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이후 최고의 독일어권 희곡 작가로 평가받는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천사, 바빌론에 오다』. <물리학자들>, <미시시피 씨의 결혼>, <노부인의 방문> 등의 독특한 이야기와 형식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선보였던 뒤렌마트는 이번 희곡 작품에서도 패러디와 패러독스를 담아낸 희비극 양식을 사용해 특유의 유머와 그로테스크한 세계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뒤렌마트는 세계의 어떤 한 부분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그로테스크하다고 보았다. 총 3막으로 이루어진 1953년 작 <천사, 바빌론에 오다>에서도 천사는 거지에게 신의 은총을 전하려 했지만, 진짜 거지와의 동냥 대결에서 패한 '거지로 변장한' 왕에게 은총을 전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다. 오히려 거지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로서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다.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로 전락한 왕이 하늘의 은총을 거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국민들과 대립하면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에게 은총을 전하라는 신의 의지에 부합하는지를 둘러싸고 혼란이 일어난다. 뒤렌마트는 이처럼 전도된 상황을 통해 권력, 부,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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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렌마트는 사회주의 정책을 펴는 전제군주, 국영 젖소우유에 수입을 빼앗긴 당나귀우유상, 시인을 먹여 살리는 거지, 국가적 위기에도 교세 확장에 만족하는 신학자 등 희극적이지만 단순히 우스꽝스럽게 볼 수만은 없는 상황을 제시한 후, 그 이면에 있는 세계의 감춰진 부분을 보여준다. 낯설고 이질적인 요소로 가득 찬 이러한 희비극 양식을 통해 뒤렌마크는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연극적 저항을 보여줌과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