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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후예들

제국의 후예들

  • 정범준
  • |
  • 황소자리
  • |
  • 2006-05-25 출간
  • |
  • 559페이지
  • |
  • 153 X 224 mm
  • |
  • ISBN 9788991508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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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2005년 7월 20일 오후 4시 20분경 인천 국제공항. 도쿄 나리타成田발 대한항공 편에 실린 한 남자의 시신이 내려지고 있었다. 몰려든 보도진과 유가족들이 이 광경을 지켜봤다. 시신은 곧 빈청賓廳이 마련된 창덕궁 낙선재로 옮겨졌다. 이날 저녁 각 방송사 뉴스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의 운구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남자의 이름은 이구李玖. 고종 황제의 손자이자 영친왕 이은李垠의 아들이다. 나흘 전 도쿄 아카사카호텔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향년 74세. 사인死因은 심장마비로 추정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이라는 그가 일본에서 떠돌다 생을 마쳐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야기는 약 100년 전, 다시 인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훗날 이구를 낳게 될 영친왕 이은이 한 일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 ‘프롤로그’ 전문

책의 개요

“과거는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소설가 이병주의 말이다. 그 과거가 역사가 되든 신화로 물들든, 하나의 사실史實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기까지는 적어도 100년이라는 시간이 요구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우리에게도 100년을 기다려야 했던 거대한 ‘과거’가 있다. 그 전까지의 역사가 지녔던 관성을 철저히 무너뜨린 수렁이자, 들추어내기 힘든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근대. 너무나 가까워 비평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던 근대는 어느새 한 세기 바깥으로 멀어졌다.
이제는 숨죽이고 있던 우리 근대사의 뇌관을 향해 다가갈 때가 되었다.

이 책 《제국의 후예들》은 가파르게 굽이친 한반도 근현대 100년사의 발화점이자 심장부인 대한제국 황실의 이야기다. 무능했던 대한제국 황실에 망국의 일차적 책임을 물어야 했지만 사실 이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자리조차 갖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이 땅 권력자들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거나 이용당하면서 누구보다 심한 부침浮沈을 겪었다. 격변하는 한반도 역사의 최전선에서 거친 바람과 온갖 질곡을 견뎌낸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의 근현대사였으나 이제껏‘역사’로 대접받지 못한 채 풍문으로만 떠돌아 다녔다.
《제국의 후예들》은 이들의 삶을 있었던 모습 그대로 복원함으로써 한반도 근현대사의 빈 페이지를 채우자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은 ‘퍼즐맞추기’에 가까웠다. 왜 이 기록과 저 기록은 앞뒤가 맞지 않을까, 무슨 법을 만들고 누구를 처형했다는데 구체적인 근거는 왜 제시하지 않았을까. 자료와 기록에 나타난 기록을 당대 신문?잡지?실록의 기사와 비교해나가자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결과는 이 책의 본문이 말해줄 것이다. 되도록 많은 기록과 증언을 원문 그대로 인용하고자 노력했다. 원전元典 이 지닌 힘에 의지해 황실에 관한 오류를 바로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머리에’중에서

저자는 대한제국 후예들의 온전한 자리를 찾기 위해 수많은 문헌을 뒤졌지만, 그 기록들의 옥석을 가려내는 일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1차적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이방자의 여러 자서전조차 대필자에 의해 내용이 첨삭되었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믿을 만한 기록과 사실을 발라내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황실에 대해 서술한 대부분의 저서와 언론은 내용 확인이나 취재원에 대한 정확한 명시도 없이 떠도는 이야기를 그대로 싣기 일쑤였다. 역사를 기술하는 태도가 감정적이다 보니 황족들의 독립운동이라면 덮어놓고 사실을 부풀렸고 일제의 잔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의 고통을 과장하거나 심지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 책의 본문을 통해 상세한 사실이 밝혀지겠지만, 대한제국의 대를 끊기 위해 일제가 석녀石女인 이방자를 영친왕과 맺어주었다거나 덕혜옹주가 일본인 남편 소 다케유키에게 얻어맞아 유산했다는 소문은 우리가 한 세기 동안 그 시대를 얼마나 감정적으로 인식해왔는지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황실 후손이나 궁녀들의 증언은 그 자체로 소중한 자료이긴 하지만 이를 사료적 근거로 삼기 위해서는 세심한 검증이 필요하다. 궁중에는 온갖 비화가 전해온다. 이를테면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됐다는 설, 결혼 전 이방자가 불임 진단을 받았다는 설, 덕혜옹주의 일본인 남편이 애꾸눈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무수한 비화가 전해오는데 그 중에는 ‘고종 독살설’처럼 제법 근거가 있는 것도 있지만 전혀 사실무근인 것도 적지 않다. -본문 175쪽

이 책 《제국의 후예들》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소개되는 인물은 영친왕 이은과 영친왕비 이방자, 의친왕 이강과 덕혜옹주, 영친왕의 아들 이구 등이다. 거기에 민갑완과 이구의 전 부인 줄리아 뮬록, 황적에 올랐던 이강의 두 아들 이건과 이우, 그리고 황적에 오르지 못한 후예들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 제법 비중 있게 소개하는 민갑완은 어려서 이은의 간택단자를 받았다는 이유로 평생을 수절하며 살아야 했던 여인이다. 그녀는 조선 황족과 일본 황족의 정략결혼, 소위 일선융화日鮮融和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비록 황족은 아니지만 그녀가 감내한 세월 속에는 대한제국 황실 그 누구의 삶보다 장중하고 애절한 역사가 서려 있다.

2005년 한여름, 인천 국제공항에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시신이 내려졌다. 저자는 이 날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100년에 걸친 대한제국 후예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이라는 그가 일본에서 떠돌다 생을 마쳐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야기는 약 100년 전, 다시 인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훗날 이구를 낳게 될 영친왕 이은이 한 일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 본문 17쪽

영친왕 이은은 순종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를, 우리나라 역사상 단 하나뿐인 황태자였다. 그랬기 때문에 역사의 풍랑이 일 때마다 가장 먼저 그 예봉을 얻어맞았다. 어려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그는 일제의 속박과 친일파 황태자라는 오명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줄타기를 해야 했다. 마침내 찾아온 조국 광복 후에도 이은의 고된 삶은 해방을 맞지 못했다. 그의 귀국은 정치 권력자들의 야욕에 의해 한없이 늦춰졌다. 귀향에 대한 이은의 끝없는 기다림은 스스로 조국 땅을 밟을 수도, 조국에 돌아온 기쁨을 한 마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병세가 위중해진 다음에야 끝이 났다.
그런 황태자와 평생을 함께한 영친왕비 이방자 역시 시대의 모진 바람을 전 생애로 감내한 인물이다.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부군의 조국을 자신의 나라로 받아들이려던 그녀의 구애를 이 땅은 모른 척했고, 일본 황족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평생에 걸쳐‘왕비’이방자에 대한 의심을 낳는 빌미로 작용했다. 일생 동안 한일 간의 수많은 파란으로 충만했던 이방자의 육신은 그녀가 눈을 감은 뒤에야 남편 이은과 함께 남양주 영원英園에서 편안히 쉴 수 있게 됐다.
황족들은 그들의 나약함이나 무능함과는 상관없이 몰락해가던 대한제국 민중들에게 희망의 불꽃이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들의 이야기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의친왕 이강은 무수한 풍문과 논란의 진원지였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주색으로 허송세월했다고 폄하했지만 진위여부가 불투명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민중들은 그의 빛나는 독립운동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바늘 끝처럼 예민한 정신을 가진 덕혜옹주에게 망국의 공주 자리는 무겁기만 했다. 고명딸인 그녀를 애지중지 키웠던 고종 황제의 죽음, 일본인과의 정략결혼, 불행한 생활이 불러오는 과중한 심리적 고통은 그녀의 정신을 짓눌렀다. 덕수궁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결국 오래토록 정신분열증을 앓다 한恨으로 가득한 삶을 마감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남겨놓은 낙서만이 그녀의 오래된 고통과 외로움을 조용히 증언한다.
첫 아이의 죽음과 유산이라는 상처 끝에 얻은 영친왕의 외아들 이구는 MIT를 나온, 총명하고 패기만만한 청년 건축가로 장성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조국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생채기 투성이였다. 끝 모르고 나락으로 떨어지던 이구는 일본에서 떠돌다 삶을 마감했고, 그가 매몰차게 버린 전 부인 줄리아만이 남편마저 떠난 낙선재의 정신을 오롯하게 지켰다. 벽안의 황세자비 줄리아. 그녀는 이 땅을 온 마음으로 사랑한 황실의 여인이었다.
늘 한국에 대한 분노와 열등감에 빠져 있던 의친왕 이강의 장남 이건은 일본인이 되어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일제는 얄궂게도 천황을 존경하기로 했던 이건에겐 자신이 일본의 식객일 뿐이었다는 회한만 남겼고, 일본의 것이라면 죽어도 싫다던 그의 동생 이우에겐 히로시마 전출 명령을 내렸다. 일본의 패망은 우리에게 자유를 돌려준 동시에 모두에게 사랑받던 훌륭한 황족 한 사람을 원폭의 희생양으로 저당잡은 셈이다.
이강의 많은 자녀들 중에서 황적에 오른 사람은 이건과 이우뿐이었다. 해방 후, 황실의 재산을 악착같이 빼앗으려던 정부의 등쌀에 밀려 황실 후예들의 삶은 고단해졌다. 언론과 대중들은 ‘거지가 된 왕자’와 같은 선정적인 이야기에만 흥미를 가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의 이목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 조용히 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대한제국 후예들과의 수차례에 걸친 만남과 전화통화를 통해 이들의 현재 삶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프리랜스 르포라이터로 활동해온 저자는 수백 권의 관련서와 당대 신문, 잡지를 샅샅이 살피고 관련 인물들을 만나 꼼꼼히 취재하면서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복원해냈다. 원고지 200매 분량의 방대한 주석이 저자가 얼마나 성실하게 원전을 읽고 분석해왔는지 짐작케 한다. 그는 근현대사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털어내고자, 여러 가지 의도에 의해 왜곡된 기록들로부터 과장과 거짓을 걷어내는 작업부터 착수했다. 한 예로, 1995년 2월에 방송된〈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방자의‘석녀설’을 자서전의 기록과 혼다 세츠코의 말에 의지해 사실인 것처럼 몰아갔다. 방송 내용에 의구심을 가진 저자는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를 쓴 혼다 세츠코와 직접 접촉했다. 그리고 방송이 그녀의 진술과 다른 내용을 일방적으로 방영해 결과적으로 근거 없는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해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처럼 《제국의 후예들》을 집필하는 일은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감정의 과잉과 각색을 철저히 배제한 날것 그대로의 진실이 밝혀지고 당대의 삶이 또렷해질수록 근현대사는 오히려 아주 장중한 모습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영친왕 이은과 의친왕 이강, 덕혜옹주와 이방자, 이구 등 황족들의 개인사를 돌아보는 일은 거대한 줄기에서 시작해 무수한 지류로 뻗어가는 근현대사를 우리가 하나의 구체적인 실체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에 다름 아니었다.
저자가 우직하게 기록한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간 우리가 스스로의 역사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어둠 속의 공간으로 인식돼왔던 ‘과거’의 이야기가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 전하는 목소리는 무엇인지를 새롭고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

▣ 고난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황태자였던 이은은 대한제국의 상징을 꺾어버리려는 세력과 그를 향한 민중들의 소리 없는 비원 사이에서 가시밭길 같은 삶을 살았다. 도망칠 수 없는 대한제국 황태자로서의 책무는 오랜 세월 그를 짓눌렀지만, 한편으론 긴 시간 동안 고난을 감내할 수 있던 힘이기도 했다.

해방 후에 그를 만난 한국인들은 50년 가까이 거의 일본에서만 생활했던 이은이 유창한 우리말을, 그것도 ‘우아한 궁중 용어’를 쓰는 데 경탄하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남몰래 우리말을 연습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지 않다면 모국어를 잊지 않고 그렇게 유창하게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 본문 93쪽

어려서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 이은은 평생 동안 고국을 그리워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그의 단 하나뿐이던 귀국에 대한 소망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를 정치적 라이벌로 생각했던 이승만은 귀국을 끈질기게 방해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를 이용하려는 야욕이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발길을 붙잡곤 했다.

이은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가능성은 여전했다. 그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호의적이었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지만 이은을 정치적인 관점으로 대한 건 장면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정부가 이은의 정치적 영향력을 경계하여 박대했다면, 장면 정부는 이은의 국민적 인기를 이용해 새 정부의 지지도를 끌어올리려 했다. - 본문 132쪽

고국의 격변을 멀리서만 지켜보던 이은이 드디어 낙선재에 돌아온 것은 도움 없이는 스스로 걸을 수도, 평생 마음속에 담아뒀던 회한 한마디 제대로 이야기 할 수도 없을 만큼 위중해진 다음이었다. 아들 이구는 그가 세상을 뜨던 날에“낙선재 뜰의 모든 꽃들이 아름답고 난만하게 피어있”었다며 그리움과 고단함으로 가득했던 영친왕 이은의 생애를 위로했다.

이은의 장례는 9일장으로 치러졌다. 이은의 유해는 아버지 고종황제가 묻혀있는 남양주 홍릉 내의 영원英園에 잠들어 있다. 무덤 옆에는 ‘대한제국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라고 새겨진 비석이 놓여 있다. 의민懿愍이란 ‘일생 동안 고난의 길을 걸은 사람’이란 뜻이다. - 본문 144쪽

▣ 두 조국을 가진 황태자비 이방자
일본의 황족이었던 이방자의 본명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그녀는 일제의 전략에 의해 어려서 조선의 황태자 이은과 결혼해 평생을 이방자로 살았다. 파란 많은 시기에 타국의 황태자비로 가는 일은 그녀에게도 가혹한 일이었지만, 나라를 빼앗긴 설움으로 가득했던 조선인들에게 이방자는 망국의 상징일 뿐이었다. 민중들은 그녀를 대한제국의 대를 끊기 위해 일제가 보낸 석녀로 몰아갔다. 이방자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조선 민중들의 불만과 일본 황족들의 미묘한 시선을 견디는 와중에 큰아들의 죽음과 두 차례의 유산을 겪었다. 끝없이 이어진 불행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침대를 떠날 수조차 없었던 남편과 환국한 뒤, 이방자는 홀로 복지사업에 힘을 쏟았다. 장애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한일 양국 사이에서 불협화음을 감내해야 했고, 그녀가 눈을 감는 날까지 이방자를 둘러싼 수선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방자는 자신과 이은의 일생이 “한일문제를 배경으로 한 파란에 충만된 드라마”였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그리고 이은과 함께 처음 환국할 때 “아! 마침내 파란만장한 여로旅路가 끝이 났구나!”라고 감회에 젖은 듯 쓰고 있다. - 본문 243쪽

이방자는‘조국이 둘이 아니냐’는 질문에 “이제 저는 한국 국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젠 그녀를 우리가 한국인으로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다.

▣ ‘백년한’으로 남은 여인 민갑완
어려서 황태자 이은의 간택단자를 받았던 죄로 평생을 수절하며 외롭게 살았던 불운한 여인, 민갑완. 황태자비가 될 뻔 했던 그녀는 단 하루도 궁에서 살지 못했음에도 언제나 일제의 공작과 친일파들의 과잉충성에 희생되어야 했다. 민갑완은 약혼의 징표로 간직하고 싶어했던 가락지까지 남김없이 빼앗기고, 결혼을 종용하는 세력에 떠밀려 도망치듯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러나 고국에서도, 상하이에서도 민갑완은 번민을 날려보낼 평화로운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단 한 번 황태자와 만났던 순간은 외로운 삶을 지탱하기엔 너무나 짧은 추억이었다. 그 고통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평생 수절해온 그녀를‘민 규수’라 부르며 칭송했다.

민갑완은 뒤늦게 명예를 얻었지만 밀려드는 비애를 이기지 못했다. 민갑완은 자신이 너무 늙어버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허울 좋은 명예만으로 북받치는 비애와 고독을 상쇄시킬 수는 없었다. - 본문 226쪽

“혼자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기구(기도)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그녀가 구술한 이야기는 《백년한》이라는 제목을 달고 역사 속을 흘러가고 있다.

▣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왕자 의친왕 이강
실록에도 출생에 대한 언급이 없을 정도로 탄생부터 불우했던 의친왕 이강은 줄곧 논란에 휘말렸다. 국고를 탕진하며 주색잡기에만 몰두했다는 비난과 빛나는 독립 운동가였다는 찬사 사이의 간극은 우리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주관적이었는지를 반증한다.

거창에서의 독립운동이 사실이 아니라 해서 이강의 배일排日 의식을 의심한다거나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강의 생애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다. 기본적인 연구는 도외시한 채 극단적으로 폄하하거나, 근거 없는 정황이나 증언을 내세우며 영웅으로 떠받드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 본문 398쪽

상하이로의 탈출 시도를 비롯해서, 이강이 독립에 기여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국내에 머물러 있는 왕자의 존재는 일제에게 큰 위협이었다. 조선총독부는 3년에 걸쳐 의친왕 이강 부부를 감시하고 그 동태를 매일매일 일지로 작성해 남겼다. 그러나 일제의 그런 노력도 소용없이, 민중들은 이강을 사랑했다.

당대 조선인들은 일제가 발표한 경찰조서나 판결문 내용과 〈매일신보〉의 보도를 믿지 않았다. 대부분은 이강이 자발적으로 상하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난향은 “우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들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고 의친왕에 대해 새로운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1931년 10월호 〈삼천리〉는 일제의 검열을 의식하면서도 대동단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 본문 424쪽

▣ 덕수궁의 꽃 덕혜옹주
덕혜옹주는 나라 잃은 민족의 뼈아픈 고통과 상실을 온 생애로 증명한다. 덕수궁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정신분열로 숨을 거두기까지, 그녀의 삶은 온통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뒤늦게 얻은 고명딸 덕혜옹주를 끔찍이 사랑했던 아버지 고종 황제를 떠나 그녀는 일제가 강요한 정략결혼에 희생되어야 했다. 예민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덕혜옹주에게 망국의 공주라는 지위는 지나치게 무거웠고, 타국에서의 불행한 삶과 친족들의 죽음은 덕혜옹주의 정신을 무참히 짓이겼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정신과 의사는 덕혜옹주의 증세를 조발성치매早發性癡?로 진단했다. 영친왕 부처는 덕혜옹주를 오이소 별장에 보내 정양케 했다. 의사에게 부탁해 간호사도 딸려보냈다.
“빨리 원기를 회복하셔야지요…….”
이방자는 덕혜옹주가 누운 침대의 베겟머리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고 말했다. 하지만 덕혜옹주는 침상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결혼 논의는 진행되고 있었다. - 본문 329쪽

어려서‘풀각시’같았던 그녀의 만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덕혜옹주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낙서들이 벼랑 끝 같았던 그녀의 삶을 증언한다.

덕혜옹주는 가끔 순정효황후에게 문안편지를 썼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써둔 알 듯 모를 듯한 낙서도 남아 있다.‘나는 이구 씨가 보고 싶다’‘나는 비전하(이방자)가 보고 싶어요’‘나는 낙선재(에서) 살고 싶어요.’- 본문 366쪽

▣ 타국을 떠돌다 생을 마감했던 불행한 황세손 이구와 벽안의 황세자비 줄리아
이구와 줄리아는 불행한 역사가 개인의 삶과 소중한 인연들을 어떻게 뒤틀고 난도질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안타까운 표본이다. 이은 부부는 첫 아들이 조사한 후 10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에게 자신들이 가져보지 못했던 자유를 주고 싶어 했다. 이구는 희망의 땅에서 총명하고 패기 넘치는 청년 건축가로 성장했고, 그곳에서 만난 푸른 눈의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 그녀는 이구와 그의 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한국에 돌아온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소박한 서민으로 한국에 정착하고 싶었던 그들의 소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종친들은 영친왕의 유일한 후손인 이구에게 황실을 복원하는 구심이 되기를 요구했다. 온갖 감언과 구습의 그물에 포박당한 이구는 줄리아를 매몰차게 버리고, 그 스스로도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종친들의 강요에도 꿋꿋이 한국인으로 살며 복지사업에 전념했던 줄리아는 18년 간 함께 했던 남편을 꼭 한 번 만나고 싶어 했지만,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결식 후 종묘 앞에서 노제가 치러졌다. 대동종약원으로부터 공식적인 부고를 받지 못한 줄리아는 영결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종묘 맞은 편 세운상가 쪽에서 남몰래 노제를 지켜보았다. 취재진이 눈치채고 접근하자 줄리아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구의 유해는 이날 경기도 남양주 영원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나흘 후인 7월 28일, 줄리아는 이구의 묘소를 참배했다. 비가 몹시 쏟아지는 날이었다. - 본문 289쪽

거대한 역사의 파도 앞에서 개인의 삶은 나약하고 보잘 것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질곡과 풍파를 견뎌낸 줄리아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이제 이 긴 편지를 마무리할 때입니다. 당신이 내 인생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고 생각했는데 따지고보니 난 별로 잃은 게 없습니다. 시련은 나를 더 강인하게 만들었고 외로움은 소외된 사람들과 깊은 유대감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당신 덕분에 아름다운 곳, 좋은 사람들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다는 말, 진심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부디 행복하시고 편안하시길. - 본문 288쪽

▣ 일본인이 된 황족 이건
동생에 대한 열등감과 패배감을 이기지 못하고 일본인으로 귀화한 이건은 나약하고 무책임한 황족의 전형이었다. 해방 후 찾아온 선택의 기로에서 이건은 주저 없이 일본인으로 남았다. 아무것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아버지조차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한국의 왕공족 역할을 계속할 이유가 그에겐 전혀 없었던 것이다.

1947년 10월 이건은 정식으로 일본에 귀화하고 모모야마 겐이치로 개명했다. 이은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어수선한 세상이니 더 좀 기다렸다가 결정하는 것이 어떠냐”고 설득했지만 이건은 “(그러면) 안정이 되지 않는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건의 일본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모모야마’는 다이쇼 천황이 묻힌 곳의 지명이다. - 본문 464쪽

그러나 이건은 훗날 수기에서‘자신들(왕공족)의 본질이 일본 황실의 식객이며, 천황제 기구의 부록이고, 인격이 없는 괴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노라고’자신의 오랜 회한을 털어놨다.

▣ 원폭에 희생된 미남 황손 이우
1945년 이우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지붕에서 구렁이가 떨어지고 집안에서 제일 큰 장독이 깨졌다. 그의 부임지는 히로시마였다. 피폭되어 숨진 이우의 시신 앞에서는 일제의 패망조차 우리에게 기쁨이 되지 못했다. 실로 끔찍한 악연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총명함으로 아버지와 모든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이우는 운현궁의 상속자이자 이강과 함께 조선에서 두 명뿐인 공작이었으며, 일제의 정략결혼 강요에도 미동치 않고 소신에 따라 가례를 올릴 만큼 강직했다. 그러나 이우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증오했던 일제의 땅에서 조국의 해방을 보지도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우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신봉승의 말처럼 “조국의 광복을 일주일 앞두고 가장 훌륭했던 왕족 한 사람이 원폭의 희생자로 참변을 당한 것”이다. 요시나리의 자결도 그가 이우의 인품을 흠모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본문 500쪽

▣ 그리고, 남아 있는 황실의 후예들
해방을 맞고 나자 정부는 황실의 재산을 빼앗지 못해 안달을 했다. 몰수된 재산에 권력자와 모리배들이 ‘꿀 항아리에 모여드는 벌떼’처럼 달려들었고, 황실재산관리 사무국의 온갖 비리는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공공연했다.

황실재산 몰수는 대한제국의 황손들이 이후 불우한 삶을 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강은 공식적으로 12남 9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연히 이복형제들 간의 호주 상속 다툼이 빈번했고 황손들은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에 시달려야했다.

어느 언론사의 기자가 찾아오더니 대뜸 “그 동안 고생했던 얘기를 해주시죠.”라고 물었습니다. 문득 인터뷰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론이나 일반인의 관심은 그런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황실 역사의 올바른 복원보다는 ‘거지가 된 왕자’같은 선정적인 이야기에만 흥미를 느끼나 봅니다. 내가 성공하고 떳떳해야만 세상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책머리에’ 중에서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 조용히 살고 있는 후손들의 이야기를 저자는 가감없이 담담하게 들려준다.

목차

프롤로그

1장 고난의 황태자 - 영친왕 이은
일본 황태자의 방한 / 타국의 밤 / 황태자의 탄생 /
단 한 번의 만남 / 황태자의 유년 / 낙선재의 조약돌 /
엄 황귀비의 흥거 / 가례를 올리다 / 민갑완, 잔인한 날들의 시작 /
이어지는 불행 /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다 / 싹트는 민족의식 /
유럽 여행 / 그대에게 구하는 바 없노라 / 차라리 죽기로 마음먹다 /
제왕의 풍모 / 전쟁의 소용돌이 / 사라져라 번뇌어 / 해방 혹은 종전 /
신정부에 충성을 다하겠다 / 영친왕저 문제 / '일본인'이 되다 /
약해지는 황태자 / 다시 쓰러지다 / 세 번의 통곡와 영면

2장 두 조국의 사이에서 - 이방자
유년의 기억 / 엄격한 황실 교육 / 약혼 발표 / '기막힌 법' 황실전범 /
추모시와 연가 / 신혼의 황복 / '석녀' 이방자 / 첫 방한 /
첫 아들 진을 하늘로 보내고... / 새로운 신앙 / 국상을 치르다 /
이구의 탄생 / 휩쓸려가는 사람들 / 해방과 6.25 / 남편의 분노를 보다 /
막다른 곳 / 일본이여 안녕, 일본이여 안녕 / 문화재보호법 /
쪽발이 물러가라 / 고독한 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 / 장애인 복지사업 /
명휘와 가혜 / 애끓는 모정 / 여로의 끝

3장 황태자 아들과 탄광부의 딸 - 이구와 줄리아
폭풍우 속의 출발 / 미국 생활 / 줄리아라는 여성을 만나다 /
처음 밟은 한국 땅 / 다툼과 균열 /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여 한국을 떠나다 /
아리타 기누코 / 사기 사건에 휘말리다 / 영구 귀국 /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 / 아카사카에 지다

4장 덕수궁의 금지옥엽 - 덕혜옹주
황제의 여인과 자녀들 / 덕수궁의 꽃이 태어나다 / 황제의 밀약 /
아버지 고종 황제의 붕어 / 끌려가는 옹주 / 순종 황제의 붕어 /
고아가 된 덕혜옹주 / 병이 시작되다 / '고아들'의 결혼 /
아기씨에 대한 추억 / 병의 재발 /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
언니의 기억 / 김을한의 충격적인 증언 / 이혼이 성립되다 /
정혜의 죽음 / 성대한 환대 / 덕수궁의 꽃이 지다

5장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왕자 - 의친왕 이강
불우한 탄생 / 보빙대사 활동 후 귀국 / 유럽 순유는 없었다? /
역모에 연루되다 / 이토 히로부미의 계략 / 신변의 위협 /
엇갈리는 평가 / 배일과 울분의 나날 / 3.1운동과 그의 역할 /
가장 빛나는 불꽃 / 정운복의 역할 / 유고에 담긴 뜻 /
다시 어둠 속으로 / 경비관계철 / 그의 최후 / 의친왕비의 부덕

6장 일본인이 된 황족 - 이건
출생의 비밀 / 일본식 교육 / "나는 천황을 존경하기로 결정지었다" /
재빠른 적응 / 이혼과 소송

7장 원폭에 희생된 미남 황손 이우
운현궁의 새주인 / 일본 유학 / '민족과 해협' /
박영효의 기지와 열성으로 결실을 맺은 결혼 /
"나는 일본 것이라면 병적으로 싫습니다" / 안타까운 죽음

8장 남아 있는 황실의 후예뜰
황실 재산 몰수 / 의친왕의 12남 9녀 / 살아 있는 황손들

에필로그
참고문헌
주석
찾아보기

저자소개

지은이 - 정범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77년, 부산으로 이주했다. 부산에서 초·중·고를 다 졸업했다. 추첨으로 1986년 금성錦城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 제일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됐다. 그곳에서 나는 평생의 지기知己를 만났다. 금성고 졸업(1989년)은 ‘롯데 자이언츠 창단 어린이 회원’ 활동과 함께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경력이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1997년 8월)하고 근 3년 동안 변변한 직장을 잡지 못했다. IMF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있었지만 8할은 대학 때 공부 안 하고 술만 퍼마셨던 내 책임이다. 대학 졸업 후 한국교원대 대학원에 진학(2000년 3월)하기 전까지가 괴로운 시절이었다. 이런저런 투고와 공공근로로 밥벌이를 했다.
대학원은 채 석 달도 다니지 못했다. 〈넷벤처〉라는 잡지사에서 연봉 2,000만원을 준다길래 냉큼 뛰쳐나왔다. 불행히도 첫 직장은 망하고 말았지만(2001년 2월) 그 이후 직장 생활은 순조로웠다. 두 번째 직장 이후로 줄곧 비정규직에 머물렀지만 직장을 옮길 때마다 함께 일하게 된 동료와 상사들이 한결같이 좋았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사람이 좋으면 그 이상 보탤 것이 없는 법이다. 현재는 관훈클럽에서 일하고 있다.
장담하는 말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부득이 이런 말은 해야겠다. 이름을 걸고 책을 쓰는 일이 더없이 좋고 즐거웠다. 로또에 당첨되거나 무슨 ‘뾰족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면 당분간 책 쓰는 일에 전념하려고 한다.
정범준은 필명이다. 이 이름에는 나를 포함한 네 사내의 인연과 우정이 깃들어 있다. 사사로운 설명을 뺀다면 이름의 연원도 거의 20년이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정범준이란 이름을 건 첫 책이다. 앞으로 내가 어떤 사람을 사귀게 되더라도 내 신의와 우정은 항상 오랜 벗들에게 머물 것이며, 그 어떤 책을 내더라도 나의 첫 정은 언제나 이 책에 기울 것이다. 이건 장담할 수 있다.

도서소개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을 통해 한반도 근현대사 100년을 살펴보는 책. 한반도 근현대 100년사의 발화점이자 심장부였던 대한제국 황실의 모습과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황실에 대한 감정적인 시선을 걷어내고,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후손과 주변 인물들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수백 권의 관련서와 당대 신문, 잡지 등을 살펴보고 관련 인물들을 만나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복원해냈다. 영친왕 이은과 영친왕비 이방자, 의친왕 이강과 덕혜옹주, 영친왕의 아들 이구, 민갑완과 이구의 전 부인 줄리아 뮬록, 황적에 올랐던 이강의 두 아들 이건과 이우 등의 삶을 따라가며, 그동안 잘못 알았거나 혹은 몰랐던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새롭게 완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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