론을 실었다. 각 편마다 관련 배경이나 사건을 이야기하고 해당 사론을 직접 소개하면서 집필자의 견해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구성하였다.
2부 ‘사필(史筆), 역사를 남기다’는 ‘사관을 말하다’와 ‘실록을 말하다’로 주제를 나누어 구성하였다. ‘사관을 말하다’에서는 역사 기록의 주역인 사관의 주요 업무, 선발 방식, 한림의 고풍(古風) 등을 다루었고, ‘실록을 말하다’에서는 실록의 편찬 과정, 사고(史庫)의 위치와 노정(路程), 실록의 활용 등을 다루었다.
맺음말에는 집필에 참여한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들이 이 책의 집필 의의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번역 현대화 사업의 의의 등에 대해 대담한 내용을 실었다.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을 포함한 실록 관련 도판이 내용 이해에 도움을 주며, 각 편마다 핵심 내용을 이미지로 표현한 삽화가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 책속으로 추가

국가가 오래도록 태평하자 임시방편으로 하는 정사가 많았고, 기강이 문란해져 공공의 도리가 없어졌다. 조정의 각 관사와 지방의 관원들은 쓸데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서, 오직 권세가에게 들러붙어 좋은 벼슬에 오르고, 뇌물을 바쳐 좋은 명성을 얻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사업으로 여길 뿐, 국가의 일에 대해서는 남의 나라의 일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장수나 재상들은 편안히 놀고 즐기며 항상 은혜와 원한을 갚는 데만 신경 쓰다가, 변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조정은 방비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변방은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왜적의 칼끝이 향하는 곳마다 패배하였다. 왜적이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오듯 쳐들어왔으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있겠는가?
≪명종실록 10년 5월 16일≫
-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 : 을묘왜변과 조정의 대응’

국가가 선정을 베풀지 못하고 교화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탐욕스러운 재상과 포악한 수령들이 백성의 뼈와 살을 깎고 고혈을 짜내고 있으니, 백성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디에 대고 호소할 길도 없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하루도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워 조금이라도 더 살고자 도적이 되었다면 그것은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극심한 흉년과 무거운 조세로 백성이 피폐해져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무너질 상황이다. 그런데 또 군대를 일으켜서 변방에 계속 머무르게 한다면 물자를 다 써 버려 곤경에 처하고 나라와 민간의 재물이 모두 고갈될 것이다. 거기다가 장수의 횡포와 군졸들의 약탈이 더해지니 백성이 누구를 믿고 살아가겠는가? 이는 네 개 도의 백성을 몰아붙여 모두 도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짓이다. ≪명종실록 16년 10월 6일≫
- ‘모이면 도적이요 흩어지면 백성이다 : 의적 임꺽정과 토벌군의 횡포’ 중에서

4장 제도를 논하다
경상도는 왜적이 처음으로 쳐들어온 곳이었기 때문에 다른 도보다도 더 심하게 인가가 텅 비고 백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게다가 또다시 큰 전쟁이 일어나 장정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노약자들은 군량을 운반하느라 고초를 겪었다. 아내가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자식이 아비를 잃고 통곡하니 애통한 소리가 처참하게 들려왔다. 그런데도 공물(貢物)로 올리는 청어 하나를 없애지 않고 원래대로 바치게 했으니, 이를 통해 나랏일이 하나같이 어처구니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선조실록 31년 1월 16일≫
- ‘공물은 때를 보아 거두어야 한다 : 정유재란 중의 공물 요구’ 중에서

이렇게 심한 흉년이 들자 주상께서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하여, 백성들이 바쳐야 하는 무명, 약재, 공물 등을 감해 주셨다. 날마다 백성의 고난을 안타까워하는 하교를 내리셨고 팔도에 자문을 구하는 것이 모두 백성을 진휼하는 문제였다. 굶주린 백성이 있다면 내가 배고프게 한 것이고, 추위에 떠는 백성이 있다면 내가 춥게 만든 것이라고 여기셨으니, 이 마음은 바로 요순 같은 성군의 마음이다. 그런데 요순 같은 성군의 정치를 이루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왕실과 왕족이 가진 토지와 재물이 백성들을 먹이고 입힐 만큼 충분히 많았는데도 끝내 회수하라는 청을 따르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인조실록 6년 9월 6일≫
-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 인조의 진휼 대책’ 중에서

정전법(井田法)이 폐지된 이후로 부유한 백성이 전지를 겸병(兼幷)하는 폐단이 생긴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삼남 지방을 다시 양전하여 세금을 정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균전(均田)의 명분만 흉내 내고 균전의 실효는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관찰사, 군수, 현령에 적임자를 임명하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간사하고 교활한 지방의 아전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게 되었다. 세도 있는 집안의 전답은 하등으로 분류하고 곤궁한 백성의 전답은 상등으로 분류하여 속임수를 부리고 온갖 간교한 폐단을 만들어 냈다. 전답의 면적은 전에 비해 약간 늘었지만 백성들의 원망은 도리어 심해졌다. 사람들이 “삼남에서 인심을 잃은 것은 양전을 다시 했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경종수정실록 즉위년 10월 6일≫
- ‘공평하지 않으면 인심을 잃는다 : 양전(量田)의 폐단’ 중에서

2부 사필(史筆), 역사를 남기다

1장 사관을 말하다
사관의 직무는 재상의 권한과 견줄 정도로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이수광(李?光)이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재상은 수십 년 동안 어떤 사람을 성공하게 할 수도 있고 몰락하게 할 수도 있지만, 사관은 어떤 사람의 이름이 천백 년 뒤까지 남게 할 수도 있고 없어지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관과 재상이 생전(生前)과 사후(死後)의 권한을 나누어 가진 것이다.”라고 한 것도 사관의 직무가 그만큼 막중함을 강조한 말이다.
- ‘사필을 공정히 하라 : 역사 기록의 주역, 사관’ 중에서

인조 16년 5월 2일, 인조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들을 불러 만난 자리에서, 좌의정 최명길이 국가 기밀에 관계된 일이 누설될까 우려해 사관을 참여시키지 말 것을 건의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정태제가 자신의 사초에 남긴 말이 있다.
사관은 역사를 기록하는 붓을 잡은 신하로 나랏일의 시비를 논하는 칼자루가 그에게 달려 있다. 나라는 멸망시킬 수 있어도 역사는 없앨 수 없거늘, 사관에게 숨기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 ‘무덤 속까지 가져간 역사, 정태제 사초’ 중에서

시정기는 일반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책으로 묶었고, 연말에 책 수를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시정기에는 연월일, 날씨, 재변, 왕의 동정, 상참과 경연의 시행 여부, 대간의 계사, 중요한 상소, 과거 급제자 현황, 주요 인사 행정, 근무 고과인 포폄, 각 관사와 관련한 중요 사안 등을 기록했다. 시정기는 정본 이외에 부본을 만들어 두었는데, 이를 ‘비초(飛草)’라고 하였다. 춘추관의 포폄 때에 당상관은 이를 근거로 사관의 근무 태도를 평가하였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사관이 기한 내에 시정기를 정리하지 못해 다른 관직으로 승진할 때에 지장을 받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 ‘시정을 기록하고 평가하다 : 사관의 주요 업무’ 중에서

신들은 일을 기록하는 직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관이 바닥에 엎드린 채 머리를 들지 못하다 보니 신료들이 공무를 아뢸 때에 그 목소리만 듣고 용모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기록한 내용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생깁니다. 사관은 직필해야 하는데,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것을 감히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옛 기록을 상고해 보더라도 ‘돌연히 안색을 바꾸었다.’, ‘용모가 태연자약하다.’, ‘목소리와 안색이 모두 노기(怒氣)를 띠었다.’, ‘부끄러운 안색을 띠었다.’,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옛날의 사관은 용모와 안색, 말씨를 모두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바닥에 엎드려 일을 기록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 ‘사관은 앉아서 기록하라’ 중에서

한림의 선발은 한림 자체 내에서 신임 한림의 후보를 추천하는 자천이라는 독특한 제도로 운영되었다. 이를 통해 뽑는 한림은 검열이었는데 이들은 대교를 거쳐 봉교로 승진하였다.
숙종 때 편찬된 ≪한원고사≫에 적힌 선발 과정을 살펴보면 하번 한림이 상번 한림에게 새로 문과에 급제한 인원을 포함한 7품 이하의 문관 중에 우수한 자를 천거하였다. 상번 한림과 의견이 일치되면 예비 한림에게 알리고 동료 한림이 모여 비밀리에 천거할 인원을 뽑았다. 그 명단을 전임 한림들에게 돌려서 의견을 묻고 춘추관과 예문관 당상들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이의 제기가 없으면 후보를 확정했다.
- ‘자천(自薦)에서 권점(圈點)으로 : 사관 선발 방식의 변화’ 중에서

처음 해당 관사에 임명된 관원은 선배 관원들에게 인정받는 절차인 면신례(免新禮)를 행했다. 예문관의 면신례는 다른 관사보다 훨씬 어려웠다고 한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齋叢話)≫에서 ‘새로 한림에 임명되어 나온 뒤 연회 베푸는 것을 허참례라고 하고, 50일이 지나서 또 연회 베푸는 것을 면신례라고 했으며, 그 중간에 연회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고 하였다. 연회 때마다 신입 한림에게 집이나 다른 곳에 푸짐한 잔칫상을 차리도록 하였는데, 잔치는 언제나 어두워져서야 끝났다.’라고 한 것을 보면 신입 한림을 맞이하는 예문관의 전통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풍습을 ‘고풍’이라 불렀다.
- ‘삼가 고풍(古風)을 지키라 : 한림의 위상과 고풍’ 중에서

2장 실록을 말하다

조선 500년의 역사를 담은 각 왕대의 실록은 긴 세월 속에서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꾸준히 편찬되고 보존되어 왔다. 임금이 승하하여 국상을 치르는 절차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절차도 시작되었다. 실록 편찬은 선왕의 재위 기간 동안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선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임금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 ‘실록은 어떻게 편찬되었을까 : ≪현종실록≫의 편찬 과정’ 중에서

실록은 만드는 과정 못지않게 보관하는 체계를 갖추는 일도 중요했다. 수차례에 걸친 병란(兵亂)과 화마(火魔)는 실록의 ‘생명’을 늘 위협했다. 이런 경험은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하여 후대에 전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실록을 깊은 산속에 분산하여 보관하고서 주기적으로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관리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조선 전기에는 네 곳의 사고에 각각 실록을 나누어 보관하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서울의 춘추관과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 강화(江華) 정족산(鼎足山), 봉화(奉化) 태백산(太白山), 평창(平昌) 오대산(五臺山)의 다섯 곳에 사고를 두고 실록을 각각 나누어 보관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사각(史閣)을 열고 실록을 열람할 수 있었던 사관을 시켜 춘추관은 3년에 한 번, 지방에 둔 외사고는 효종 1년1650 이후 2년에 한 번 실록의 보관 상태를 점검하고 통풍시키는 포쇄를 행하였다.
- ‘실록을 만나러 가는 길 : 사고의 위치와 노정’ 중에서

실록 편찬 목적이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실록에서 사실대로 기록한 당대의 중요한 일들은 그 자체로 국정 보고서, 행정 지침서, 행사 보고서의 역할도 하였다. 따라서 임금이 마음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실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외교, 국방과 같은 중대한 나랏일을 비롯하여 관직 제도의 조정이나 지방 행정 구역의 설치나 혁파, 형정(刑政), 도량형의 통일 등 국내의 정사 전반에 관한 선례(先例)가 필요할 때면 실록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보았다. 이를 고출(考出)이라 한다.
- ‘실록을 고출하라 : 실록의 활용’ 중에서

맺음말

조선은 왜 사관을 두어 역사를 기록했으며, 선조들은 왜 우리에게 실록을 전해 주었을까요? 우리는 다음 세대에 어떠한 실록을 전해 주어야 할까요? 이 점이 우리가 지금 500년 조선 역사 기록의 중심에 섰던 사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조선의 사관이 남긴 사필이 시대의 과제를 통찰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사관(史官)을 일깨우는 중요한 매개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 ‘맺음말’ 중에서

목차

머리말 조선왕조실록을 남긴 붓, 사필(史筆). 오늘을 보는 눈이 되다

제1부 사론(史論), 역사를 논하다

제1장 | 왕실을 논하다
어느 때고 반성하라_단종의 모친 현덕왕후 복위 논란 * 16
왕실을 다스려야 나라가 다스려진다_중종 대 종친들의 사치 풍조 * 25
외척이 나라를 망친다_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외척 문제 * 31
하늘은 탐욕에 복을 내리지 않는다_중종의 능묘 이전 * 39
비극으로 끝난 광해군 부자(父子)의 운명_폐세자 이지의 유배지 탈출 * 46
판단은 후대의 몫이다_봉림대군 세자 책봉 과정 * 53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_연잉군 왕세제 책봉 과정 * 61
왕의 친척이라도 법 앞에선 동일하다_영조 대 종친과 대신의 갈등 * 69
정절은 있으나 효는 없다_영조의 화순옹주 정려 거부 * 77

제2장 | 신하를 논하다
깨끗한 거울에 진짜 얼굴을 비출 수 있다_평안 감사 현석규의 두 얼굴 * 86
권세는 탐욕에 무너진다_권력자 한명회와 압구정 * 93
밭갈이는 종에게 길쌈은 여종에게 묻는다_무신 김세적의 승지 임명 * 100
대간은 나의 눈과 귀이다_대간 손순효의 간언 * 110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_홍귀달에게 앙심을 품은 연산군 * 116
측근의 말을 가려들어야 한다_오만방자한 내시 최한형 * 123
사관은 곧은 붓을 들어야 한다_반정 공신 이귀와 김류의 주도권 다툼 * 131
권세에 예술혼을 팔 수 없다_권력자에 맞선 예술가 진재해와 김성기 * 137
역사는 과연 승자의 기록인가?_노론의 영수 민진원의 졸기 * 145

제3장 | 사건을 논하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_정학비 간통 사건 * 154
원칙 없는 용서는 처벌보다 못하다_잦은 사면의 폐단 * 162
자리나 채우는 신하는 필요 없다_정사룡의 과거 시험 부정 행위 * 170
말로는 재앙을 막지 못한다_조선의 씽크홀, 지함(地陷) * 177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_을묘왜변과 조정의 대응 * 184
모이면 도적이요 흩어지면 백성이다_의적 임꺽정과 토벌군의 횡포 * 191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_도성을 버린 선조 * 199
백성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다_전쟁 중에 잡혀간 여성 포로들 * 206
법은 멀고 정치는 가깝다?_당쟁이 만든 기구한 운명, 도망자 이봉상 * 213
나라가 약하면 굴욕을 당한다_칙서 실종 사건 * 220

제4장 | 제도를 논하다
오래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다_성종과 이심원의 축수재 논쟁 * 230
맡긴 후에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_암행어사를 보는 두 가지 시각 * 238
공물은 때를 보아 거두어야 한다_정유재란 중의 공물 요구 * 246
관리는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해야 한다_선조의 청백리 선발 * 253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_인조의 진휼 대책 * 260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_현종 대 대흉년과 세금 감면 * 268
신뢰는 임금의 보물이다_현종 대 대흉년과 병역 대책 * 276
국가는 백성의 억울함을 위로해야 한다_전염병과 여제(?祭) * 284
공평하지 않으면 인심을 잃는다_양전(量田)의 폐단 * 291
해와 달은 사람을 가려 비추지 않는다_서얼 정진교의 상소 * 297

제2부 사필史筆, 역사를 남기다

제1장 | 사관을 말하다
사필을 공정히 하라_역사 기록의 주역, 사관 * 308
* 무덤 속까지 가져간 역사, 정태제 사초 * 315
시정을 기록하고 평가하다_사관의 주요 업무 * 319
* 사관은 앉아서 기록하라 * 326
자천(自薦)에서 권점(圈點)으로_사관 선발 방식의 변화 * 330
삼가 고풍(古風)을 지키라_한림의 위상과 고풍 * 338
* 사관의 하루 * 344

제2장 | 실록을 말하다
실록은 어떻게 편찬되었을까_≪현종실록≫의 편찬 과정 * 352
실록을 만나러 가는 길_사고의 위치와 노정 * 360
실록을 고출하라_실록의 활용 * 368

맺음말 조선의 사필(史筆), 우리 시대의 사관(史官)을 깨우다 * 378

참고 문헌 * 391
글쓴이 소개 * 394
감수·자문·그림 *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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