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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학의 저력

조선 역사학의 저력

  • 오항녕
  • |
  • 한국고전번역원
  • |
  • 2015-08-31 출간
  • |
  • 260페이지
  • |
  • 148 X 210 X 20 mm
  • |
  • ISBN 9788928403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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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출간 의의

조선 역사학의 저력, 우리의 역사를 말하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조선 후기의 역사가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편찬한 역사서이다.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우리 역사를 강목체綱目體로 정리하고 여기에 저자 본인의 견해와 평가를 덧붙여 만들었다. 『조선 역사학의 저력 -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동사강목』의 구성과 서술 방식, 주요 내용, 수준과 가치, 저자 안정복의 역사 인식 등을 알기 쉽게 차근차근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조선 역사학의 높은 수준과 저력을 확인하는 동시에 우리의 삶에서 역사와 역사서가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저자 오항녕은 역사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자 인간 본질 그 자체’로 보면서,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조선의 현실과 한계를 성찰하고 문제 해결 방안을 고민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안정복의 성찰과 고민의 결과물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그 역사적 의의를 밝혀낸다.
저자는 역사에 대한 인식과 올바른 역사 서술 방식에 대한 견해가 시대마다 달라짐을 밝히면서 현대 역사학의 관점과 『동사강목』 편찬 당시의 사회 환경, 역사 인식을 균형 있게 다루며 역사 서술의 원칙을 짚어 나간다.
이 책의 1부 “조선 역사학의 저력을 보여준 책, 『동사강목』”에서는 역사 기록의 원칙과 『동사강목』의 기록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본다. 1장에서는 『동사강목』의 서문을 통해 안정복이 역사서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본다. 2장에서는 범례를 통해 안정복이 주장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과 평가의 기본 원칙에 대해 분석한다.
2부 “『동사강목』으로 다시 보는 우리 역사”에서는 『동사강목』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과 안정복의 논평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분석한다. 이를 통해 안정복의 역사 인식 및 역사 서술의 원칙이 무엇인지, 그것이 『동사강목』의 역사 서술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본다. 1장 ‘민족’에서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관련 기록을, 2장 ‘정치’에서는 폭정과 망국, 환관 제도 등을, 3장 ‘민생’에서는 경제 정책, 복지 제도, 노비 제도 등을, 4장 ‘사상’에서는 불교 관련 기록을, 5장 ‘국제’에서는 외교 관련 기록을 살펴본다.

재야의 선비 안정복, 역사에 탐닉하다
안정복의 집안은 당시 조정에서 세력을 잃었던 남인南人이었기에 관직에 나아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안정복은 좌절하지 않았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 여유로운 시간에 그는 모든 역량을 학문과 저술에 집중한다.
안정복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경학經學과 역사歷史, 시詩나 예禮 이외에 음양陰陽·성력星曆·의약醫藥·복서卜筮에 대한 서책 및 손자孫子·오자吳子의 병서兵書, 불가佛家·도가道家의 서책, 패승稗乘 패관이 기록한 역사물이나 소설小說에 이르기까지, 글자가 생긴 이래 나온 문헌이란 문헌은 두루 다 구해 읽어 보았다. 그러다 보니 15세 무렵부터 이미 박식하다고 소문이 난다.
그중에서도 역사에 대한 관심이 특히 많아 어릴 때 이미 역대 제왕의 계통을 그린「치통도治統圖」와 역대 성현의 계통을 그린「도통도道統圖」를 직접 만들며 역사 인식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관심이 결국 『동사강목』의 저술로 이어진다.
순암이 『동사강목』을 편찬한 시기는 45세 때인 1756년영조32부터 1759년경 사이로 알려져 있지만 간단한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로 계속 교정과 수정을 반복한다. 1778년이 되어서야 정리된 필사본이 완성된다. 이는 워낙 분량이 방대하다 보니 종이가 많이 필요한데 막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여유가 없다 보니 늦어진 것이다. 그러다 정조 임금과의 만남이 다시 수정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동궁 시절에 정조는『동사강목』에 대해 듣고 순암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안정복은 1781년에 필사본을 다시 수정하여 정조에게 올렸고, 17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금 우리가 보는 형태의 『동사강목』이 완성된다.
『동사강목』은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이다. 안정복은 이어서 바로 『열조통기列朝通紀』 편찬을 시작한다. 이 책은 『동사강목』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지만 순암이 남긴 귀중한 역사서 중 하나이다. 총 25권인 『열조통기』는 실록 같은 편년체 역사서로 조선 건국에서 영조 대까지를 다룬 책이다. 그러나 편년체 방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 주요한 사건을 연도별로 편집하면서도 그와 관련된 사실이 있으면 비록 후대의 것이라도 함께 수록하여 이해를 도왔다. 『동사강목』과 『열조통기』, 두 책의 저술을 통해 안정복은 단군조선에서부터 자신이 사는 당시까지 모든 시기의 우리 역사를 다시 쓴 것이다.

왜 역사를 기록하는가?
왜 역사를 기록하는가? 안정복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천하에 하루라도 역사 기록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어지러운 때에도 역사 기록을 멈춘 적이 없었다. 춘추 시대의 여러 나라나 동진東晉과 서진西晉 사이의 여러 나라의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혼란기에도 그랬으니, 평상시야 어땠겠는가? (중략) 그런데 후세에 야사를 금지하면서부터 수십 년만 지나도 선행과 악행의 증거가 모두 없어져 악을 행하는 자가 꺼리는 것이 없게 되고,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君子에게는 불행이요, 소인小人에게는 다행이란 것이다. 『동사강목』 제13하

안정복은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선행과 악행의 증거를 남기고 악을 행하는 자들과 난신적자들이 꺼리고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안정복의 인식을 ‘떠든 아이 효과’로 설명한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떠들던 아이들도 반장이 나와서 이름을 적으면 조용해지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이름을 적는 행위만으로도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이름을 적어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서 역사기록의 효용을 찾는 것을 동아시아 유가의 전통으로 본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전통이 다른 역사기록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저자는 동아시아에서 ‘역사’라는 말은 ‘기록 행위’와 ‘역사 서술’의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고 하면서 실록을 마치 근대 역사 서술의 결과물인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 이 때문에 시작된다고 말한다. 기록 행위는 어떤 매체나 방식을 통해 경험을 적어서 남기는 것이고, 역사 서술은 그 기록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일기 같은 기록 행위의 결과인 실록은 ‘한국사 교과서’와 같은 역사 서술의 결과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사강목』은 어디에 해당할까?

『삼국사기』는 소략하면서 사실과 다르고, 『고려사』는 번잡하면서 요점이 적고, 『동국통감』은 범례가 많이 어그러졌고, 『여사제강』과 『여사회강』은 필법筆法이 더러 어긋난 경우도 있다. 오류가 그대로 답습 된 것은 모든 책이 비슷하였다. 내가 그것을 읽고 개탄스러워 마침내 바로잡을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 중에서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언급한 사실을 널리 취하여 주자朱子가 만든 원칙과 방법에 따라 한 질의 책을 만들었다. 『동사강목』 「서序」

안정복은 이전에 나온 역사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주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하면서 세운 역사서술의 원칙과 방법에 따라 새로운 역사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자치통감강목』은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史書이면서, 주자가 새롭게 창안한 ‘강목체’를 사용한 사서이기도 하다. ‘강목체’ 사서는 간추린 핵심 내용 또는 해당 사실의 제목인 강, 강의 원인과 결과 및 정황 설명인 목, 그리고 편찬자의 고증이나 평가를 기록한 사론史論으로 구성된다. 주자는 강목체로 역사기록의 큰 뼈대를 만들고, 18범주의 [범례]를 통해 세부적인 서술의 원칙을 규정하였다. 이처럼 강과 목, 범례와 본문 기사, 강목과 사론을 유기적으로 조합하는 방식은 사실대로의 기술과 역사적 평가라는 역사학의 과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저자는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저술하면서 큰 틀은 주자의 방식을 따르되 우리 역사에 맞는 새로운 역사서술의 체계를 세웠다고 하고, 『동사강목』 [범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동사강목』만의 역사서술 원칙과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동사강목』으로 다시 쓴 우리 역사
2부에서 저자는 『동사강목』의 내용을 안정복 이전의 역사 인식이나 현대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와 비교하면서 안정복의 역사 인식이 드러내는 특별한 성격과 의의를 보여준다. 그중 우리 역사의 기원, 즉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단군이 먼저 나와 나라를 다스리고, 기자가 처음으로 문물을 흥성하게 하였으니, 각각 1천여 년 동안의 신묘하고 성스러운 정치가 사라져서는 안 되는데, 『동국통감』에서 “역사서에 전하지 않아 외기에 편집해 실었다.”고 하였다. (중략) 단군과 기자에 관한 사실이 사라지기는 하였으나, 어찌 이런 경우와 동일하게 다룰 수 있겠는가? 『동사강목』 [범례]

안정복은 『동국통감』에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단군 조선과 기자 조선을 외기에 실어 역사가 아닌 전설이나 신화 성격의 이야기로 치부한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우리 역사의 가장 처음에 단군과 기자의 사적을 기록했다. 저자는 안정복의 이러한 역사 인식을 두고, 그가 중국에서 온 기자가 세웠다는 이유로 기자 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안정복은 단군 조선에 대한 기록이 역사적으로 명백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시대가 앞서는 단군보다 기자를 먼저 서술하고, 단군 조선에 대한 기록을 매우 신중하게 다루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안정복에게서 합리적인 역사학자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하면서도, 나름의 역사적인 의의를 가질 수 있는 단군 관련 신화와 전설을 누락시킨 것에 아쉬움을 표한다.
저자는 같은 방식으로 ‘민족’, ‘정치’, ‘민생’, ‘사상’, ‘국제’ 등 5개 주제와 관련된 『동사강목』의 기록을 분석하여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우회적으로 제시되는 안정복의 역사 인식을 꼼꼼히 살피고 그 의미를 설명한다. 백성들에게는 너그럽게 권력을 잡은 신하들에게는 엄격하게 법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 주장, 노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 허황된 미신과 소문이 사회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 경계한 것, 적에게 대항할 힘을 갖추지 못한 채 주장하는 화친이 결국 농락과 능멸을 불러온다고 한 주장 등, 예리하고 공정한 시선으로 각종 역사적 사건과 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낸 안정복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책속으로 추가

오래전부터 초등학교 교실에 가 보면 칠판 한 구석에 ‘떠든 아이’라고 쓰고는 그 아래 이름을 적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장 같은 아이가 나와서 이름을 적으면 그때까지 떠들던 아이들이 조용해지기 시작합니다. 칠판에 이름을 적는 행위만으로도 교실 안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지요. 저는 이 현상을 ‘떠든 아이 효과’라는 말로 설명하곤 합니다.
대체로 이름을 적는 방식은 동아시아 유가 전통에 가깝습니다. 맹자의 말대로 난신적자를 두렵게 만들었다는 『춘추』의 전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몇 가지 역사 기록을 함께 볼까요?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져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사관이 모르게 하라.” 『태종실록』 4년 2월 8일

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이 춘추관에 가서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에게 사적으로 부탁하여 전에 납입한 사초史草를 꺼내어 고쳤다. 변계량은 사관들에게 외부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세종실록』 6년 12월 20일

이날 이현로李賢老가 승정원에 이르러 일기를 보고서 ‘뇌물 받은 관리[贓吏]’란 두 글자를 고쳐 줄 것을 청하니, 주서注書가 그 말에 따라서 ‘중죄重罪’로 고쳤다. 『문종실록』 2년 5월 1일

역사에 들켰습니다.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태종의 말은 사관이 듣고 실록에 적었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변계량의 경계 또한 아무런 효과도 없었습니다. 『승정원일기』에서 자신의 죄를 바꿔 달라 한 이현로의 청탁은 실록에 실려 6백 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암이 ‘찬적’을 기록하고 ‘옳고 그름의 기준’을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 ‘제1장 역사, 기록의 힘 : 역사 기록의 효용’ 중에서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사史는 기록 행위[Documentation]와 역사 서술[Historiography]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기록 행위는 어떤 매체나 방식을 통해 경험을 적어서 남기는 것이고, 역사 서술은 그 기록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둘 다 역사지만 대체로 근대 역사학 분과에서는 후자를 역사학으로 치고, 전자는 기록학·기록 관리학·문헌 정보학·도서관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오해도 여기서 시작됩니다. 실록을 마치 근대 역사 서술의 결과물인 것처럼 이해하는데, 실은 하루하루의 일기 같은 기록 행위의 결과입니다. 날짜, 날씨가 나옵니다. 서로 연관이 되기도 하지만, 연관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사실과 사건, 오고 간 문서가 차례차례 차곡차곡 쌓인 기억의 기록입니다. 내가 저녁에 쓰는 일기를 나라 차원에서 쓴 결과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편찬’이라는 말을 썼던 것입니다.
반면 ‘한국사 교과서’는 역사 서술의 산물입니다. 순암의 말에도 ‘국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동사강목』도 ‘국사의 하나’입니다. 기록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역사, 기록의 힘 : 기록 행위와 역사 서술’ 중에서

순암은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범례凡例]에 따라 자신의 책도 ‘동사강목’으로 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범례는 역사 편찬의 원칙과 기준을 말합니다. 주자가 상세한 [범례]를 통해 『자치통감강목』의 체제를 잡았듯이 순암도 [범례]를 통해 『동사강목』의 체제를 세웠습니다.

예전에 편찬된 책을 고찰하면 모두 의례義例 범례가 있으니, 마치 법률에 판결의 기준이 있고 예와 음악에 의식과 절차가 있는 것과 같다. 더구나 역사학 자료는 내용이 많고 복잡하다. 따라서 요지를 밝히고 범례를 세워 일관되게 따르지 않으면 저술의 취지를 밝힐 수 없고 권장하거나 경계하는 의도를 전할 수 없다. 그래서 주자가 『자치통감』에 내용을 덧붙이거나 줄여서 『자치통감강목』을 만든 후 [범례] 1권을 지어 책을 펼치면 사안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한눈에 환히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 ‘강목, 기록의 방식 :『자치통감강목』에 따라 [범례]를 만들다’ 중에서

동방의 옛 기록 등에 적힌 단군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허황하여 이치에 안 맞는다. 단군이 처음 등장했을 때 분명 그에게 신성한 덕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좇아서 임금으로 삼았을 것이다. 예전에 신성한 이가 태어날 적에는 워낙 남들과 다른 데가 있긴 했지만, 어찌 이처럼 심하게 이치에 안 맞는 일이 있었겠는가?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도 다 불가佛家의 말이다. 신라·고려 때에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폐해가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동사강목』 제1상

순암은 기자에서부터 『동사강목』을 시작하였습니다. 시대가 앞서는 단군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순암은 합리적인 역사학자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강綱에는 기자에 대한 사실을 기술하고, 단군에 대한 기록 가운데 전해오기는 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은 목目에 수록하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이어 단군에 대한 기록 가운데 사실인 내용은 다시 강에 수록하였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按’이라는 역사 평론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언급했습니다.
- ‘민족 : 이 땅의 역사, 기자 조선’ 중에서

벼슬아치가 뇌물을 탐하는 근본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총애받는 신하가 권세를 부리는 것이요, 하나는 권력 잡은 신하가 명령을 독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종·명종이 임금이 되었을 때 뇌물이 관청에 넘쳐 났고, 최충헌이 신하가 되어서는 관리의 파면이 그의 집에서 사사로이 행해졌다. 무능한 무리가 조정에 떼로 등용되고, 어진 선비는 침체되어 버림받아서 마침내 백성은 흩어지고 나라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강도나 살상 따위는 사소한 죄라도 용서하지 않으면서 재물을 탐하는 벼슬아치가 국법을 어겨 온 나라가 해를 입는데도 그냥 내버려 두고 문책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통탄할 일이다. 『동사강목』 제10하

순암은 동시에 권력을 가진 신하들에 대해서는 다른 형정의 원칙을 요구하였습니다. 백성에게는 너그럽게 해야 하고, 먹고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며, 가르치지 않은 상태에서 형벌을 시행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신하들에게는 엄격한 법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 ‘정치 : 형정의 운용을 말하다’ 중에서

노비의 신분을 대대로 이어받게 하는 우리나라의 법은 실로 왕도 정치에서 차마 못할 일이다. 어찌 노비 문서에 한번 들어가면 백세토록 면치 못한단 말인가? 옛날의 노예는 모두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 종으로 가게 된 자이거나, 도적질을 하다 잡힌 오랑캐들이었다. 그러나 처벌의 효력은 본인에게만 미쳤지 자손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어찌 우리나라 법과 같았던 적이 있겠는가?
『동사강목』 제6상

순암은 전쟁 포로나 죄를 지은 자를 노비로 삼는 일은 있을 수 있다고 하면서도, 같은 사람끼리 사람을 재물로 삼는 이치는 없다고 한 유형원과 마찬가지로 노비 제도의 운용 방식에 대해서는 극력 비판하고 있습니다. 노비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비 제도를 매우 제한적으로만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애에 바탕을 둔 무척 가치 있는 인식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민생 : 노비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다’ 중에서

임오년(682)|신문왕 2년| 여름 5월. 만파식적을 만들었다.
해관海官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작은 산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집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것을 가져다 피리를 만들어서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내리고 장마가 졌을 때에는 개며, 바람이 불 때에는 고요해지고 파도가 심할 적에는 잔잔해져서 ‘만파식적’이라고 부르며 나라의 보배라고 일컬었다.
천지의 도는 오직 성誠뿐이다. 성은 실實이니, 일과 관련되면 실리實理가 되고, 쓰이게 되면 실사實事가 된다. 실리를 밝혀서 다른 의혹을 없애고, 실사를 행하여 거짓된 습성을 없애는 것이 군자의 도리이다. 이것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다.
신라 때에는 유학을 제대로 알지 못해 요사스러운 이야기가 횡행하여 사람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혔고, 방만하고 황당함이 습성처럼 되었다. 한 사람이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내면, 여러 사람이 떼 지어 일어나 부화뇌동하였고, 심지어 온 나라가 휩쓸리다시피 하여 이런 일이 실제 있는 줄로 알기도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 주었다는 진평왕의 옥대玉帶와 신문왕의 만파식적 따위가 바로 이런 것이다. 『동사강목』 제4하

불교의 ‘황당한 거짓말’은 비판을 받습니다. 만파식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연 현상과 피리 소리는 과학적 연관성이 없습니다. 순암의 표현대로라면 불교의 교리는 내실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실은 진실하여 거짓됨이 없는 것, 바로 성誠에 근거를 둡니다. 자연 현상과 피리 소리 사이에는 성이 없는 것입니다. 우연히 그럴 수는 있지만, 인식할 수 있거나 사람들이 배워서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 때문에 순암은 불교를 격물·치지·성의·정심에 맞는 학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 사상 : 유가의 눈으로 불교를 비판하다

계사년(993)|성종 12년| (중략) 서희徐熙가 거란의 진영으로 가자, 거란이 철군하여 북쪽으로 돌아갔다.
서희가 외교 문서를 받들고 소손녕의 진영에 가서 통역에게 상견례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보게 하였다. 소손녕이 말하였다.
“나는 큰 나라의 귀한 사람이니 뜰에서 절을 하라.”
그러나 서희가 대답하였다.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는 뜰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이 예의지만,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나 보는 자리에서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상견례 문제로 두세 차례 말이 오갔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서희는 화를 내고 돌아와서는 관소館所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소손녕은 마음속으로 남다르게 여기고는 곧 대청에 올라와서 상견례를 행하도록 허락하였다. 서희가 군영 문에 당도하여 말에서 내려 들어가 소손녕과 뜰에 마주 서서 인사하고 대청에 올라가서 상견례를 행한 다음 동서로 마주 대하고 앉았다. 소손녕이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 땅을 갉아먹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니, 이 때문에 와서 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땅을 떼어 바치고 조회를 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서희가 말하였다.
“아니다. 우리나라는 옛날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도읍을 평양에 정하였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의 경내에 있는데, 어찌 우리더러 갉아먹는다고 하는가? 더구나 압록강 안팎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다. 조빙朝聘을 못하는 것은 실로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이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서희의 말씨와 낯빛이 비분강개한 모습이었다. 소손녕이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자기 임금에게 사실대로 아뢰자 거란주契丹主가 말하였다.
“고려가 이미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니, 군사를 철수하라.”
일단 싸워 보고 화친을 요구해야 화친이 이루어질 수 있다. 만약 적을 두려워하여 화친만을 주장한다면, 적에게 온갖 농락과 능멸을 당할 것이다. 이때 만약 대도수大道秀의 전승戰勝과 서희의 굽히지 않는 의지가 없었더라면 화친이 성사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적의 무한한 요구를 채워 주자면 갖은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이는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하다. 『동사강목』 제6하

순암은 거란과 일전을 벌일 각오로 담판에 임한 서희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적을 두려워하여 화친만을 주장한다면 적에게 온갖 농락과 능멸을 당할 것이라는 통찰이 깔려 있는, 자존심을 지킨 판단이었습니다.
- 국제 : 소국의 능동적 외교 전략

목차

머리말_역사 공부 안 해도 된다, 다만
동사강목을 읽기에 앞서_역사가 안정복

제1부 조선 역사학의 저력을 보여준 책, 『동사강목』
제1장 역사, 기록의 힘
- 『동사강목』 서문
- 역사 편찬에서 중요한 세 가지
제2장 강목, 기록의 방식
- 역사학도 역사성이 있다
- 『자치통감강목』에 따라 범례를 만들다

제2부 『동사강목』으로 다시 보는 우리 역사
제1장 민족
- 이 땅의 역사, 기자 조선
- 단군 조선에 대한 인식
- 기자의 8조 금법
- 단군 이후 역사 전개에 대한 견해
제2장 정치
- 정치 활동에 주목하다
- 무리한 궁궐 공사를 비판하다
- 나라가 망할 때는 반드시 조짐이 있다
- 환관의 폐단을 지적하다
- 형정刑政의 운용을 말하다
- 국왕과 세자의 관계를 헤아리다
제3장 민생
- 경제 정책을 논하다
- 복지 제도를 살피다
- 나라는 이익을 탐하지 않는다
- 노비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다
제4장 사상
-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 불교의 폐해를 밝히다
제5장 국제
- 대외 관계 서술의 원칙
- 주체적 사대가 가능하다
- 능동적 외교 전략의 조건

참고 자료
사진 자료 제공처

저자소개

저자 오항녕은 고려대학교에서 조선시대 사관 제도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현재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명사의 관점에서 조선시대를 공부하고 있으며, 인간의 기억과 시간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고전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조선시대 학자의 문집, 추안推案 등 역사 기록을 번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 기축옥사의 기억과 당쟁론』, 『밀양 인디언, 역사가 말할 때』,『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 『조선의 힘』, 『기록한다는 것』,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朝鮮初期 性理學과 歷史學 - 기억의 복원, 좌표의 성찰』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대학연의』, 『사통』, 『영종대왕실록청의궤』, 『문곡집』, 『존재집』 등이 있다.

도서소개

『조선 역사학의 저력』은 조선 후기의 역사가 순암 안정복이 편찬한 역사서인 《동사강목》의 구성과 서술 방식, 주요 내용, 수준과 가치, 안정복의 역사 인식 등을 알기 쉽게 차근차근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조선 역사학의 높은 수준과 저력을 확인하는 동시에 우리의 삶에서 역사와 역사서가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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