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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사랑한 여성들

니체가 사랑한 여성들

  • Mario Leis
  • |
  • 한국문화사
  • |
  • 2015-04-20 출간
  • |
  • 232페이지
  • |
  • 152 X 225 X 20 mm /366g
  • |
  • ISBN 978896817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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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머리말]
칸트 이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고 괴테 이래 최고의 명문장가로서 간주되고 있는 프리드리히 니체는 한평생을 괴롭힌 편두통 때문에 항상 고요와 청량(淸凉)을 갈구했다. 그가 주로 한두 달씩 또는 6개월씩 머물면서 고요와 청량을 만끽하는 가운데 사유와 집필에 전념했던 곳은 알프스의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던 실스 마리아, 토리노 그리고 지중해 연안 산비탈에 산재해 있던 라팔로, 소렌토, 포르토피노, 독일의 작센주 전원도시인 타우텐부르크 등이다. 그는 계절에 따라 이곳들을 번갈아 찾아가는 방랑의 여정을 보여주곤 했다.
고독과 병고 속에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오지의 초옥에서 사유와 집필에만 전념했던 니체에게 자기의 사상을 이해하면서 철학함의 파토스Pathos를 조장시켜주는 정신적 반려는 삶의 오아시스였다. 神을 걷어차 버리고 자기초극에 사는 위버멘쉬?bermensch를 세상에 고지(告知)하는 철학적 사명을 고독과 병고 속에서도 실천에 옮기고자 자기의 생명을 모험에 걸었던 니체가 자기에게 창조의 의지를 고취하는 여성을 찾고자 했던 것은 위버멘쉬의 사상을 창출하는 데 수반되는 고뇌를 순화시키기 위한 철학적 전략이었던 것 같다.
자기의 철학함의 열정을 함께 불태우며 영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반자를 자기 곁을 스쳐 가는 여성들 속에서 찾고자 했지만, 도로(徒勞)에 그치고 말았다. 니체가 이러한 생각을 현실화시킬 수 없었던 것은 자기가 선망했던 여성의 차가운 외면 때문이거나 자기에게 강렬한 정열로 대쉬dash해오는 여성에 대한 니체 자신의 시니컬한 냉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니체 자신이 언표한 ‘구름 속의 번개’처럼 자기가 염원하고 소망하던 여성은 언제나 가까이 와서 마음을 헝클어놓고는 표표히 사라져 가곤 했다. 11년이라는 세월 동안 정신착란의 병자로 자기가 선망했던 약간의 여성들을 병적 환영 속에서 찾아 헤매다가 삶을 마감한 니체에게 여성들에 대한 사랑은 자기 홀로 일방적으로 그리워하고 염원했던 속칭 짝사랑이었다.
니체가 사랑한 여성들은 대부분 니체를 연인으로 생각했다기보다는 천재적인 철학자이자 철학적 지혜를 주는 한 사람의 사상적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존경을 니체는 연정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니체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좌절을 맛본 가운데 망치를 들고 그리스도교와 존재를 설정하는 형이상학을 때려 부순 ‘망치를 든 파괴의 철학자’의 길로 걸어갔다.
사랑의 좌절 속에 루 살로메의 논평과도 같이 ‘사막에서 홀로 절규하다가 도시에 나타난 황야의 사나이’로서 니체는 동시대 사람들에게서 철저히 외면된 채 오직 외톨이로서 사유와 집필로 일관한 고독하고 가련한 철학자의 형상을 근ㆍ현대사에 투영하고 있다.
그가 인류 역사에 던진 “神은 죽었다Gott ist tot”, 이 명제에는 생애 내내 고뇌했던 철학함의 전체가 용해되어 있다.
이 역서는 독일 지겐Siegen 대학의 마리오 라이스Mario Leis 교수가 저술한 Frauen um Nietzsche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직역하면 ‘니체 주변의 여성’이라고 표현해야 하지만, 책 내용을 고려하여 ‘니체가 사랑한 여성들’이라고 의역했다. 『니체가 사랑한 여성들』이 더 좋은 양서로 독자의 애독서가 되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 역서를 다듬어 나갈 것을 독자 제현께 약속드린다.
2015. 01
역자 정영도.

책속으로 추가
「인간은 단단히 자기 자신 위에 앉아야 한다. 인간은 용감하게 자신의 두 다리로 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전혀 사랑할 수 없다. 여자는 그것을 궁극적으로 너무나 잘 안다. 여자는 자기를 상실하고 단순히 객관적이 되어버린 남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6
그러나 니체는 전혀 철학적ㆍ객관적이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감성의 유혹에 쓰러지기도 했다.
니체는 여성들을 멀리하지 못했고, 아마도 남자들조차 멀리하지 못했을 것이다.7 그는 여성들을 강렬하게 감동시키곤 했다. 우리는 니체가 1865년 10월 이후부터 대학생활을 했던 라이프치히에서, 나중에는 니스 또는 게노아에 있는 사창가에서 매독을 몸에 끌어들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2.성에 대한 태도
니체는 자기의 저서 속에서 성애의 저의를, 즉 매춘의 합법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가 성에 대해 그리스도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믿는 것은 오해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는 성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신체에서 경험했던 시민사회의 성적 경직을 반대하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성적 개방을 지지한다.
“정결(貞潔)에 대한 설교는 반자연에의 공공연한 자극이다. 성생활에 대한 경멸, 즉 ‘불순’이라는 개념에 의한 성생활의 오염은 삶의 신성한 정신에 어긋나는 본래의 죄이다.”8
한평생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설치한 반자연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로서는 19세기의 사랑의 의미론을 폐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즐거운 지식』에서 ‘여성의 정결’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잠언은 여기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니체는 고상한 여성의 교육을 비판하고 있다.
“온 세계는 여성들을 가능한 한 성에 대해서 무지하도록 교육하고 심각한 수치감을 느끼게 하고, 성에 대한 시사적인 말이라도 나왔을 때에는 그녀들의 정신 속에서 극도의 초조와 도피감이 일어나도록 하는 데 양해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들은 결혼과 함께 마치 벼락에 맞은 것처럼 끔찍한 현실과 지식의 한가운데로 내동댕이쳐진다. ―더욱이 그녀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에 의해서.
사랑과 수치를 모순 속에서 느끼며, 아니 황홀, 희생, 의무, 동정 그리고 神과 동물의 예기치 못한 근린관계에 대한 경악, 그 이외 일체의 것을 단숨에 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사실상 영혼의 매듭이 지어진다. 인간을 인식한 가장 현명한 지혜의 동정적 호기심조차도 이 여성 또는 저 여성의 수수께끼의 해결과 해결의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을 알아맞히는데 적절하지 못하다. 그리고 끔찍하게 광범위하고 심화한 의혹이 난맥상으로 빠져 들어간 가련한 영혼을 흔들어 놓는다.
아니! 여성의 궁극적 철학과 회의가 바로 이 한 점에 닻을 던진다! ―뒤늦게 이전과 똑같은 깊은 침묵! 가끔 자기 자신 앞에서의 침묵, 자기 자신 앞에서의 눈감음.”9
이러한 영혼의 매듭을 니체조차도 풀 수 없다. 자기 시대의 성에 대한 거부감은 철학자의 비판에 대한 면역이다. 니체에게 이 성의 거부감은 그가 자기의 은밀한 욕구를 단지 비밀리에만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에 대한 니체의 경직된 태도는 자기 시대와 자기의 어린 시절의 사회적 도덕에 기초한다.10
1844년 10월 15일에 니체는 라이프치히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뢰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849년 7월 30일에 신교도의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 칼 루드비히 니체가 죽은 이후 가족이 1850년에 나움부르크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여섯 명의 여성, 즉 어머니 프란치스카 니체, 누이동생 엘리자베트, 할머니 에르드무테 니체, 결혼하지 않은 두 명의 고모 로잘리 니체와 아우구스트 니체 등의 예리한 감독 아래에서 성장했다. 이러한 육중주단(六重奏團)은 미네라고 불리던 파출부 빌헬미네 아르놀트에 의해 보충되었다.
여성들의 가정 지배와 아버지의 이른 죽음은 소년 니체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858년 이래 유명한 ‘김나지움 포르타’를 다녔던 니체는 1864년 여름에 『나의 삶』이라는 제목을 붙인, 비록 충분하지는 않지만, 시사하는 바가 큰 자서전을 썼다. 이 자서전에서 니체는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
“나는 내 어린 시절 가운데서도 가장 이른 유년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의 이른 유년기에 대해서 들었던 것을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기꺼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확실히 탁월한 양친에게서 태어났다. 뛰어난 아버지의 때 이른 죽음이야말로 한편으로는 훗날의 나의 삶에 대한 아버지의 지원과 지도를 나에게서 빼앗아 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실의, 즉 심사숙고의 맹아(萌芽)를 나의 영혼 속에 심었다고 확신한다. 아마도 그 이후부터 나의 전 발전이 남성으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의 폐해일 것이다.”11
그는 아버지를 열광적인 말로 변호했지만, 이와 반대로 여성의 가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이것은 놀라울 일이 아니지만, 자기의 가정에서는 엄격한 그리스도교적 규칙이 지배적이었다.
니체가 14세 때 김나지움 포르타의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을 때조차도 그는 더욱더 가족으로부터 엄격한 감시를 받았고, 엄격한 나움부르크(니체의 가문)의 도덕적 덕목에 충실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았다. 1863년이라는 발신 연도가 적힌 그의 고모 로잘리의 편지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네 의지가 언제나 인간의 질서와 神의 질서에 순종해야 하느니라! (그런데 그것은 물론 네 생애 내내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학생으로서 그렇게 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너는 감성의 힘을 정신의 힘과 경건한 하느님에게 봉헌하는 마음을 통해서 극복해야 할 것이다! 오! 나의 사랑하는 프리츠.
그것을 위해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너에게 함께하기를 기원한단다! (……) 만일 네 공부와 하느님에의 순종과 감정의 극복이 성공하자면 네 가슴 속에 하느님을 가까이하는 감정이 활성화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네가 충실한 하느님이시며 主님께서 너의 곁에서 도와주실 것을 확실히 말하기를!”12
니체는 자기를 선량한 그리스도교적 인간으로 만드는 이 훈련 프로그램을 항상 열심히 따랐다. 니체는 훗날 저서들 속에서 ‘인간의 질서와 神의 질서’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는 시종일관 ‘감성의 힘’을 더는 그리스도교적으로 억압하지 않았다. 그는 성적 육감적 과잉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니체가 이러한 기도에서 덮어쓰고 있던 가면들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는 삶이 진행되는 도상에서 여러 형태의 충동을 억제하고자 시도했다.

3.성의 승화
니체에게 성적 욕구의 승화는 물론 때때로 실현하는 데 힘든 것으로 체험되는 듯했다. 왜냐하면, 니체는 감성적 욕구를 자기의 내면에 체현한 나움부르크의 행동 규칙과 평형을 이루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양자 간의 충돌을 항상 합리적으로 비켜 나갈 수 없었다.
엄격한 그리스도교적 도덕이 자기를 묶는 것에 대해 니체가 강하게 저항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교적 도덕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시도했다.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카타르시스는 여기서는 가능하지 않다. 누구도 니체 이상으로 그것을 더 명백하게 인식한 사람은 없다. 16세의 김나지움 포르타의 학생으로서 니체는 1862년 부활절 휴가 때 쓴 「운명과 역사」라는 논문에서 이 딜레마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인상, 양친의 영향 그리고 교육으로 우리의 내면에 깊숙이 뿌리박은 편견을 도리 또는 단순한 의지로 쉽사리 근절시킬 수는 없다. (……) 자신의 오만과 만용의 감정, 그 모든 것은 우리 가슴 속의 고통스러운 경험, 슬픈 사건들을 낡은 순진한 신앙으로 다시금 환원시킬 때까지 미결정적인 투쟁을 감행한다.”13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니체는 결정적인 문제를 미래지향적인 측면에서 공식화하고 있다. 이성과 의지는 습관과 교육의 힘에 저항하는 어떤 기회도 가지지 못한다.
니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낡아빠진 감성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타개책을 탐색하고 있다. 왜냐하면, 심리적 부담이야말로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평화도 고요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아직도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14

그는 그 후 이 위기를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전략으로써 다소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문학의 연구에 도전했다.15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는 감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르타 김나지움의 학생으로서 니체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 대해 글을 쓰면서 그리고 그것을 번역하면서 나움부르크의 세계와 완전히 대조되는 이 세계에 접근했다. 니체는 자기의 교양 체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리고 있다.
“동시에 고전연구로 빠져 들어가는 나의 경향은 점진적으로 증대해 갔다. 나는 소포클레스, 에쉬로스, 플라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시, 심포지엄, 그리고 그리스의 서정시에서 받은 최초의 감명을 아주 즐거운 추억으로 회상한다.”16
그때 니체는 또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교적 神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즉 포도주와 명정(酩酊)의 神이면서 또한 성의 神이기도 한 디오니소스Dionysos로 알게 되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적 神을 차단함으로써― 그림자처럼 이 디오니소스를 따르고 있다.
1889년 1월에 자기의 정신붕괴 직전에 디오니소스를 따랐을 때 니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인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사티르가 되기를 선택하겠다.”17
철학함을 하고, 시를 짓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니체는 수십 년을 넘어 자기의 감성적 욕구와 지배를 실현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쓴다는 것은 그에게는 생활에 필요불가결한 것이 되고 있다. 1877년 7월 1일에 니체는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실존적 필연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 잉크는 끔찍합니다. 잉크를 주문했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잉크를 위조했고, 모든 식료품은 가짜이고, 잉크는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하나의 식료품입니다.”18
겨우 18세에 불과한 고등학생인 니체는 필기대에서 놀라운 것을 창작하고 있다. 이때 그는 그리스의 모범에서 벗어나고 있다. 1862년 7월 28일에 니체는 자기의 동급생인 라이문트 그라니에르에게 보낸 편지에 짧은 단편소설을 동봉하여 보냈다.19 이 단편소설에는 「다행증(多幸症)」20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예를 들면 괴테가 『파우스트 II』에서 소개하고 있는 바와 같은 휘몰아치는 다행증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이와 반대로 니체는 중대한 위기에 놓인다. 왜냐하면, 문학적 창작은 단지 화장실용 화장지에 적합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거실은 죽은 듯이 조용하다 ? 펜으로 종이 위에 긁적거리는 소리만이 있을 뿐이다 ? 왜냐하면, 나는 펜으로 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 내 앞에는 나의 검은 마음을 익사시키기 위한 잉크, 목을 베는 일에 익숙한 가위, 나를 연마하기 위한 원고, 그리고 실내용 변기가 있다. 건너편에는 수녀가 살고 있다. 나는 수녀의 정숙함을 향유하기 위해 종종 수녀를 방문한다. 수녀는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떤 점에서는 나 자신보다도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녀는 이전부터 이미 여위고 가냘픈 수녀였다. ?나는 의사였기에 그녀를 곧 살이 찌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독자는 니체의 암실에 하나의 시선을 ? 고대의 가면 없이, 속임 없이, 억제 없이 ? 던질 수 있다. 자살에 가까이 간 침울한 칩거자는 의학적 허구적 위장외투를 걸치고 수녀를 성폭행한다. 이와 같은 환상은 잘 교육된 목사 아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 충분하지는 않다. 경건한 부인의 오빠는 마지막 기진맥진할 때까지 유혹되고 있다.
“그녀의 오빠는 일시적인 결혼으로 그녀와 함께 동거했다. 그녀의 오빠는 뚱뚱하고 생기발랄했다. ‘나는 그를 시체처럼 여위게 만들었다. 그는 곧 죽을 것이다.’ 나에게는 유쾌한 일이다.”
동성애는 니체에 의하여 자주 논의된다. 예컨대 그는 플라톤의 『심포지엄』에 이유 없이 과장된 어조로 집중한 것이 아니다. 물론 니체는 자기의 「다행증」 속에 적당한 정도의 새디스틱한 환상을 플라톤적인 사랑의 이상과 혼합시키고 있다. 니체의 조각글은 자기의 내면적 삶에 있어 광범위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다행증이 가져다주는 고뇌로 괴로워했고 신음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척수결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반적인 편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하여튼 고갈된 골수는 지나칠 정도로 많이 행했던 자위행위의 표시였다.
그러나 니체의 성적 실험은 그의 프로테스탄트적인 양심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그가 자기의 소설 가운데 제1장을 쓴 이후 그것을 구토증을 느끼기 전에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는 이 사실을 그라니에르에게 편지로 알려주고 있다.21 그는 같은 편지에서 그라니에르에게 두 개의 성가를 제공하고 있다. 그 성가의 두 연(聯)은 다시금 神을 지향하는 고등학교 학생의 죄로 고뇌하는 영혼의 상태에 관한 정보를 주고 있다.

당신은 불렀다
주여, 당신의 옥좌 계단을 향하여
서두르기도 하고
지체하기도 한다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내 마음에 당신의 비추어짐이
와 닿을 때
아픈 내 마음 진실되리니
주여, 내 당신께 가리다

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황홀에 빠져
넋을 잃어
쓰라린 아픔에 겨워했다
당신은 아득히 먼 곳에서 있건만
당신의 비추어짐은 말없이
감동적으로
이따금 내 마음과 마주친다
이제 내 당신께 기꺼이 가리다22

그러나 니체는 그다음 해에 몸이 쇠약해졌다. 그가 이성에 관하여 말하면서 때때로 이성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은 아마도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이 사람을 보라』에 나와 있는 기괴할 정도로 마음을 끄는 문장들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내가 여자를 알고 있다는 추측을 감히 해도 좋을까? 이것은 나의 디오니소스적인 결혼지참금에 속한다. 누가 알까? 아마도 나는 최초의 영원한 여성 심리학자일 것이다. 그녀들은 모두 나를 사랑했다. ? 이것은 옛이야기. 사고를 당한 여자, 어린아이의 생산을 위한 도구가 없는 ‘해방된 여자’는 배제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완전한 여자는 자기가 사랑할 때 갈기갈기 찢는다. 나는 이러한 유혹적인 광란의 여자를 알고 있다. ? 아, 얼마나 위험하고 살금살금 걷는 지하의 자그마한 맹수인가! 그와 동시에 얼마나 즐거운가!”23
니체가 여성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행동했는가는 장차 이와 유사한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목차

옮긴이 서문 ㆍ v

1. 니체를 둘러싼 여성들 / “여성들은 모두 나를 사랑했다” 1
2. 사랑의 담판 / “운명의 여성들을 찾아서” 19
3. 코지마 바그너 / “아리아드네 여왕, 나의 연인” 45
4.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와 마리 바움가르트너 / “모성애에의 염원” 75
5. 루 안드레아스-살로메 / “나는 이런 유형의 영혼을 선망했다” 103
6. 여성들에 둘러싸인 니체의 인기 / “사람들은 여성해방운동을 잘 저지했다” 133
7. 프란치스카 니체 /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149
8. 엘리자베트 푀르스터 니체 / “오빠는 제1순위의 권위!” 177

9. 부록 연대표 199증언 203참고문헌 207 찾아보기 222

저자소개

저자 마리오 라이스(Mario Leis)는 1963년 독일에서 출생. 대학에서 철학과 독일문학을 연구했다. 현재 독일 지겐대학 인문학부 독문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문학에 있어서 스포츠』, 『20세기의 인식』, 『아프로디테 신화』 외 다수가 있다.

도서소개

니체가 염원하고 소망하던 여성!

니체에 있어 고독, 병고, 여성, 실스-마리아, 나움부르크, 타우텐부르크는 그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키워드이다. 특히 니체가 관심을 가졌거나 매료되어 접근했던 여성들 또는 니체의 자유정신에 매료되어 모여들었던 여성들과 가진 사귐, 대화, 사건 그리고 이별에 얽힌 에피소드에 대한 분석은 니체의 ‘철학함’에의 이해에 있어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예컨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비롯한 대부분의 저서에 나타나있는 잠언, 은유, 상징은 그의 고독과 병고, 특히 여성들과의 사귐에서 생긴 고뇌에 대한 이해 없이는 풀리지 않는다. 여성들과의 열애의 결과로 나타난 고뇌와 절망은 서양의 전통적인 가치와 사상에 대한 부정의 단초로 발전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여러 여성들과의 사귐 또는 열애를 샅샅이 파헤치고 있는 이 책은 니체 철학사상의 은유 또는 미스터리를 푸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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