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라는 보편을 의심하고, (근대)문학의 ‘젠더’를 묻다
기억이 망각의 알리바이가 되는 적나라한 현장이 문학사가 아닐까. 문학인 것을 승인하기 위해 문학 아닌 것을 축출하고, 문학다운 것을 등재하기 위해 문학답지 않은 것을 식별해온 문학사는 줄곧 망각을 강제해온 편파적인 기억의 장이었다. 이 편협한 문학사의 기억/망각의 행위가 문학을 날인하기 위해 비문학으로 낙인찍거나 주변부 문학으로 폄하한 글쓰기들에 대한 오랜 관심으로부터 이 책은 출발한다. 기념비적 기억의 보존을 위해 문학사가 폐제한 기억의 상당 부분은 여성들의 문학행위와 관련된 것이며, 그러니 문학으로 등록되지 못하고 문학 아닌 것으로 부인된 망각의 더미들을 탐사하면서 근대문학의 젠더를 묻고 ‘문학’이라는 보편을 의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한국의 근대문학사에서 1920~30년대는 문학이 초월적인 지위를 획득하고, 전문적인 작가와 비평가 시스템을 갖춘 문단이 형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제도화가 추진된 시기이다. 신문 · 잡지 등 신종 미디어는 이와 같은 문학 근대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문학 제도화를 수행한 핵심적인 기관으로 역할한다. 근대 여성들의 문학행위 및 여성문학의 형성과정을 탐사하기 위해 1920~30년대 여성 매체를 통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여자계』, 『신여자』, 『신여성』, 『신가정』 등 1920~30년대 여성매체들과 교통하면서 여성문학이 형성되는 역동적인 과정을 추적하며, 이를 통해 근대문학 제도에 기입된 젠더를 가시화하고, 아울러 작가 · 작품 중심의 여성문학 연구가 누락한 지점들을 조명함으로써 보다 온전한 근대 여성문학사의 복원을 시도한다.
근대 여성문학의 형성과 여성매체의 교통(交通)
1920~30년대 여성잡지는 전대 문(文)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되었던 여성들에게 적극적으로 독서와 글쓰기를 독려했다. 문예물을 포함한 근대적인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독자투고나 현상모집 등을 마련, 여성의 자기표현을 유도한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매체는 ‘차이화와 배제를 추진하는 장치’로 기능하기도 했다. 이는 담론의 차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성용’ 읽을거리를 발명하고 여성들의 역할과 의무에 부합하는 문학 작품을 선별 · 배치하는가 하면, 여성들이 쓰는 글의 ‘양식’과 ‘장르’를 지정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근대 여성매체는 여성의 읽고 쓰기를 확대하는 동시에 성차의 질서를 준수하도록 훈육하는 젠더정치가 부단히 발동한 장인 것이다.
따라서 『근대 여성문학의 탄생과 미디어의 교통』, 이 책은 여성매체가 여성 독자를 형성하고 취향을 주조하는 방식, 여성들의 글쓰기가 영도되는 맥락을 살피며, 아울러 여성들이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서 주어진 젠더/여성이 되라는 미디어의 명령을 균열하는 징후를 독해한다. 기무라 료코의 지적처럼, 매스미디어는 기존의 합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 합의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장인 동시에, 어떠한 합의를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투쟁도 존재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근대 여성 미디어 역시 남성지배적 담론이 지령한 여성 문화/문학의 규범이 일방적으로 관철된 장이라기보다 남근중심적 명령을 이반(離叛)하려는 여성의 욕망이 길항하고 협상하는 장이며, 이 역동적인 쟁투 속에서 탄생한 것이 여성문학이다.
여성잡지, 여성들의 독서 취향을 구성하다
근대 여성잡지는 여성들의 문학열을 수용하기 위한 기획들을 마련하는데, 특히 ‘문예란’의 배치는 문학에 대한 여성 독자들의 열기를 흡수하기 위한 주요한 장치로 보인다. 문예란을 독립적으로 배치한 최초의 여성잡지는 1920년대 『신여성』이다. 『여자계』, 『신여자』, 『부인』 등이 문예물을 수록하되 문예란을 별도의 섹션으로 지정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신여성』은 개벽사가 발행한 여타의 잡지들과 마찬가지로 문예란을 하나의 섹션으로 독립하고 대개 잡지 후반부에 문예물을 따로 모아 수록하는 방식을 취했다.
1930년대 속간한 『신여성』이나 신동아사에서 창간한 『신가정』 역시 문예란을 확충하였으나, 소위 본격문학보다는 기(記) · 화(話) · 담(談) 등으로 명명된 혼종적 취미독서물이나 흥미위주의 하품문예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동화’나 여성의 연애·결혼을 주제로 한 대중적 취향의 ‘장편연재소설’ 등 특정 장르들이 비중 있게 수록되었다. 이는 ‘학교’와 더불어 근대적 주체 생산을 담당했던 ‘미디어’가 여성과 남성에게 할당한 교양의 내용이 성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계몽기 이래로 남성 계몽주체들이 지식인 여성들을 ‘누이’, 곧 하위 파트너십의 대상으로 지시했듯이, 대부분 남성 지식인들에 의해 기획된 여성잡지들 역시 동일한 논리가 간취된다. 여성용 미디어를 통해 본격문학을 향유하는 신남성 독자들과는 다른, 취미독물이나 하품 문예물을 주로 소비하는 신여성 독자들이 구성되며, 여성을 근대적 주체로 호명하는 표면적 환대 속에 남성의 열등한 타자로 여성을 재기입하는 젠더정치가 실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