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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 박희병
  • |
  • 돌베개
  • |
  • 2010-08-30 출간
  • |
  • 311페이지
  • |
  • 153 X 224 mm
  • |
  • ISBN 978897199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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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이 책은 선귤당(蟬橘堂) 이덕무(李德懋)가 연암 박지원의 기문(奇文) 10편을 뽑아 비평을 하고 서문을 달아 엮어낸 비평집『종북소선』(鐘北小選)에 대한 연구서이다. 『종북소선』을 1차 자료로 삼아, 조선 시대 최고의 비평가 이덕무의 면모 그리고 연암 박지원과 선귤당 이덕무의 고도의 지적 대화를 정밀하게 구현해냈다.
『종북소선』은 지금껏 박지원의 자찬(自撰) 산문집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하지만 서울대 박희병 교수는 그와는 다른 주장을 제기한다. 박 교수의 연구 결과, 『종북소선』은 이덕무가 직접 박지원의 글 중에서 기문을 가려 뽑고 비평을 붙여 엮어낸 자찬 비평서라는 것이다. 이 책이 이덕무의 자찬 비평서라는 근거는 이 책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종북소선』은 학계에 그리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이 아니며, 본격적인 연구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 비평사와 정신사에서 대단히 주목해야 할 문제적 저작이다. 또한 문인 이덕무의 조선 시대 최고의 산문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저작이다.
이에 돌베개는 이덕무의 평선서(評選書) 《종북소선》의 국역본 『종북소선』(부록으로 영인본 첨부)을 출간하고, 이 책에 대한 연구서인 『연암과 선귤당의 대화』를 동시에 출간함으로써, 이덕무의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의 미학적 깊이와 통찰력, 고도의 정신적 사유를 조망하고자 한다. 또한 중세시대 비평의 미학과 근대비평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작가와 비평가 간의 고도의 정신적 대화를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이덕무의 비평서 《종북소선》

《종북소선》은 선귤당(蟬橘堂)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글 10편을 뽑아 평점(評點)을 붙인 필사본 책이다. ‘평점’은 평어(評語)와 권점(圈點)을 말한다. ‘평어’는 논평한 말이고, ‘권점’은 원권(圓圈)과 방점(旁點)을 말한다. ‘원권’은 글 옆에 친 동그라미, 방점은 글 옆에 찍은 점을 말한다.
《종북소선》은 대전의 박지원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책인데, 1987년에 처음 학계에 공개되었다(현재는 원자료의 촬영본만이 남아 있고, 원자료는 그 종적이 묘연하다).
‘종북소선’(鐘北小選)이란 책 이름에서 ‘종북’은 종각(鐘閣)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당시 이덕무는 지금의 탑골공원 일대인 대사동(大寺洞)에 집이 있었으며, ‘종북’은 그의 거주지를 가리킨다. ‘소선’은 작은 선집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종북소선’이라는 책명은 ‘이덕무가 엮은 작은 선집’을 의미한다.
이 책의 글씨는 모두 이덕무의 친필이다(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덕무의 친필본 《영처고》와 비교해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덕무는 박지원의 작품 10편을 뽑고 이를 필사한 뒤, 거기에 권점을 붙이고, 구두점을 찍고, 여러 가지 형식의 평어를 붙였다. 글자의 한 필획 한 필획은 물론이려니와, 권점 하나, 구두점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전체 서문을 썼다. 이 책에 쏟은 이덕무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종북소선》에 대한 논란: 《종북소선》은 누가 만든 책인가?

《종북소선》은 이덕무의 서문 1편과 박지원의 글 10편으로 구성된 책이다. 지금까지 이 책은 박지원의 자찬(自撰) 산문집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심지어 이 책의 서문까지도 박지원의 작품으로 오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서문의 말미에 “청장만제”(靑莊漫題)라고 적혀 있는데도, 학계에서는 오히려 청장(靑莊)이라는 호가 박지원이 쓰던 호이고, 이덕무가 이후에 쓰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내기도 했다.
이러한 오해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朴宗采, 1780∼1835)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아버지 박지원의 문집을 편찬할 때, 이덕무가 지은 서문을 「‘종북소선’ 자서」라는 이름으로 《연암집》에 싣는 한편, 《연암집》 권14와 권15에 《종북소선》을 배치하였다.

그렇다면 《종북소선》은 누가 만든 책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누가 엮은 책인가?
《종북소선》의 서문이 박지원의 글이 아닌 선귤당 이덕무의 글이며,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의 실수로 《연암집》에 편재되었다는 점은 이제 어느 정도 학계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종북소선》을 엮은 주체가 누구인가, 이 지점에서 기존 학계의 주장과 박희병 교수의 주장은 확연히 다르다. 박지원이 《종북소선》을 스스로 찬집했고, 그 문집에 이덕무가 서문을 썼다는 주장이 기존 학계의 중론이다. 그리고 박희병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종북소선》은 이덕무의 비평집이다. 즉, 이덕무가 박지원의 빼어난 글 10편을 뽑아 매 작품마다 평을 단 다음 스스로 서문을 써서 역은 이덕무의 책이다.

주장 1 《종북소선》의 저자와 비평가는 모두 이덕무 1人이다.
박지원의 후손가에서 예부터 소장해온 《종북소선》은 원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소장하던 책이다. 이 책의 앞뒤에는 ‘大容’ ‘德保’ ‘東西南北之人’ ‘湛軒外史’ ‘誘于壹時一物 發于壹笑壹吟’ 등의 장서인이 찍혀 있는데, 이런 많은 장서인을 찍어 놓은 것으로 보아 홍대용이 이 책을 얼마나 애장품으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원래 홍대용의 장서였던 이 책이 어떤 사정으로 박지원 후손가로 넘어가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19세기까지 박지원 집안과 담헌 홍대용 집안은 세교(世交)가 이어져 왔으니, 박지원과 홍대용의 사후에 후손들 사이에서 책이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박 교수는 추측하고 있다.
이 책은 ‘鐘北小選’이라는 내제(內題) 다음에

左蘇山人 著 因樹屋 批
?宕 評閱

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풀이하면 이렇다. “좌소산인(左蘇山人)이 짓고, 인수옥(因樹屋)이 비(批)를 하고 매탕(?宕)이 평열(評閱)을 하다”라는 뜻이다.
‘좌소산인’은 흔히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의 호로 알려져 있지만 이덕무 역시 이 호를 사용한 바 있다. 그 점은 박지원이 손수 《종북소선》을 필사해서 엮은 《벽매원잡록》이라는 책의 다음 구절에서 확인된다.

“曰左蘇山人, 曰?宕, 曰靑莊散士, 曰?處子, 曰蟬橘堂, 皆懋官也.”

번역하면 이렇다. “좌소산인이라 말하고, 매탕이라 말하고, 청장산사라 말하고, 영처자라 말하고, 선귤당이라 말하는데, 이는 모두 무관(이덕무)을 이른다.”
‘인수옥’은 ‘나무 곁의 집’이라는 뜻인데, 다른 데서는 보이지 않고 여기서만 보이는 이덕무의 호다. 이덕무는 “시를 읊거나 글씨를 쓸 때마다 반드시 하나의 호를 지었지만 그 시나 글씨를 남에게 주어 버려 스스로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라고 스스로 말한 바 있는데(《종북소선》 선귤당기의 미평 中), ‘인수옥’이라는 이 호는 이 책을 엮으면서 처음 사용한 게 아닐까 여겨진다. ‘매탕’은 ‘매화를 혹애한다’는 뜻인데, 이덕무가 다른 데서도 사용한 호이다.
‘좌소산인 저(著)’라는 표기는, 이덕무 스스로 《종북소선》을 자신의 저술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인수옥 비(批)’는 이덕무가 비(批)를 붙였음을 의미하고, ‘매탕 평열(評閱)’은 이덕무가 평(評)을 붙였다는 뜻이다. ‘비’(批)는 방비(旁批), 즉 작품의 특정 구절 옆에 기입(記入)한 평어를 가리키고, ‘평’(評)은 미평(眉評)과 후평(後評)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평’은 작품의 상단에 기재된 평어를 말하고, ‘후평’은 작품의 후미(後尾)에 달린 평어를 말한다.
그런데 이덕무는 왜 ‘인수옥 비, 매탕 평열’이라고 표기하여, 마치 두 사람이 ‘비’와 ‘평’을 단 것처럼 보이게 해 놓았을까? 일종의 유희(遊戱)일 가능성이 높다. 《종북소선》은 전체적으로 작가 박지원과 비평가 이덕무의 지적·심미적 유희의 면모가 짙다. 이덕무는 이를 통해 박지원과 특별한 방식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여겨진다. ‘인수옥 비, 매탕 평열’은 《종북소선》이 보여주는 이런 유희적 면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제3장 1절 참조).

주장 2. 《종북소선》은 이덕무의 단독 저술로 보아야 한다.
《종북소선》에 수록된 서문을 제외한 10편의 글이 모두 박지원의 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종북소선》은 박지원의 저서다. 《종북소선》을 이덕무의 저서라고 한다면, 조선적 맥락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중국문학사에서는 명·청대에 평점비평이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선집(選集)을 엮어 평점을 붙이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런 책을 ‘평선서’(評選書) 혹은 ‘비선서’(批選書)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문집에도 평점을 붙이는 일이 흔히 있었다. 평점은 필사본 책만이 아니라, 인쇄된 책에서도 발견된다. 책을 출판할 때 평점까지 넣어 출판한 것이다. 이제 독자들이 이런 책을 선호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제5장 참조).
그리하여, 평점 행위에 능한 사람을 ‘평점가’(評點家)라 부르고, 평점과 관련된 일체의 지적 작업을 ‘평학’(評學)이라고 일컬었다. 비평 행위를 하나의 학문으로 인식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평점비평이 발전하였다. 특히 18세기가 주목된다. 이덕무는 책을 많이 본 사람으로 유명하고, 박지원 일파와의 교유로 청나라 문물에 대한 소식이 빨랐고 학문을 접하는 것도 남들보다 앞섰다. 18세기 후반에 엮어진 이덕무의 《종북소선》은 우리나라의 비평사에서 가히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동아시아 비평사 속에서 보더라도 뚜렷한 존재감과 이채(異彩)를 발한다. 이덕무는 비단 우리나라에 축적되어 온 평점비평의 역량을 흡수했을 뿐만이 아니고 중국 평점비평의 우량한 전통을 적극적으로 섭취하여 자기대로의 창안을 이룩했던 것이다.
평선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저술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종북소선》을 단순히 박지원 산문의 선집으로만 간주한다든가 박지원 산문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 정도로 치부하는 시각은 정당한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 책은 마땅히 이덕무의 ‘저술’ 목록에 추가되어야 하며, 이덕무 저작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옳을 것이다.

주장 3. 박지원은 이덕무의 글을 자신의 글로 삼은 적이 없다.
《종북소선》의 서문과 《연암집》(박영철본 《연암집》도 포함)에 수록된 「‘종북소선’ 자서」, 그리고 최근 소개된 단국대학교 연민기념관 소장본 《벽매원잡록》의 「‘종북소품’서」는 그 글자의 출입에 있어 차이가 있다. 《종북소선》의 서문에 비해 후자의 두 서문은 훨씬 정련되어 있으며, 후자의 두 서문은 글자가 거의 일치한다.
《벽매원잡록》은 최근에 발견된 자료인데, 박지원이 《종북소선》을 보고 필사한 책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는 총 13편의 작품이 실려 있고, 《종북소선》과 약간의 수록 작품의 차이가 있을 뿐 서문부터 평어까지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다. 박종채는 아마도 《연암집》을 만들 당시 《벽매원잡록》을 보았던 듯하다. 그 때문에 《종북소선》을 박지원의 글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종북소선》과 기존 《연암집》(《벽매원잡록》 포함)의 서문의 글자의 차이에 대해, 기존 학계에서는 박지원이 이덕무의 글에 첨삭을 가해서 자신의 문집에 실었다고 보았다. 즉 박지원이 이덕무의 글을 고쳐서 자신의 글처럼 문집에 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은 만년에 안의(安義)에 있을 때 자신이 평생 창작한 글들을 여러 차례 정리하고 편차를 부여하는 일을 했는데, 이들 문고의 그 어디에도 「‘종북소선’ 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를 통해 볼 때, 박지원은 이덕무의 글을 자신의 글로 간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천하의 문장가 박지원이 자신의 문생에 해당하는 이덕무의 글을 좀 고쳐 자기 글로 삼았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남들은 설사 모른다 하더라도 박지원 주변의 지인(知人)들은 모두 그것이 이덕무의 글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이처럼 글자가 변화된 것은 이덕무가 스스로 자기의 글에 애착을 갖고 계속해서 고치고 다듬은 결과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벽매원잡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이 책에 이덕무의 글이 첫머리에 실리게 된 것일까? 두 가지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이 책이 대체로 이덕무의 《종북소선》을 베껴 놓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종북소선》의 서문을 맨 앞에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이 책이 ‘잡록’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잡록’은 보통 자유롭게 이것저것에 대해 기술해 놓은 것을 가리키지만, 특별한 체계 없이 이런저런 글들을 잡철(雜綴)해 놓은 것을 뜻할 수도 있다. 박지원은 후자의 용례로 ‘잡록’이라는 말을 쓴 게 아닌가 한다. 즉 문고를 편찬한다는 엄격한 의식 없이 《종북소선》의 서문과 거기에 수록된 자신의 글들 및 거기에 붙여진 평어를 베껴 싣고, 아울러 《종북소선》이 엮어진 뒤에 창작된 글 두 편을 보태 실은 게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독자적 문고나 선집으로 간주하기엔 곤란해 보인다. 박지원에게는 이 책 말고도 ‘잡록’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책이 있는데, 《면양잡록》이 그것이다. 이 책을 보면 박지원 자신의 글과 다른 사람의 글을 잡철해 놓았다.

조선 시대 최고의 비평가 선귤당 이덕무, 최고의 비평서 《종북소선》

이덕무는 조선 시대 최고의 산문비평가였다. 이덕무를 한마디로 평가하면 ‘독서인’(讀書人)이라는 말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주위 지인들에게 ‘책밖에 모르는 바보’[看書癡]라는 놀림을 받던, 박지원과 교유한 문인 정도로만 알려진 이덕무에게, 비평가라는 타이틀은 왠지 낯설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미학적 깊이와 통찰력, 정신적 높이에서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이덕무의 가장 이덕무다운 점은 다름 아닌 바로 이 비평가로서의 면모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덕무의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가 바로 이 《종북소선》이다.
《종북소선》에는 이덕무의 서문이 붙어 있다. 서문을 쓴 연월은 1771년 10월이다. 《종북소선》이 엮어진 건 이 무렵이라고 생각된다. 이덕무의 나이 31세, 박지원은 당시 35세였다. 이덕무는 이십대 이래 평점비평(評點批評) 행위에 심취했는데, 《종북소선》을 엮은 삼십대 초반에는 그 비평적 기량이 가히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덕무가 당대에 비평가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음은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한 시대의 명사(名士)가 모두 그(이덕무)의 문장을 중히 여겨, 즐겨 함께 노닐었고, 그의 비평을 얻는 것을 금이나 옥보다 귀하게 여겼다.

위 글은 성대중이 쓴 「이무관 애사」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이 시문(詩文)을 지으면 가지고 와 질문하고, 비평을 해 줄 것을 청했는데, 선군(이덕무)께서는 순순히 그에 응하셨다. 평점을 받은 이들은 대개 그것을 잘 간직하였다.

위 글은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가 편찬한 「선고부군유사」에 나오는 말이다. 이덕무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평점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덕무의 평점비평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는 《종북소선》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으며, 앞으로도 자료가 더 나올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현재 이덕무의 미학과 평점비평가로서의 내공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하나의 독립적인 완정(完整)한 저술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로는 《종북소선》이 유일하다.
이덕무는 조선 시대의 평점비평가 중 제1인자였으며, 《종북소선》은 조선 시대 최고의 평점비평서이다.

연암과 선귤당 ― 작가와 비평가 간의 고도의 정신적인 대화

연암 박지원과 선귤당 이덕무는 사제 간이자 벗 사이였다. 박지원은 당대에 이미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이덕무는 이런 박지원 산문의 정수(精髓)를 비평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고도의 집중을 발휘하고 심혈을 기울여 《종북소선》이라는 비평서를 저술했다. 그 결과, 이덕무는 작가와 비평가 간의 ‘대화적 관계’를 극대화하면서 동아시아의 비평사적 창안(創案)에 해당한다고 할 아주 독특한 비평 형식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

영처자(?處子)가 집을 지어 그 집 이름을 ‘선귤’(蟬橘)이라고 했다. 그러자 그 벗이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호가 왜 그리 많은가?”

《종북소선》에 수록된 「선귤당기」의 도입부다. 영처자는 이덕무의 호다. 이 글은 벗이라고 한 인물의 긴 질문, 그리고 그 말에 대한 영처자의 답변이라는 비교적 간단한 문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벗은 대뜸, “자네는 왜 그리 호가 많은가?”라고 힐난하면서, 매월당 김시습의 일화를 장황하게 들려준다. 일화의 내용인즉슨, 매월당이 속세에서 쓰던 이름을 버리고 이제 불문(佛門)의 이름인 법호(法號)를 사용하겠다고 하자 그 곁에 있던 대사(大師)가 손뼉을 치고 깔깔 웃으며 매월당의 미혹됨을 깨우쳐준다는 것이다. 이 대사의 말 다음에 “영처자는 이렇게 말했다” 운운하는 대목이 나오고 작품은 끝난다. 이 글에 대한 미평이 재미있다.
우선 미평의 도입부는 시비를 걸어오는 연암의 글에 정면으로 맞받는다. 마치 “그래요! 그대가 말한 것처럼 나는 이름이 정말 많아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서 한술 더 떠 매미와 귤도 이름이 많고, 김시습과 이덕무도 호가 많음을 말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김시습, 이덕무, 매미, 귤의 급수가 동급이라는 거다. 이덕무의 호인 선귤은 선(=매미)과 귤이다. 결국 이덕무의 이름이 많다는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셈이다.
박지원의 「선귤당기」와 그에 대한 이덕무의 미평을 읽으면, 일종의 유희성을 느끼게 된다. 김시습과 이덕무의 호를 쫙 나열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매미와 귤의 그 수많은 낯선 이름들을 의도적으로 열거한 것 역시 유희 정신의 발로다.
이덕무는 왜 이런 유희를 일삼은 것일까? 그것도 남의 글에 대한 비평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노라면 또다시 《종북소선》 미평의 독특한 성격에 도달하게 된다. 어찌 보면 이 미평 전체가, 아니 《종북소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평점비평 전체가, 박지원과 이덕무 두 사람 간에 행해진 유희일지도 모른다.

《종북소선》에 수록된 박지원의 글에는 모두 완정한 형태의 미평(眉評)이 달려 있는데, 마치 박지원과 이덕무가 대화를 나누는 듯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종북소선》에는 방비(旁批), 미평(眉評), 후평(後評)의 세 종류의 평어가 구사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미평을 주의해 볼 만하다.
미평(사람 얼굴의 눈썹 위치에 적는 평이라고 해서 눈썹 미眉 자를 쓴다.)은 작품 상단에 기재된 평어로서, 보통 작품 전반에 대한 논평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미평은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종북소선》에서는 특이하게도 미평이 대단히 길어, 한 편의 완정한 산문을 이루고 있다. 이런 예는 조선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중국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평 형식의 측면에서 볼 때 《종북소선》의 가장 독특한 면모는 바로 이 미평에서 발견된다.
박지원은 당시 이미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다. 이덕무는 자신의 스승이자 벗인, 이 위대한 산문 작가의 글에 비평 행위를 하면서 여러 가지 고심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박지원의 저 기이하고도 탁발(卓拔)한 글들에 대해 대체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평어를 써야 할 것인가. 어떻게 비평을 해야 박지원 산문의 포인트를 확 드러내면서 비평 행위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을까. 이런 고심 끝에 이덕무는 동아시아에서 전개되어 온 기존의 미평과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미평을 창안하게 된 것이다.
이덕무의 미평은 박지원의 글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단지 박지원 글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거나 박지원의 글을 단순히 부연하고 있다기보다는 자기대로의 어떤 창의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박지원 글의 이해지평을 넓히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대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란 본질적으로 평등한 정신의 소유자 사이에서만, 서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만일 한 사람이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면, 한 사람이 만일 다른 사람에게 억압을 느낀다면, 한 사람이 만일 다른 사람과 지적·정신적 수준이 대등하지 않다면, 한 사람이 만일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대화는 성립되기 어렵다.
《종북소선》에서 작가 박지원이 이덕무가 상정한 제1층위의 독자라고 한다면, 박지원·이덕무의 동인들―이를테면 홍대용, 서상수, 박제가, 유금, 유득공과 같은―은 그 제2층위의 독자일 수 있으며, 이덕무와 동시대의 사대부들은 그 제3층위의 독자이고, 후대의 사람들은 제4층위에 속하는 독자일 수 있을 터이다. 이덕무는 《종북소선》의 평어를 통해 제1층위의 독자인 작가 박지원과 가장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 파악되지만, 또한 동시에 다른 세 층위의 독자들을 향하여 비평적 메시지를 발신(發信)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목차

책머리에
제1장 비평서로서의 『종북소선』
제2장 비평가 이덕무와 슬픔의 미학
제3장 『종북소선』의 존재 방식
제4장 『종북소선』 미평(眉評)의 양상과 의미
제5장 명말 청초의 평점서(評點書)와 『종북소선』
제6장 마무리 말

저자소개

저자 박희병은 현재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한국의 생태사상』, 『운화와 근대』, 『연암을 읽는다』 등이 있으며, 『나의 아버지 박지원』,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등의 역서와 논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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