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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먼 지니어스

저먼 지니어스

  • 피터 왓슨
  • |
  • 글항아리
  • |
  • 2015-10-22 출간
  • |
  • 1416페이지
  • |
  • 153 X 225 X 70 mm /2123g
  • |
  • ISBN 9788967352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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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이 독일을 보라!
칸트에서부터 헤겔,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3세기 동안 무수한 성취를 남긴 독일 천재들,
나치, 히틀러, 세계대전에 가려진 그 찬란한 역사


“20세기는 독일의 시대일 수도 있었다.” _레몽 아롱
아니, “20세기는 독일의 시대여야 했다.” _노먼 캔터

책 소개
칸트·헤겔·쇼펜하우어·니체·비트겐슈타인·하이데거가 철학을, 하이든·베토벤·슈베르트·모차르트가 음악을, 릴케·하이네·괴테·헤세·브레히트·실러가 문학을, 멘델·아인슈타인·가우스·슈뢰딩거·하이젠베르크가 과학의 금자탑을 쌓았던 곳, 그리고 마르크스·베버·프로이트·융·아도르노·루카치·벤야민·야스퍼스·지멜·하버마스·아렌트…….
바로크 시대를 상징하는 바흐에서 현재까지 지난 250년 동안 독일 천재들의 활동, 또는 지식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이 이 책 『저먼 지니어스』의 내용이다. 이 ‘독일 천재’들을 보면 가난한 변방에 불과하던 독일이 1933년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까지 3세기 동안 지적·문화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와 미국보다 더 창조적이고 뛰어난 나라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낸 나라, 내면의 풍요를 이상으로 삼았던 교양국가, 교육받은 중간계층을 최초로 형성한 나라, 대학과 연구소의 나라가 바로 독일이었다.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까지 독일은 그야말로 ‘유럽의 세 번째 르네상스와 두 번째 과학혁명’이 일어난 나라였다. 저자 피터 왓슨은 히틀러 이전의 그 찬란했던 독일의 창조적인 업적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가능했는가, 히틀러의 등장 이후 그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 무너졌으며 어떻게 회복되었는가를 방대한 문헌을 동원해 파헤치고 있다. 또한 왓슨은 현대사상이 ”시장경제와 자연도태를 제외하면 칸트, 헤겔, 마르크스, 니체, 막스 플랑크,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막스 베버,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평가는 역사에 면면이 이어져온 천재들의 활동에서 독일 정신사의 핵심을 짚었다는 점에서 이제까지의 독일 역사서와는 다른 독특한 관점을 제공한다. “먼지 덮인 서고에 묻힌 채 망각된 인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는 추천사처럼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으며, 이를 책 뒤의 부록에서 ‘과소평가된 35명의 독일인’으로 정리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천재들이 부각시킨 문제, 천재를 잉태한 정신, 독일만의 독특한 시대적 이념, 사회적 사건을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더해준다.

독일 천재들: 사라져버린 세계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좋든 싫든, 오늘 이 세계는 히틀러의 작품이다.”
물론 그는 독일인이었다. 하지만 약혼자가 유대인이었다. 1938년, 하프너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약혼자와 함께 독일을 떠났다. 두 사람이 닿은 곳은 영국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즉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2년 앞둔 해에 한 영국인이 태어났다. 2010년, 이 영국인은 하프너의 나라를 다룬 방대한 책을 내놓았다. 그는 서장에 이렇게 썼다. “이 책은 독일 천재에 관한 책이다. 독일 천재가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번성했는지, 우리가 알거나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어떻게 우리 삶을 형성해주었는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어떻게 히틀러 때문에 파멸했는지에 대해서 짚어볼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독일 천재에 관한 책이며, 그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어떻게 번성했는지, 또 그들이 우리가 알고 있거나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어떻게 우리 삶을 형성해주었는지, 어떻게 히틀러 때문에 파멸했는지 다룰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리가 됐다. 그리고 1933년 1월부터 1941년 12월까지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인, 오스트리아인은 10만4098명에 달했다. 실로 엄청난 숫자였다. 당시엔 오늘날처럼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감안해야만 한다. 아니, 설혹 교통이 지금만큼 발달했더라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세계, 가족이 없고 친구가 없는 세계, 완전히 낯선 세계로 건너가는 일은 오늘날에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갔다. 하프너가 그랬듯이, 쇤베르크가 그랬듯이, 브레히트가 그랬듯이, 아도르노가 그랬듯이, 토마스 만이 그랬듯이, 또 아인슈타인이 그랬듯이. 독일을 떠나 열린 세계를 향해 떠났다. 그렇지만 세계대전과 나치, 히틀러가 몰아낸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독일? 무수히 많은(무려 1416쪽을 채울 만큼 많은) 천재를 낳았던 나라, 칸트에서부터 헤겔, 니체, 막스 베버, 마르크스 등 현대사상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던 나라, 18세기에 이미 50개 대학을 보유했던 나라(같은 시기 영국은 대학이 단 두 곳뿐이었다), ‘교양Bildung(교육, 교양, 자아 형성, 자기실현 등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을 이상으로 삼았던 나라, 교육받은 중산계층을 최초로 형성한 나라, 그야말로 ‘유럽의 세 번째 르네상스, 두 번째 과학혁명’이 일어났던 나라, 그토록 찬란했던 나라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독일’이라는 단어에 베토벤이나 하이든, 헨델, 바흐의 아름다운 음악을 떠올리지 않았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고요한 그림도, 클림트의 관능적인 그림도 떠올리지 않았다. 릴케도, 괴테도, 실러도, 헤세도, 하이네도 떠올리지 않았다. 슈뢰딩거나 아인슈타인이 남긴 눈부신 업적도 떠올리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들이 타고 다니는 차(디젤, 벤츠)가 독일에서 발명됐다는 사실 역시 떠올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독일’에서 세계대전을, 나치를, 히틀러를 떠올렸다. 이것이 이 책의 또 다른 주제다.

히틀러에 가려진 세계
런던 주재 독일대사였던 토마스 마투제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거의 60년이 지났는데도 영국의 역사교육이 여전히 나치 시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이것은 단지 시시껄렁한 불평이 아니다. 지금 당장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독일사로 분류된 책들을 살펴보라. 그 대부분이 히틀러나 나치, 세계대전에 관련된 책일 것이다. 마투제크의 말이 맞다. 독일사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 동안에 머물러 있다. 물론 그 엄청났던 전쟁을 잊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독일이, 독일인이 언제까지 과거의 사슬에 얽매여 있어야 하는 걸까? 스티브 크로쇼가 말한 대로 독일인 모두가 히틀러와 “한 탯줄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째서 독일인가? 왓슨 자신이 영국인임에도 어째서 ‘독일 천재’들에 주목했는가? 그는 충분히 ‘영국 천재’나 ‘프랑스 천재’ 혹은 ‘미국 천재’를 다룰 수도 있었고, 그런 제목을 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현대 사상의 발전에 기여한 바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근대 독일 문화사는 훨씬 덜 알려져 있다. 독일의 과거에는 제3제국에서 발생한 사건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 책에서 제시하려고 한 것처럼 아직도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 많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독일’이란 현대의 ‘독일’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독일은 통일된 한 나라가 아니라 연방에서 출발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등 독일 연방에 인접한 많은 나라는 독일어권 혹은 독일적 사고권에 있었다. 즉 여기서 다룰 ‘독일’은 독일어를 사용하거나 독일어로 사고한 독일?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그들을 뛰어넘은 문화와 지성을 지녔음에도 그림자로 남고 만 빛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장序章이 말해주듯이 어쩌면 그 빛은 지나치게 밝아 ‘눈을 멀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독일 정신: ‘문화’와 ‘문명’의 구분, 내향성, 교양
그렇다면 독일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천재를 형성할 수 있었는가? 바흐, 헨델, 베토벤, 브람스 등 걸출한 음악가들을 모조리 배출해내 토마스 만이 “독일인이 되지 않고서 음악가가 되는 일이 가능할까?”라고 말하기까지 했던 음악적 토양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독일어로 말하고, 듣고, 쓰고, 생각하는 가운데서 솟아난 이른바 ‘독일 정신’이란 무엇인가?
독일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점이 있었다. 예컨대 독일인들은 ‘문화Kultur’와 ‘문명Zivilisation’을 구분했다. '문명'이 유용한 무언가, 오직 인간 외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진 2등급의 가치를 뜻했다면 '문화'는 다른 서구 국가의 '문화Culture'와도 그 의미가 달랐다. 문화Culture가 정치·경제·기술·스포츠 그리고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사실까지도 포함시킨 반면, 독일어에서 문화는 본질적으로 지적, 예술적, 종교적 사실을 가리켰다. 요컨대 독일에서 문화란, 서구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문학·그림·음악·철학 같이 ‘고급문화’라고 부른 것이었다. 여기서 비롯된 자부심은 19세기 이후 단순하게 ‘문명화(독일적 의미에서)’된 서구사회에 대한 우월인식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내향성’ 즉 현실에서 눈을 떼고 내면세계로 물러나는 경향에 이르렀다. '교양', 달리 말해 자기실현에 대한 열망은 이 모든 흐름에 스며 있었다.
물론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급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교육받은 중산계층을 형성한 한편 민족주의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듯이, 독일인의 몇 가지 특징적인 점을 늘어놓고는 그들이 특별히 우수했다거나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이러한 ‘독일 정신’은 다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좀더 잘 자라날 토양이 되어주었을 뿐이다. 이 세 가지 흐름은 촘촘하게 이어져 세 번째 고전 부흥으로, 예술 및 과학의 번영, 군사 분야에서의 대대적인 성찰과 개혁 그리고 대학의 변혁으로 뻗어나갔다. 그중에서도 대학의 변혁이 두드러졌다.

학문/과학Wissenschaft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생각
14~15세기에 걸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벌어졌던 것과 정확히 같은 현상이 독일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학문(학문을 뜻하는 Wissenschaft는 과학을 뜻하기도 한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그러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에 교황 레오 10세가 로마의 라 사피엔자 대학을 개편했듯이, 독일 대학에서도 변혁이 일어났다. 앞서 언급했듯이 독일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많은 대학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특히 17세기 말~18세기 전반에 새로이 문을 연 대학 네 곳이 독일의 지식 풍토를 바꾸어 놓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괴팅겐 대학은 신학부의 전통적인 검열권을 제한한 최초의 대학이었다. 이는 신학부와 철학부의 상대적 가중치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대학에서 신앙고백의 시대는 저물었고, 괴팅겐 대학의 사상과 저술, 출판의 자유는 비할 데 없이 커졌다. 괴팅겐 대학은 또한 세미나 제도를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켰는데 이는 근대적인 개념의 ‘연구’와 근대적인 ‘박사학위PhD’, 과학적인 ‘학문 분야’의 성립을 유도했고, 또 대학이 강의와 연구가 균등하게 분리된 ‘학부’라는 근대 조직으로 변모하는 데 바탕을 마련했다. '비센샤프트(학문을 뜻하는 동시에 과학을 뜻하는 독일어)'란 용어가 처음으로 근대적인 개념을 얻게 된 것도 괴팅겐 대학에서였다. 이 같은 변혁은 다른 독일 대학들에 퍼져나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냈다. 바로 인텔리겐치아, 즉 '교육받은 중산계층'의 출현이었다. 독일에 천재가 그토록 많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에서 '천재'는 (낭만주의적 관점에 따라) 영감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완전성에 대한 타고난 충동"이자 "신성한 지식의 '표본'",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미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

음악 분야에서의 르네상스: 바흐에서부터 브람스까지
18~19세기에 독일에서의 음악 감상과 음악 소비, 음악 이해는 당시를 지배한 관념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이 말은 음악이 철학의 하위 항목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음악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철학이었다. E. T. A. 호프만은 베토벤 제5번 교향곡을 다룬 비평문에서 "예술은 더 이상 오락의 도구가 아니라 진리의 도구이며 (…) 철학이 끝나는 곳에서 예술이 시작된다"고 썼으며,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전혀 표현할 수 없는 것, 말하자면 본체계에 대한 표현", "가장 심오한 지혜의 표현"이라고 여겼다. 쇼펜하우어에게 음악은 이미 "형이상학적인 목소리", 철학적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바그너에게로 옮겨 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그너는 이 작품에서 "청중의 귀가 미해결된 주제를 조바심내며 기다리도록" 불협화음이 이어지게 해 "삶의 형태이자 인간 내면에 깃든 심리로서 충족되지 않은 동경과 갈구, 열망"은 마지막 화음에 이르러서야 해결된다.
음악에 대한 이런 진지한 접근은 오늘날 우리가 음악을 이해하는 방식과는 판이하다. 여기에는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 대중 음악회의 성행이었다. 바흐가 죽으면서 바로크 시대가 막을 내렸듯이 대중 음악회는 궁정이나 교회에서 즐기는 음악에 작별을 고했다. 작곡가들은 이제 자신의 음악 형식과 구성을 맘껏 펼칠 수 있었고, 음악 소비가 늘면서 자연히 사람들이 음악을 감상하는 이해 자체가 바뀌었다. 예컨대 교향곡을 칸트가 말한 '숭고' 개념으로써, 즉 감각을 압도하는 예술 형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바흐, 헨델, 바그너, 브람스, 슈만, 말러,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그리고 가장 유명한 네 명의 음악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가 탄생했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서부터 프로이트까지
독일 역사학자 토마스 니퍼다이는 음악과 대학, 과학이 19세기에 독일을 이룬 3대 업적이라고 결론지었듯이, 훗날 아인슈타인이 E=mc²이라는 폭발적인 방정식으로 보여주었듯이, 독일 과학은 분명 선구적이었다. 유기화학의 발명 및 벤젠 구조의 발견 등 원자에 대한 이해가 새롭게 정립됐고, 이는 19세기 말 소립자물리학의 등장을 이끌어냈다. 또한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이 정립되면서 뉴턴식의 기계론적 자연관에 종말을 고했다. 이를 가리켜 니퍼다이는 이렇게 말했다. “19세기의 과학혁명은 케플러나 갈릴레오, 뉴턴이 몰고 온 혁명보다 더 광범위한 파장을 일으켰다.”
첫 번째 과학혁명에서 인쇄술의 발명이 지식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바꿔놓았듯이, 두 번째 과학혁명은 인간에 대한 이해 자체를 바꿔놓았다. 1859년 다윈이(그는 영국인이었다) 『종의 기원』을 발표했을 때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였던 곳, 즉 (당시로서는) 그처럼 충격적인 이론을 받아들일 만한 정신적 토대가 가장 잘 다져진 곳은 바로 독일이었다. 1802년까지 존재하지도 않았던 ‘생물학’이라는 용어는 신학을 대체하면서, 즉 영혼의 개념을 의식으로 대체하면서(이로써 프로이트가 등장했고), 신 없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밝혀내려 애쓰면서(이로써 독일 관념론이 출현했다), 독일에 내리꽂히듯이 등장했다. 멘델이 유전 법칙을 발견한 것도, 프로이트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무의식’을 규명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그 존재조차 불분명했던 무의식은 프로이트 이후 보편적인 개념이 되어 “자신(프로이트)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트를 가리켜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했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마르크스 이후 우리는 인간 주체가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인간 주체에 중심이 없음을 밝혀주었다.”

망명자의 역사
그리고 1933년이 되었다. 망명을 시도한 이들 중에는 발터 벤야민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망명을 떠나던 중에 필요한 서류 중 하나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심장병까지 앓고 있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유대인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망명을 떠났다. 아렌트의 전前애인이자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이었던 하이데거는 독일에 남아 반反유대주의적 발언을 해 둘의 교류는 이후 오랫동안 끊겼다가 1967년에서야 재개되었다. 벤야민 같은 ‘집계되지 않은’ 경우 외에도 1939년까지 망명하거나 집단 처향장에 끌려간 작가와 예술가, 음악가, 과학자의 수는 6만 명에 달했다. 아마 이들 독일 망명자들이 없었다면 역사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세계 최고 수준의 물리학자들의 활약, 영국 시민권을 획득한 하이에크로부터 촉발된 (신)자유주의 논쟁, 바우하우스의 조형예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 이론, 브레히트의 서사극, 할리우드와 경쟁하며 세계를 주도했던 독일 영화가 제3제국 시대에 몰락했다가 뉴저먼시네마로 다시 부활한 배경은 모두 망명문화와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망명 물리학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히틀러의 선물'이라고 불렸다. 이 같은 망명자의 역사는 객관적 진실을 거부하고 ‘민족’을 기준으로 학문을 규정한 나치즘과 히틀러가 틀렸다는 역사적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입증해준다.

숨겨진 이야기
이 책의 다른 무엇보다 흥미로운 부분에 대해서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바그너와 니체는 서로 절친한 사이였지만 어느 순간 연락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1883년 바그너가 죽고 9일이 지나서야 니체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그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두드러지게 완벽한 인간이었네”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무언가 몹시 불쾌한 감정이 있었던 것 같네.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거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몹시 불쾌한 감정”이 무엇인지는 1956년에 가서야 밝혀졌다. 실명 위기에 처해 있던 니체를 진단한 의사는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었고, 바그너에게 보내는 편지를 니체에게 전했다. 바그너는 답장을 보내면서 니체의 건강 문제를 거론했다. 그가 (그 당시 상식으로 볼 때) 실명이 자위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자 의사는 니체가 이탈리아에서 “의학적인 충고”를 받고 사창가에 출입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당시 매춘은 고질적인 자위를 치료하는 수단으로 추천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1887년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소문이 났고, 같은 해에 니체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니체는 한 편지에서 “끝없이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저, 위대한 두 인물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저자소개

저자 피터 왓슨은 1943년 영국 출생으로 더럼 대학, 런던 대학, 로마 대학에서 공부했다. 좌파 시사주간지 『뉴소사이어티』 부편집장을 지냈고, 『선데이타임스』 탐사보도팀에서 4년간 일했다. 『타임스』 뉴욕 특파원, 『뉴욕타임스』 『옵서버』 『펀치』 『스펙테이터』 등 유명 신문·잡지 프리랜서로도 활동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는 케임브리지 대학 맥도널드고고학연구소에서 협동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는 런던에 거주 중이며, 『생각의 역사Ⅰ: 불에서 프로이트까지Ideas: A History: From Fire to Freud』 『생각의 역사Ⅱ: 20세기 지성사The Modern Mind: An Intellectual History of the 20th Century』 『메디치의 음모The Medici Conspiracy』 『히틀러의 죽음The Death of Hitler』 『거대한 분할The Great Divide』을 비롯해 문화사 및 지성사를 다룬 책들을 써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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