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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도시로 떠나는 여행

고대 도시로 떠나는 여행

  • 둥젠훙
  • |
  • 글항아리
  • |
  • 2016-10-17 출간
  • |
  • 428페이지
  • |
  • 160 X 220 X 31 mm /756g
  • |
  • ISBN 978896735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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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수隋ㆍ당唐의 장안성에서 명明ㆍ청淸의 북경성까지
고대의 대항구에서 강남 수향 마을까지

한 권으로 살펴보는 중국 고대 도시의 다채로운 면면


“문화 기억은 도시인의 조바심, 시간에 대한 조바심에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역사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만 그러한 조바심을 없앨 수 있다. 또한 역사환경이 존재해야만 지구화의 물결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고대 도시의 유형과 명칭
중국 고대 도시는 정치ㆍ역사ㆍ지리 조건 등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행정ㆍ군사ㆍ문화 중심 등 기능에 따라서는 도都ㆍ부府ㆍ주州ㆍ현縣, 상업도시ㆍ수공업도시ㆍ방어도시ㆍ항구도시 등으로, 형태에 따라서는 방형ㆍ원형ㆍ자유형ㆍ연하곡대형沿河谷帶形ㆍ산성山城ㆍ이중성雙重城ㆍ조합성組合城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대 도시 이름의 유래와 명칭 변화는 중국 역사 문화의 두터움을 드러낸다. 대부분 오늘날까지 쭉 이어져오고 있는 지명들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일은 도시 건설의 역사 및 특징 연구에도 유익한 일이다.
이른 시기의 도시 명칭들은 대부분 별다른 뜻 없이 오로지 그 지역을 의미하는 고유 명칭이었다. 때로는 산천과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이름이 지어지기도 했다. 특히 산 남쪽과 강 북쪽을 ‘양’, 그 반대를 ‘음’이라 하여 생겨난 이름이 낙양, 하양河陽, 한양, 강음江陰, 회음 등이다. 또 장안長安ㆍ무위無爲ㆍ상숙常熟ㆍ안길安吉ㆍ만전萬全ㆍ대동大同 등의 이름에는 평안을 바라는 소망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원래 지명을 잘못 읽거나 잘못 써서 만들어진 도시 이름 중 후대 사람들이 글자의 뜻만 보고서 견강부회하여 해석한 예로는 돈황敦煌이 있다. 응소應邵에 따르면, “돈은 크다는 뜻이고 황은 성대하다는 뜻”으로, 돈황은 매우 성대하다는 의미지만, 실제로 ‘돈황’은 ‘대하大夏’ 혹은 ‘토화라吐火羅’와 음이 비슷해 생겨난 지명이다. 처음에는 돈황 일대에 거주하다가 나중에 서쪽으로 이주해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토카리스탄에 살게 된 사카saka 부락의 명칭에서 비롯된 지명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행정 소재지가 있는 도시들은 행정구역에 따라 명칭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중요한 역사 인물과 사건을 통해 도시 명칭이 생겨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도시나 기구가 합병되어 생겨난 것도 있다. 새로 형성된 합병 도시는 원래 도시의 명칭에서 한 글자씩 따와 조합함으로써 새 도시의 이름을 짓곤 했다.

수ㆍ당 시기의 장안성은 어떻게 기획되었는가?
6세기 전후, 중국에는 완벽한 도시계획에 따라 새롭게 세워진 도성이 있었다. 바로 인구가 100만 명에 달했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수ㆍ당 시기의 장안이다. 학자들은 1500년 전에 이토록 큰 규모와 정연한 구조를 가진 도시가 출현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뒤 대량의 고고발굴을 통해 장안성의 확실한 존재와 정연한 배치가 입증되자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중국 고대 도시계획의 걸작이자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웅장하고 아름다운 도시라고 평했다.
수나라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북주北周를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한 뒤, 중앙집권적인 봉건왕조를 세웠다. 그는 새 왕조의 기백을 나타내는 동시에 왕조가 바뀌면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세워야 하는 관례에 따라 한나라 장안성 동남쪽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전의 도성은 백성의 거주지역과 뒤섞여 있어 관리가 불편하다고 판단한 양견은, 새로운 수도는 궁성宮城과 민간 거주구역을 분리해 좀더 관리하기 쉽게 만들고자 했다. 양견이 북주 때 대흥공大興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새 수도의 이름은 대흥성大興城으로 정해졌으나 수 왕조는 2대 만에 단명하고 말았고, 이후 당나라가 수나라를 대신한 뒤 대흥성은 장안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문치와 무공이 가장 강성했던 시대로, 장안성 역시 당나라 때 완전히 건설되었고 국제적인 대도시가 될 수 있었다. 당시 양견은 우문개宇文愷에게 수도 건설 기획을 맡겼다. 우문개는 선비족 귀족 출신으로, 고대의 뛰어난 도시설계가이자 엔지니어였다.
그 당시 장안 지역에 살고 있던 20여만 농민이 장안성 건설에 동원되어 아홉 달에 걸친 기본 건설이 이뤄졌다. 양제煬帝 때를 거쳐 당나라 초기에도 성 내부의 건설이 지속되면서 마을이 철거되고 무덤이 이장되었다. 건설은 아주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성벽부터 축조한 뒤 길을 내고 이방里坊(관리와 백성들이 거주하던 구역. 각각의 이방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블록 형태이며 이방들이 모여 바둑판 형태를 이루었다)을 나누었다. 도시의 거대한 규모, 도로의 엄청난 폭, 두드러진 궁전의 위치 등은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다가 통일을 이룬 왕조의 새로운 기상과 대당 왕조 천자의 기세를 드러낸다.
우문개가 기획한 장안성은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기술된 고대 도시 제도를 반영하고 있다. “장인이 도성을 건설하니, 사방 9리이고 각 면에 3개의 문이 있다. 도성 안에는 가로세로로 각각 아홉 갈래씩 길이 나 있다.” 당나라 장안성의 황성과 궁성은 모두 이방과는 성벽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 역시 이전의 한나라 장안성이나 북위 낙양성과는 다르다. 그 목적은 도시의 치안 관리 및 궁성과 황성의 방범을 위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장안성은 수 문제가 장안성을 건립할 때 “궁성과 민간 거주구역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려 했던 지도 사상이 확실하게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고 권력자인 제왕이 직접 결정하고, 도시계획 전문가가 기획해 실행에 옮겼으며, 정부의 행정력을 발휘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던 장안성 건설은 중국 고대 도시계획에서 훌륭한 경험이 되었다.

원나라 대도에서 명ㆍ청의 북경성까지
중국의 수도 북경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명성名城이다. 13세기 원나라 때 대도가 건설되면서 도시의 기본 틀이 잡혔다. 마르코 폴로는 당시 번화했던 베네치아를 떠나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왔고, 즉시 원나라 대도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도성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대도의 위치는 오늘날의 북경소평원北京小平原으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화북평원에서 동북 및 내몽고 지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지점이라 예부터 중요한 군사도시이자 한족과 소수민족의 무역 중심지였다. 진ㆍ한에서 수ㆍ당 시기까지 이곳은 줄곧 무역 및 군사 요지였으며, 만당晩唐 때는 유주幽州라 불렸다.
원나라 대도는 수ㆍ당의 장안성 이후 기획에 따라 새로 건설된 대도시로, 중국 도성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고 총결해 발전시켰으며, 후대의 명ㆍ청 북경성은 바로 이를 바탕으로 건설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장안성과 마찬가지로 원나라 대도성 역시 『주례』 「고공기」에 기록된 성제城制를 구현했다. 기획을 맡은 유병충은 「고공기」의 성제를 전면적으로 구현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음으로써 중용을 지키고자 하는 유가사상에 따라 도시를 기획하고 건설했다. 건설 공사 역시 계획과 진행에 있어 일관성 있게 추진되었는데, 먼저 지하수로를 파고 도로 공사를 마친 뒤 건축물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짧은 시간 안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대도성이 만들어졌다.
명나라 초 서달徐達 장군은 대도를 공격해 점령한 뒤 1371년에 성벽을 수축하기 시작했다. 성 북쪽의 비교적 황량한 지역에서 남쪽으로 5리쯤 되는 지점에 북쪽 성벽을 따로 만들었고, 대도의 이름은 북평北平으로 바뀌었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가 즉위한 뒤 도성을 남경에서 북평으로 옮겼는데, 이때 북평은 다시 북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417년(영락 15)에 궁성을 짓기 시작했으며 4년에 걸쳐 동원된 장인의 수는 20~30만, 부역민의 수는 100만에 달했다. 명나라 북경성은 원나라 대도를 토대로 개축한 것이었다. 고대 도성의 배치는 전반적으로 중심축을 통해 궁전 건축을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지상至上의 황권을 구현하는 전통적인 수법으로, 명ㆍ청 북경성의 경우 더욱 분명하다. 쭉 뻗은 큰길을 따라 높고 큰 성루들, 천안문 앞의 천보랑과 T자형 광장, 옥대하의 다리, 오문 앞 광장을 지나면 태화전 앞 광장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앞으로 가면 지상 황권을 구현한 태화전에 닿는데, 자연스럽게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된다. 중심축에 배치된 건축물들의 높이 차와 더불어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는 공간 변화는 시각적 충격을 준다. 이것이 바로 고대 도시 배치의 탁월한 수법이다.
북경에는 우수한 역사적 건축물들이 집중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현재 고궁은 세계에서 가장 보존이 잘되어 있는 큰 규모의 고전 궁전 건축군이다. 이화원은 세계적 명성을 지닌 황가 원림 건축이다. 이화원보다 더 웅장하고 아름다운 원명원과 창춘원暢春園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손에 훼손되고 일부 흔적만이 남아 있다. 역사상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도성들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북경만이 크게 파괴되지 않고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국공내전 시기에 전화로 인해 고성古城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존하고자 했던 것은 공산당이 북경을 평화롭게 접수할 수 있었던 동력이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초기에 량쓰청粱思成과 천잔샹陳占祥 두 학자는 고성을 완벽하게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행정구역을 따로 설치할 것을 제안했으나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82년 북경은 ‘중국 제1차 역사 문화 명성名城’으로 지정되었지만, 실제로는 파괴적인 건설들이 많이 행해졌을 뿐, 어떻게 보호하고 발전시킬 것인가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았다. 다만 한 가지, 세계가 공인한 고대 도시계획의 걸작이자 세기의 명성인 북경성이 인류 문명의 공동 자산으로서 계속 존재해나가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번영한 수향水鄕 도시, 소주
소주는 2000여 년 전의 도시 구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극히 보기 드문 곳이다. 동시에 풍부한 문화유산으로 이름난 역사적인 도시다. 소주성은 춘추시대 오吳나라 때부터 진秦ㆍ한ㆍ진晉ㆍ당ㆍ송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많고 경제가 번영했던 동남 연해 지구의 정치ㆍ경제 중심 도시였다. 후대의 행정 편제 및 명칭은 약간씩 달랐는데, 송나라 때는 평강부平江府였다. 현존하는 남송 시대의 도시 평면도인 〈평강도平江圖〉는 송나라 때 소주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평강도〉는 고대 도시뿐 아니라 이와 관련된 정치ㆍ경제ㆍ문화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근거가 된다. 〈평강도〉는 중국 전통 고지도의 화법을 따라, 선으로 각종 길과 골목을 표현했으며 각양각색의 정자ㆍ누각ㆍ원림ㆍ패방ㆍ궁전ㆍ탑ㆍ정원ㆍ다리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오늘날의 도시 평면도와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일정한 비례에 따라 표현된 배열 등은 중국 고대의 측량 제도 기술 수준이 높았음을 말해준다. 현재는 소주 문묘文廟에 보존되어 있다.
소주성의 역사는 2500여 년 전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주성은 춘추시대 오나라의 도성으로 오왕 합려闔閭 때 오자서伍子胥가 축성했다고 하는데, 당시 6개의 성문이 있었다. 소주 고성은 흥성과 쇠락을 몇 차례 겪으면서도 여전히 번화했고 구조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예스러운 정취도 여전했다. 그렇지만 소주성도 파괴를 완전히 비껴갈 수는 없었다. 소주성은 전쟁으로 파괴될 때마다 원래의 자리에 중건되곤 했는데, 수로망과 도로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곳에 중건하는 것이 편리했을뿐더러 도시생활을 회복하는 데에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다리, 거리, 방의 명칭도 모두 그대로였다. 소주 고성의 도시 구조는 전통적인 격자형에 기초하고 있으며, 「고공기」의 도성 제도와 전통 예제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수망水網 지역에 있었던 만큼 도시 구조 역시 지형과 물길에 따른 특징을 드러내며, 성안에 종횡으로 그물처럼 교차된 물길이 도시의 골격을 이룬다. 여기에 각양각색의 다리까지 더해져 전형적인 수향 도시로서 동방의 베네치아라 불린다.
또한 소주는 사가私家 원림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로, 가장 오래된 것은 송나라 때의 창랑정滄浪亭이다. 명나라 때는 원림을 조성하는 풍조가 더욱 성행했고, 청나라 말에 이르러서는 원림의 수가 성 안팎으로 170여 곳에 달했다. 소주 원림은 그 특유의 공간 관념과 조성 수법으로 강남 원림 예술을 형성했다. 면적에 비해 공간의 변화가 풍부하고 하나의 격식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또한 산수의 정취와 시적 정서가 깃들어 있다. 작은 다리와 흐르는 물, 흰 벽에 검은 기와, 깊고 외진 곳까지 나 있는 오솔길,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산봉우리와 길 등 걸음마다 변화무쌍하다. 소주 원림은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저자소개

저자 둥젠훙董鑒泓은 1926년 간쑤 성 톈수이天水에서 태어나 1951년 퉁지同濟 대학 토목과 시정조市政組를 졸업했다. 퉁지 대학 도시계획 연구실 주임, 건축과 부주임, 도시계획 연구소장을 거쳐, 중국건축학회 도시계획 학술위원회 부주임, 중국도시계획학회 상무이사를 지냈다. 중국건축총공사의 요청에 따라 파견되어 알제리 도시계획 전문가팀의 수장을 맡았고, 퉁지 대학 하이난海南 설계원 원장을 역임했다. 『중국 도시 건설사中國城市建設史』 등을 펴냈고, 『도시계획 원리城市規劃原理』 집필 작업에 참여했으며, 『도시계획 학간城市規劃學刊』 편집장과 『중국 대백과전서』의 도시계획 부문 부편집장으로 활동했다.

도서소개

한 권으로 보는 중국 고대 도시의 다채로움!

도시는 역사 문화가 펼쳐지는 커다란 무대이자 역사 문화의 메신저다. 도시계획과 건설의 측면에서 중국 고대 도시의 뛰어난 성취는 오랫동안 쇠하지 않고 흥성한 중국의 찬란한 문화를 증명해준다. 이 책은 오늘날 다채로운 중국 고대 도시의 면면을 펼쳐 보이는 동시에 전체적인 윤곽을 체계적으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도시 건설사』 『도시계획 원리』 등을 집필한, 중국 도시계획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둥젠훙이 책임 집필했으며, 퉁지 대학 도시계획과의 동료들도 집필에 참여했다. 제1강과 제2강은 고대 도시의 유형과 명칭에 대한 개괄이다. 제3강부터 제9강까지는 특정 도시를 하나씩 다룬다. 제10강은 강남의 수향 마을을 포괄적으로 설명한다. 제11강부터 제20강까지는 거주 구역, 시장, 도로 시스템, 사원, 궁전, 명절, 원림 등 고대 도시의 다양한 측면을 개괄하고 있다. 3강에서 9강까지 다뤄지는 도시는 바로 장안ㆍ개봉ㆍ북경ㆍ천주ㆍ소주ㆍ평요ㆍ여강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 일곱 도시일까? 장안ㆍ개봉ㆍ북경은 역사적으로 각각 수ㆍ당, 송, 원ㆍ명ㆍ청을 대표하는 수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천주는 고대의 국제적인 대항구 도시, 소주는 2000여 년 전의 도시 구조가 보존되어 있는 도시, 평요와 여강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도시다. 이쯤 되면 이상의 일곱 도시를 선택한 저자의 일관된 맥락이 궁금해진다. “도시계획과 건설의 측면에서 중국 고대 도시의 뛰어난 성취는 오랫동안 쇠하지 않고 흥성한 중국의 찬란한 문화를 증명해준다.” 바로 이 맥락을 장악해야만 왜 하필 이 일곱 도시가 아니라 ‘반드시’ 이 일곱 도시여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유달리 애착을 보인 도시들은 현재 중국인의 ‘문화적 자원’이자 ‘자긍심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고대 도시를 보존하기 위해 북경을 비롯한 각 시에서는 다양한 ‘역사 문화 명성 보호계획’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 문화 명성 보호는 건설로 인한 파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한다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유적지와 고적을 재건하고 옛 모습을 재현하는 일이 문화유산 보호라고 잘못 이해한 결과, 원래의 고적을 없애고 가짜 고적을 만드는 얼토당토않은 일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오늘날 팍스 시니카Pax Sinica를 꿈꾸는 중국은 찬란한 과거를 미래의 동력으로 소환하는 중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자장 안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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