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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역사 화해는 가능한가

한국과 일본, 역사 화해는 가능한가

  • 박홍규
  • |
  • 연암서가
  • |
  • 2017-07-30 출간
  • |
  • 252페이지
  • |
  • 152 X 225 mm
  • |
  • ISBN 979116087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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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책속으로 추가]
한일 간에 국교정상화를 이끈 한일회담의 타결은 모든 현안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어려운 교섭과정을 거치긴 하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양국이 대립을 거듭하였던 청구권문제가 타결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과거청산의 의미가 담긴 청구권 문제를 국내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제협력’의 일괄타결방식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한일회담을 서둘러 마무리 하고자 했던 배경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자금도입이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1961년 당시 한국 경제는 1인당 국민소득이 85달러에 불과하였으며,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물가상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한국 경제를 지탱해 주던 미국의 원조도 1958년부터 양적 감소와 함께 무상에서 유상차관으로 전환되면서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때에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정권의 정당성과 안정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경제재건을 최우선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51쪽

한국이 국교정상화 교섭과정에서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한 과거사 문제는 지난 50여 년간 계속해서 한일 관계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쉽게 해결될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을 개정하거나 새로운 협정 체결을 통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리 현실적이라 할 수 없다. 한국의 국력이 196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그간 수많은 외교교섭을 통해 교섭능력 또한 충분히 배양되었다는 점에서 교섭을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교섭 상대국인 일본의 과거역사에 대한 인식과 교섭태도에서는 어떠한 긍정적인 변화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섭을 다시 한다 해도 한국 국민들의 정서상 만족할 만한 결과를 도출해 낼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일 간에 새로운 협상을 거쳐 도출한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관련 합의가 한국 내에서 저조한 평가를 받고 있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55쪽

재일한국인은 다양한 문화 활동을 했다. 연극, 무용, 문학, 영화, 체육 등에서 조선 내와 다른 생활을 하기도 했다. 오사카 이카이노(猪飼野)의 경우 조선에서 간 공연단이 재일한국인의 시름을 달래주었다. 특히 각종 신문과 잡지 간행에 적극적이었다. 『조선신문』과 『민중시보』는 도쿄와 오사카의 대표적인 지역문제를 다룬 신문이었다. 『민중시보』는 1935년 6월 15일 창간되었다. 처음에는 월 2회 발행되다가 1936년 1월부터는 월 3회 간행되었다. 타블로이드판으로 6∼8페이지 분량이었다. 1면이 사설, 정치 사상문제, 2면이 국제문제, 3면이 조선본토 문제, 4∼6면이 재일한국인의 사회문제 등을 다루었다. -65쪽

일본 정부는 1947년 2월 외국인 등록령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조선인과 대만인을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고 하여 외국인등록이 의무화되었다. 이에 따라 재일한국인은 일본국적의 외국인이 되었다. 그리고 외국인등록증을 휴대해야 했고3, 년마다 갱신해야 했다.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소비재, 생활물자 등의 부족으로 암시장이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재일한국인은 일본인, 중국인과 함께 암시장에서 쌀이나 술 등을 밀매했다. 암시장은 재일한국인에게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수단이었다. 1950년대까지 재일한국인은 고물수집상을 많이 했다. 파칭코, 한국식당 등을 하면서 생활을 했다. 문제는 이런 경제활동 분야에 아직도 재일한국인이 다수라는 점이다. 재일한국인은 대학을 졸업해도 일본 기업에 취직할 수 없었다. 공영주택의 입주, 국민건강보험의 가입 등을 거절당했다. -67쪽

시간적 흐름 속에서 볼 때, 일본 학교를 다닌 재일한국인 2세는 1970년대부터 등장했다. 일본 학교를 다녔고 그곳에서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 배웠다. 재일한국인 2세는 권리획득운동을 했다. 1970년의 히다치(日立) 취직차별사건을 계기로 일반 시민 사이에서 폭넓게 전개되기 시작했던 역사는 많이 알려져 있다. 박종석은 재판을 통해 취업의 차별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2차례에 걸친 공판 끝에 1974년에 요코하마지방재판소는 재일한국인의 ‘통명(일본식 이름)’ 사용이 해고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1970년대 재일한국인의 차별에 대항하여 승리한 운동은 사법연수생에 대한 국적조항철폐운동이었다. 그 주인공은 김경득(金敬得)이다. 김경득의 경우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생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김경득의 관련 서류가 보류되었고, 일본에 귀화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여졌다. 1977년 3월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일본 국적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채용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70쪽

1923년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종식으로 호경기가 막을 내리고,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의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또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가 점점 확산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일본인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의 연계가 이루어져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3·1만세운동, 간도에서의 참패 등을 직접 경험한 일본 정부 수뇌부는 자칫 노동운동이 조선으로 확산되어 갈 것을 매우 우려하였다. 일본 정부의 의도적인 자연재해를 빙자한 조선인 관련 유언비어 전파와 계엄령 선포는 이처럼 침체된 일본 경제에 대한 일본 민중의 불만을 조선인에게 돌려 민중으로 하여금 민중을 학살하게 하는 잔인한 근대적 제노사이드를 연출하게 한 것이다. 당시의 현실문제 타개를 위해 일본 정부는 또다시 자국민을 역사 속의 몬스터로 재생하여 타민족 대학살이라는 오명의 역사를 깊게 남겨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록물 보존 기간과 개인정보 보호라는 미명 하에 사건 은폐로 일관하고 있다. -91쪽

일본인의 대부분은 8월 15일을 전쟁이 끝난 날로 기억하고 있지만 중국 동북부(만주), 한반도, 대만, 남양군도 등 ‘외지’에 있던 민간인과 군인을 제외하고 식민지 지배의 종언을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국내에 있던 대다수의 일본인(1945년 당시 일본의 인구는 약 7,260만 명으로 이 가운데 해외에 있던 일본인은 9%인 약 660만 명이었다. 이들 중 군인과 군속은 310만 명이었다)은 미군의 엄청난 공습이 사라지자 안심하였으며 출정한 아버지나 남편의 안부를 염려하고 그들의 귀가를 기다리며 식량·주택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패전’=‘식민지 지배의 종언’이라는 인식과 기억의 결여는 지금도 일본 사회에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전쟁의 뒤처리라고 하면 1941~45년의 연합국과의 ‘제2차 세계대전’ 내지는 중일 전쟁을 포함한 1931~45년 사이의 15년 전쟁’의 뒤처리로 막연하게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식민지 지배의 청산까지는 시야에 넣지 못했다. 아니, 거기까지 시야에 넣는 것을 계속 회피하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95쪽

일본 국내의 전쟁 피해자가 보상을 요구하여 1955년부터 법원에 제소하였지만 해외의 피해자가 바다를 넘어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1970년대까지는 불가능하였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보통의 서민이며 해외 도항을 위한 자유도 경제적 여력도 정보도 없었다. 한국,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도 일본에게 거액의 경제 원조를 받은 친일적인 독재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던 만큼 전쟁 피해를 주장하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중국은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서 상호 청구권을 포기하고 피해자가 직접 일본에 개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통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피해자는 결코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도 잠자코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 목소리는 억압되었으며 일본의 전후 세대도 대부분 가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103쪽

2002년 이후 한국의 피해자들은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한일회담 때의 외교 회의록을 공개하도록 했다. 또한 ‘위안부’와 피폭자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밀린 임금에 관해서도 한국 법원에서 일본 기업에 대한 지급 명령을 받아냈다. 외교 협상을 게을리 한 한국 정부(외교부 장관)도 부작위를 이유로 고소당했다. 한국에서 전후 보상 재판에 자극을 받아 일본 기업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이 중국에서도 이어졌다.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에서 이뤄진 것은 일본의 변호사와 연구자들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물론 일본 정부도 예상하지 못했다. 종래의 상식을 뒤집는 전후 보상을 둘러싼 새로운 사법 상황이 지금 동아시아에서 출현하고 있다. 패소한 피해자, 지원자, 일본 변호사들의 고투가 한국과 중국의 변호사와 지원자에게 격려와 새로운 사명감을 주었다고 한다. 현재 동일한 원고 대 피고로 싸운 동일한 사례에서 일본 법원에서는 무죄(원고=피해자 패소), 한국 법원에서는 유죄(피고=일본 기업 패소)라는 정반대의 판결이 나오는 초유의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판결이 나온 것 때문에 재판 제도와 그 결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가면 좋을지 한일 양국은 전대미문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120쪽

1965년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나타난 한국 정부의 태도를 보면, 강제동원된 한국인의 개인청구권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제8차에 걸친 한일회담에서 보여준 협상 해결방식을 통하여 잠정적으로 손해배상금의 지불을 연기시킨 성격을 지닌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협정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1차적인 것은 그 협정의 문언이다. 하지만 그 문언의 객관적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 그 내용과 협상이 이루어지게 된 동기 및 경위, 당사자가 이 협상을 통하여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과 당사자들의 진정한 의사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맞도록 해석해야 한다.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한국과 일본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하여 양국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개인의 법적책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로 인하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1965년의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개인의 권리가 모두 소멸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한일회담의 협상과정을 살펴볼 때, 오히려 개인이 가진 손해배상청구권 문제가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유보된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개인이 배제된 채, 포괄적, 정치적으로 청구권 문제가 협의되었던 1965년 청구권협정 과정에서 개인의 청구권소멸에 대한 쟁점이 양측의 협상 내용과 목적의 필수적인 조항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135쪽

1965년 청구권협정 이후, 일본은 재산법 조치법 제144호를 제정하여 일본 내에서 그 국민들이 가지는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켰다. 이에 반하여 한국에서는 입법자가 개인들의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우리나라의 입법을 제정한 적이 없다. 1965년 이후 한국에서 제정한 「청구권 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과 그에 따른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 「대일민간청구권보상에 관한 법률」 등이 후속 조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입법목적을 살펴보면, 자금을 효율적으로 운용, 관리하기 위한 것임을 피력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청구권 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5조 제1항에서 일본국에 대한 민간 청구권은 청구권 자금으로 보상한다고 규정하였으나, 개인이 가진 민간청구권에 대한 규정은 없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39쪽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 가진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관련이 되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이 조약의 당사국이 아닌 한국을 구속하지 않는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의 논의에 대하여 1965년 청구권협정을 기준으로 봄에 있어서 1965년 청구권협정의 문언을 해석함에 있어서 개인이 가진 손해배상청구권은 협정 내용의 물적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청구권이 아니라, 특별한 불법행위가 있었던 경우에 그 개인이 입은 손해에 대하여 국가 대 국가로써 체결하는 조약으로 그 개인이 가지는 손해배상청구권을 개인의 동의 없이 포기할 수 없다. 일본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하여 원고들이 가진 손해배상청구권 자체는 인정할 수 있으나, 1965년 청구권협정에 따라 즉시 실효된 것이 아니라, 그 협정에 따라 일본 내에서 만든 재산조치법 제1조를 통하여 1965년 6월 22일로서 소멸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1965년 이후 제정한 입법 규정 어느 곳에도 일본 사기업에 대한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조항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한국 정부가 국내법을 시행함으로써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킨 경우라면 논의가 달라질 수 있겠으나, 일본과 달리, 한국 정부가 국내법을 통과시켜서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키지는 않았다. -142쪽

도쿄 국제군사재판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무후무하게 많이 열렸던 전범재판들 중에서도 유이한 국제 전범재판이었다. 그 후로 1990년대 중반 유엔 안보리가 구유고 국제형사재판소와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를 설치할 때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국제형사재판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미소 냉전대립 때문이었다. 게다가 서독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미국의 역내 반공 보루로 자리 잡으면서 전범들도 하나둘씩 풀려나 1958년 마지막 서방 관할 전범이 석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국제군사재판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극명히 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후자가 나치 범죄를 단죄한 정의의 심판으로 인정받고 학술적 연구가 끊이지 않는 데 비해, 전자는 최근 들어 학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본 우익으로부터는 “자학사관”을 심은 가혹한 승자의 정의였다는 이유로, 한국 등지에서는 거꾸로 히로히토 천황과 731부대, “위안부”, 식민지 범죄 등의 처벌이 부족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다. 이는 두 국제군사재판뿐만 아니라 전후 독일인 및 일본인 전범재판 일반에 대한 견해라고도 할 수 있다. -177쪽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와 비교했을 때 도쿄 국제군사재판소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도쿄 국제군사재판에 대한 평가도 승전국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승자의 정의”라던가 히로히토 불기소와 같은 미비점에 너무 천착하는 지나치게 단순한 평가가 많다. 1990년대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있었던 12·12 및 5·18 재판만 보더라도 검찰의 기소유예와 번복, 헌법소원과 취하, 사형선고와 감형, 최종 사면 등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법원이 한국 현대사에 대해 권위 있는 규범적 판단을 내렸고, 전직 대통령의 처벌을 통해 법의 지배 확립에 기여한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180쪽

포로학대에 대한 연합국의 경고와 분노는 포츠담 선언에도 잘 나타난다. 1945년 7월 미국·영국·중국의 3개국 대표가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항복 조건과 일본 점령지의 처리에 관하여 발표한 이 선언에는 일본 제국주의 지도세력의 제거, 전쟁 범죄인의 처벌, 연합국에 의한 점령, 일본 영토의 제한 등을 선언하고 있다. 특히 포츠담 선언 제10항에서는 전쟁범죄자의 처벌로써 연합국 포로들에게 행한 잔혹행위를 대표적 예로 들고 있다. 따라서 일본은 패전으로 항복하게 될 경우 그 어떠한 전쟁범죄보다 포로학대 범죄에 대해 엄격하게 추궁당할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또한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포로감시원들을 모집하였을 때는 이미 이러한 모든 국제적 정황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포로학대라고 하는 전쟁 범죄에서 책임을 모면할 궁여지책으로 식민조선과 대만의 청년들을 동원한 것이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191쪽

2012년은 한일 양국에서 정치적 리더십이 바뀌는 해였다. 특히, 2012년 9월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 입후보한 아베 신조가 고노 담화의 수정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파란이 예상되었다. 2012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어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한일 관계가 순조롭게 출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201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에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했던 아소 다로 부총리는 한일 간의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 과거 역사를 직시하고 상처 치유를 위해 서로 노력하자는 박 대통령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총리 경험자이기는 했지만 아소 부총리 가문과 한국은 역사적인 악연이 있다. 일제강점기 다수의 조선인을 끌어다 강제노동을 시켰던 아소 탄광은 그의 할아버지 소유였으며, 그 자신 2003년 도쿄대학 축제 강연회에서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원해서 했다고 말해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206쪽

한일 간 국장급 회담이 서울과 도쿄를 오가면서 계속되는 가운데 2015년 11월 2일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첫 번째 한일 양자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98분간의 회담에서 한일 관계의 최대 장애물인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고 한국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해결’돼야 한다는 박 대통령과 한국 측이 요구해 온 법적 책임은 1965년의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되었다는 아베 총리 사이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회담 후 ‘조기타결을 위한 협의 가속화’라는 합의내용이 발표되었을 뿐이라 두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의 전격적인 타결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해 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을 일본 측이 수용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한 방송이 보도한 대로 미국 국무부가 양측 외교장관이 구두로 발표한 합의내용의 문안에까지 관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SBS ‘그것이 알고 싶다’, 2017년 2월 25일 방송), 대통령과 총리의 결단 없이는 합의 자체가 불가능했다. -210쪽

12·28 합의로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하는 점에서도 한일 양측의 입장차는 크다. 양국 간의 모든 청구권 문제가 1965년의 청구권협정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의 견해는 종전과 변함이 없다. 2016년 4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12차례 개최되었던 한일 외교당국의 국장급 회담이 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해석상의 분쟁 해결을 위한 회담인지도 양국 정부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또한 우리 외교부는 12·28 합의로 타결된 것은 ‘한일 양자 간 외교 현안으로서의 위안부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이라 앞으로 이 문제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는 일본 측과의 괴리는 여전히 크다. -216쪽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를 역임했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지원단체, 나눔의 집만이 아니라 여성·역사학 분야 연구자 모임인 일본군위안부연구회와 위안부 합의에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설립한 ‘정의기억재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취임했다. 이들의 지지가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한국 최초의 여성 외교부 장관으로서 국민의 61%가 재협상 요구에 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본(『요미우리신문』, 2017년 5월 15일자)을 상대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우리 국민이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의 위안부 합의를 도출해내길 기대해보고 싶다. -221쪽

저자소개

저자 박홍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법학정치학연구과에서 법학박사(정치사상 전공)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 및 동양 정치사상을 전공하였으며, 저서로는 『山崎闇齋の政治理念』, 『삼봉 정도전-생애와 사상』이 있고, 번역서로는 『일본 정치사상사-17~19세기』,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 『마루야마 마사오-리버럴리스트의 초상』 등이 있다.

도서소개

한국과 일본, 역사 화해의 단초를 찾아서

2016년 한 해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간 양국 국민 약 740만 명,
중국과 미국에 이어 제3위의 무역상대국,
그럼에도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은 1965년, 13년 8개월이라는 사상 유례 없는 기나긴 교섭을 통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지난 50여 년 사이에 양국의 인적·물적 교류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일본 국민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1998년을 경계로 부정적인 방향에서 호감을 느끼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일본과의 경제력 격차는 크게 줄어들었다. 1970년 한국의 약 30배였던 일본의 GDP는 최근에는 4배가 채 되지 않아 일방적인 의존에서 상호의존 내지 협력관계로 변화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둘러싼 양국 간의 인식 차이로 한일 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했다. 현재 한일 관계의 토대가 된 것이 1965년의 국교정상화였으며, 이것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 통치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격투이기도 했다. 또한 후자는 아직도 여전히 양국 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다.
이 책에는 식민지 통치, 국교정상화, 재일한국인, 관동대지진, 일본에서의 전후보상 재판, 한국에서의 강제동원 재판, 도쿄재판과 한국인 B·C급 전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의 역사 문제를 생각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들이 망라되어 있다. 관련 분야를 오랫동안 천착해온 연구자들이 학술적이면서도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집필하도록 노력했다. 특히, 집필자 가운데 두 명은 일본인이다. 한 사람은 척박한 일본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전후보상 문제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지원해온 활동가이며, 다른 한 사람은 독일 현대사 분야의 권위자다.
한국에서는 독일과 일본이라는 두 패전국가가 어두운 과거 역사를 마주하는 데 대조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단적으로 말해 ‘반성하는 독일’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인식 틀이 그것이다. 일본인 독일 역사학자의 눈에 비친 독일의 전쟁책임 문제, 과거 극복과 기억을 위한 독일 사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그런 일본이 만들어낸 부(負)의 한일 관계사를 그려내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한일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문제들, 과거에서 현재 나아가 미래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살펴봄으로써 양국 간의 역사 화해의 단초를 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과거 역사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앙금을 해소하고 화해를 모색하기 위한 단초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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