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들은 가장 알고 싶은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알지 못하는 것마저도 무엇이든지 알고 있다고 무심코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이렇듯 무심히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삶의 여행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속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보이지 않은 채로 여행을 하고 있는 중생은 ‘치암(癡暗)’, 즉 어리석고(癡) 깜깜(暗)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깜깜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생들에게 성불이라는 최상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메시지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법화경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경전이며 최고의 공덕경이라고 예로부터 일컬어져 왔다. 왜냐하면 법화경에는 성불을 하려거든 육바라밀을 완성해야 하며, 특히 보시바라밀을 통해서 공덕을 쌓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덕은 쌓는 것이지 그 대가를 바라고 보시를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법화경은 처음에는 재보시(財布施)를 설하고 있지만 곧바로 법보시(法布施)가 제일임을 강조 하고 있다. 즉 이것이 수지(受持)ㆍ독(讀)ㆍ송(誦)ㆍ해설(解說)ㆍ서사(書寫)이다. 다시 말해 법화경을 듣(聞)거나, 보(見)거나하여 받아드리는 것이 수(受)이고, 이것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이 유지(維持), 즉 지(持)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법화경을 듣는 것(聞法)을 성불의 첫 단계의 공덕이라고 한다. 그래서 “약유문법자(若有聞法者) 무일불성불(無一不成佛)” 즉 법화경을 듣기만 해도, 성불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법화경을 듣거나 보기만 해도 여러분은 모두 다 성불할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직은 이르다. 공덕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공덕이란 바로 읽어주고, 외워서 들려주고, 해설해주고, 자기가 쓰거나 남을 시켜 써서 남에게 주어야 한다는 여설수행(如說修行)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요즘 서사, 즉 사경하는 불자가 많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이 쓰기는 하는데 남을 위해 사경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보시공덕과는 아득히 먼 일이다. 공덕은 남을 위해야만 되는 것이지 자기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무공덕이다. 소위 말하는 소승적인 공덕이지 대승의 공덕은 아니기에 법화경 정신과는 위배되므로, 성불과도 거리가 멀다고 아니 할 수 없다. 혹시 내 글씨가 나빠서 차마 남에게 줄 수 없다고 실망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경우에는 자기가 사경했던 책을 보내주면 된다. 즉 이것이 남을 시켜 쓴다는 것이다.
노납은 일찍이 법화도량으로 창건한 무설정사를 비롯하여, 동산반야회, 자비행회, 묘법사, 묘원사, 대구, 부산, 제주 등지에서 수없이 법화경을 강설했을 뿐만 아니라, 주간불교신문, 현대불교신문, 우리불교신문 등의 지상을 통해 강설해 왔다. 저서로는 『법화경입문』, 『법화삼부경』, 『새 우리말 법화경』, 『법화경 이야기』, 『영원한 생명의 노래(법화경개설)』, 『관무량수경강설』, 『승만경』 등을 펴내 왔는데, 이 중에서 『새 우리말 법화경』은 알기 쉽게 의역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구마라집 번역의 한문에 입각하여 새로이 『신역 묘법연화경』을 상재하게 되었다. 아무쪼록 많은 사람이 읽어서 널리널리 전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