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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 이토 다카시
  • |
  • 알마
  • |
  • 2017-03-31 출간
  • |
  • 332페이지
  • |
  • 142 X 208 X 27 mm /647g
  • |
  • ISBN 979115992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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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유언이 된 증언

위안부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기억
40여 년간 피해 여성들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한 포토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는 취재 의욕을 순간 잃어버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여성이나 타민족에 대한 차별 의식을 물어보아야 했다”

책 소개
인간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사죄와 법적 배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남한과 북한 여성들
그들의 증언과 사진이 담긴 이 책은 피해 여성들의 깊은 슬픔이며, 유언이다

생존자 39명
한국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일본 정부가 10억 엔 규모의 예산을 출연하는 조건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합의했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합의였다. 일본 정부의 사죄 또한 없었다.
2017년 1월 18일, 박차순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날 기준으로 생존자는 39명뿐이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기억은 급속히 풍화해간다. ≪기억하겠습니다-일본군 위안부가 된 남한과 북한의 여성들≫에는 세상을 떠난 남한 여성 아홉 명과 북한 여성 열한 명의 증언과 사진이 담겼다.

분노와 슬픔을 마주하다
이 책의 저자 이토 다카시는 포토저널리스트다. 1981년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오가면서 원자폭탄 피해 실태를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약 7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피폭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일본은 물론 한반도에 사는 피폭자들을 취재했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취재한 피해자는 800여 명에 이른다. 그는 말한다.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해야 하는 일은, 일본에 의해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규모에 대해서는 8만 명에서 20만 명 등의 수치가 있지만 모두 추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규모와 관계없이 상당히 많은 여성이 ‘국가에 의해’ 성노예가 되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 오점을 남긴 큰 사건이다. 이만큼 대규모로 여성을 군대 전용의 성노예로 만든 국가는 일본뿐이다.
‘국가에 의한 범죄’가 할머니들의 용기 있는 고발로 폭로되기 시작됐다. 할머니들의 분노가 담긴 언어와 기백으로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는 밝혀졌다. 이토 다카시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취재하면서, 자신에게 여성이나 타민족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했다. 그는 일본의 과거를 일본인이 직접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분노와 슬픔을 정면에서 마주하겠다고 결심했다.

소중한 목소리들
심미자 할머니가 2008년 2월 27일,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심미자 할머니는 이토 다카시에게 “내가 죽으면 와줄 거냐”고 물었다. 그는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는 일본의 국가 폭력에 스스로 가담하지 않았지만, 무거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모은 자료는 셀 수 없이 많다. 신문 스크랩부터 녹음테이프, 동영상 파일 등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보존해왔다. ≪기억하겠습니다?일본군 위안부가 된 남한과 북한의 여성들≫은 그가 40년 가까이 ‘기록’해온 소중한 목소리다.
비교적 한국에 알려져 있지 않은 북한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상기시킨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귀국했지만, 분단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거나 심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일본 정부는 시대와 역행하는 행보를 보인다. 역사 교과서 문제를 비롯하여, “피해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한 사실이 없다” “피해 여성들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토 다카시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는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여성들의 증언을, 다시금 우리 사회에 전하는 것의 중요함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기억하겠습니다
공동번역을 맡은 안해룡 감독은 1995년부터 아시아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그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주제를 담은 이토 다카시의 작품을 보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왜 한국의 사진가들은 이러한 주제로 작업하지 않는가 생각했다. 그후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던 흔적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오키나와에서 규슈, 일본 본토를 넘어 홋카이도, 사할린까지.
‘노청자’ ‘이귀분’ ‘김영실’ ‘리상옥’ ‘심미자’ ‘김대일’ ‘강순애’ ‘황금주’ ‘곽금녀’ ‘문옥주’ ‘리계월’ ‘강덕경’ ‘리복녀’ ‘김학순’ ‘심달연’ ‘리경생’ ‘유선옥’ ‘정옥순’ ‘김영숙’ ‘박영심’
우리가 이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기억하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지금의 문제이고, 미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하지 않는 세계,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지 않는 세계,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자고 외친다.
기억은 투쟁이다. 잊지 않겠다는 마음이 모여, 우리는 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일본군의 ‘소모품’이 되어 인간의 존엄을 철저하게 유린당한 여성들…. 그들은 지금도 일본에 대한 격한 분노와 증오를 가슴에 담고 있다. 이것은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일본인을 향하기도 한다. 피해 여성의 처지에서 보면 나는 일본인이다. 그런 내가 그들이 일본군에게 피해를 보았던 당시 상황을 취재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구나 필자가 피해 여성들을 취재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증언하기 시작한 직후다. (…) 눈앞에 있던 내가 순간 일본군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 피해 여성들에 대한 취재를 계속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일본의 중대한 국가 범죄를 분명하게 규명하는 것이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과거의 교훈을 통해 계속 진보해왔다. 하지만 근대 일본은 이러한 보편적 진리를 의도적으로 외면해왔다. (…)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해야 하는 일은 과거에 일본의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라 다짐한다. (…) 과거와 마주하지 않는 일본 정부, 그리고 이를 용인하는 일본 사회가 향하고 있는 것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다. (…)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피해자의 경험을 기록해서 후세에 남겨야 할 것이다. 이 책이 이런 일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책속으로 추가
심미자_정신을 차리니 후쿠오카의 위안소였습니다
내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게 만든 사람이 나쁘지 내가 나쁜 것이 아니잖아요. 나는 대놓고 위안부 때 일을 말하고 있지만, 위안부가 되었던 수십만 명의 여자 대부분은 말하지 못하고 있어요._100쪽

김대일_150명의 여자를 나란히 세우고 목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50명을 상대하다가 몸이 견디다 못해 쓰러진 적도 있었어요. ‘노신’이라는 약을 먹기는 했지만, 의식이 몽롱한 상태였지요. 병사는 불붙은 담배를 내 코와 자궁에 넣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장교는 “이제 나는 질렸으니 필요없다”라며 나를 군견인 셰퍼드가 덮치게 했습니다. 나는 두려운 나머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 일본의 패전이 명확해지자 병사들은 우리 조선인과 중국인 여자 150명 정도를 두 줄로 나란히 세웠어요. 소대장이 명령하자 여자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피가 비처럼 쏟아졌고,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지요.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 시체 속에 묻혀 있었어요. 이 피바다 속에서 살아난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습니다._108~113쪽

강순애_공습이 심해져도 위안소에는 군인들이 줄을 섰습니다
주에 한 번 ‘유로로병원’에서 군의관에게 검진을 받았어요. 성병 감염 예방을 위해 606호 주사를 맞았고, 통증이 심할 때는 모르핀 주사를 맞고 아스피린을 받았습니다. 콘돔이 상비되어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는 병사도 있었어요. 사용해달라고 부탁하면 발로 배를 차는 병사도 있었지요. 군인들은 위안소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행동했어요. 어떤 군인은 여자의 유방과 성기를 총칼로 도려내기도 했고요…._123쪽

황금주_벌거벗은 여자는 일본군 장교에게 반항하다 성기에 권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나는 병사에게 성병을 옮았어요. 그후 성교를 하면 병이 옮는다고 “성기를 핥아라” “정액을 먹어라”고 요구하는 병사도 있었습니다. 나는 남자의 성기를 본 적도 없는 어린아이였어요. “그런 짓을 할 바엔 똥을 먹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지요. 지금도 우유를 보면 정액이 생각나서 마시지 못해요. (…) 나보다 조금 나이가 든 한 여자는 장교와 심하게 싸우기도 했어요. 장교에게 차여도 몇 번이나 물고 늘어졌어요. 실신했다가 다시 정신차리면 또 반항했습니다. 이 벌거벗은 여자는 성기에 권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일본인이 자행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_138~139쪽

곽금녀_죽인 위안부들을 지하실에 버렸습니다
일본이 저지른 범죄는 큰 죄입니다. 나는 인생이 개화할 무렵 일본군에게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내가 열매 맺기도 전에 나를 망가트렸어요. 많은 조선의 딸이 멀리 동남아시아 등 전장으로 끌려갔습니다. 하루에 20~30명의 병사에게 당해야 했고, 노예처럼 취급당했어요. 일본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도망칠 수 있어서 이렇게 살아 있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던 딸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나요? 이런 일을 저지른 국가가 세계 어디에 있나요?_153쪽

문옥주_한 사람이 하루에 30~70명을 상대했습니다
아직도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합니다. 자려고 하면 어떤 광경이 너무도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울면서 깨는 일도 많아요.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랑군에서 자살한 여자의 시체를 태울 때입니다. 잘 타도록 막대기로 쑤셨는데 시체에서 기름이 흘러나왔어요. 이 때문에 귀국해서도 2년 정도는 불고기를 먹지 못했지요. 지금도 볼 때마다 생각이 날 정도예요. 다른 일도 있었어요. 아카브에서 공습이 있을 때면 사이렌이 울리고 했는데, 한국에 야간통행금지가 있을 시절 자정 사이렌을 듣고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했지요._169~170쪽


리계월_임신하면 아무짝에 쓸모없으니 죽어라
우리의 식사는 보리, 태국쌀, 조 등이었고, 된장국은 본 적도 없었어요. 하지만 군견에게는 소고기와 채소가 들어간 국을 주고 있었지요. (…) “너희 조선 년들은 100명이 죽어도 아무 상관이 없어! 이년은 임신해서 아무짝에 쓸모가 없으니까 죽여라.” 병사가 에이코의 배를 군도로 갈랐어요. 하지만 태아는 없었지요. 임신한 게 아니라 복수가 찼던 거지요. 에이코를 들판에 내다버리자 개들이 뜯어먹었습니다. 이를 본 우리는 정신을 잃었어요._181쪽

강덕경_근로정신대로 갔다가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도야마에서 근로정신대로 일할 때도, 도망가다 잡혀서 위안부가 되었을 때도 돈을 받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돈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희생된 것처럼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고 싶어요. 귀국한 다음에도 비참한 생활을 해왔지만 이제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도 걱정입니다._209~210쪽

리복녀_군인은 그녀의 머리를 잘라 끊는 물에 넣었고, 그것을 마시라고 강요했습니다
어느 날 여자 두 명이 병사를 상대하는 걸 거부했어요. 두 여자는 두 팔이 묶인 채 정원으로 끌려나왔습니다. 병사들은 우리를 불러 모으더니 두 여자를 높은 나무에 매달았어요. 그들은 병사들에게 “개 같은 너희들의 말 따위는 듣지 않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놈들은 칼로 여자들의 유방을 도려냈어요. 피가 솟구쳤습니다. 너무나 잔인해 나는 기절했지요. 병사들은 여자들의 머리를 잘라 끊는 물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마시라고 강요했습니다. 거부하면 우리도 죽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마셨습니다._216~217쪽

김학순_한국과 일본의 젊은이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집 안에서 혼자 꼼짝하지 않고 앉아 옛날을 생각합니다. 신문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기사를 읽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는 것을 언제나 가슴에 안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이 문제를 일본에 호소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죽기 전에 이 체험을 폭로하고 마음의 짐을 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이름을 밝히고 증언한 거예요._227쪽

빼앗긴 기억을 찾아_일본군 위안부 심달연 할머니의 강제 동원 현장에서
일본군에게서 옮은 매독으로 자궁에서는 고름이 흘러나왔고, 다리 관절에는 물이 차서 화장실도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필자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허망했다. 우여곡절 끝에 귀국했지만, 극도의 대인공포증에 시달리면서 심한 매독 후유증에 고통 받는 피해 여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_237쪽

일본에 대한 한, 전쟁에 대한 한_위안부였음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미자 할머니는 자신의 경험을 조금 이야기한 다음 반드시 심각한 어투로 “지금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느냐”고 필자에게 물었다. 이에 답하지 못하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대화는 이런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내가 심미자 할머니를 취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가 일본이 조선에게 자행했던 사실에 대한 나의 인식을 심문하는 모양새였다. (…)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여성들에 대한 취재는 내가 일본인이라는 것, 그리고 남성이라는 것이 민감한 걸림돌이 되었다. 스스로 가담하지 않았지만 일본이 저지른 가해에 대한 책임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심미자 할머니의 취재를 통해 이를 깨닫게 된 나는 피해 할머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더라도 똑바로 마주하리라 마음먹었다._254~255쪽

북한에 있는 성노예 피해자들_가늠할 수 없는 고뇌 끝에서 토해낸 과거
일본군에 의해 극도로 잔인한 취급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피해 여성들이 있다. 그 증언 내용을 검토하였지만 의심스러운 점은 없었다. (…) 여성이 임신하면 자궁채로 태아를 적출했다 (…) 도망쳤다는 이유로 전신에 문신을 했다 (…) 인육을 끓인 국을 마시게 했다 (…) 일본군은 패전을 앞두고 군 위안소에서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 취재한 피해 여성들은 (…) 대부분 건강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 지팡이 없이는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말도 겨우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죽음이 목전인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태의 여성들이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_299~306쪽

무궁화에 둘러싸여_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할머니의 죽음
일본군에게 능욕당하고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살았지만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고, 그녀 자신은 경건한 크리스찬이었던 김학순 할머니. 그는 조선 민족의 여성으로서 자랑스럽게 살아가려고 했다. 가까웠던 할머니들이 국민기금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분명하게 이를 거부했던 점에서도 그녀의 올곧음을 느꼈다.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 경험을 세상에 털어놓고 나서 6년 동안 첫 증언자로서 누구보다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나는 김학순 할머니의 작은 묘에 한 삽 흙을 떠서 덮었다. 그리고 말을 건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_315~316쪽

지은이 후기_용서할 수 없는 행위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는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여성들의 증언을, 다시금 우리 사회에 전하는 것의 중요함을 통감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이해는 점점 후퇴하고 있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피해 여성들에 대한 기술이 줄거나 삭제되었다. 그리고 일본 정치가들은 “피해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동원한 사실이 없다” “피해 여성들의 증언은 거짓이다”며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망언을 계속하고 있다._319쪽

옮긴이 후기_우리는 얼마나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다’는 명제는 언제나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서 배운 식민지 피해의 역사를 우리는 얼마나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여성이기 때문에 50년 이상의 침묵의 세월을 흘려보내야 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만이 아니다. 식민지 지배하에서도 권력을 갖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던 가난한 민중들의 피해의 역사. 기록자로서, 저널리스트로서 식민지 피해의 체험을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귀담아듣고 기록해왔는가를 반성한다._326쪽

목차

한국어판에 부쳐
들어가며

피해자 증언
노청자_내 존재가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귀분_조선인 특공대와 함께 노래하며 울었습니다
김영실_일본군 장교가 어린 도키코의 머리를 베어버렸습니다
리상옥_우리 셋은 처녀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동원되었습니다
심미자_정신을 차리니 후쿠오카의 위안소였습니다
김대일_150명의 여자를 나란히 세우고 목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강순애_공습이 심해져도 위안소에는 군인들이 줄을 섰습니다
황금주_벌거벗은 여자는 일본군 장교에게 반항하다 성기에 권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곽금녀_죽인 위안부들을 지하실에 버렸습니다
문옥주_한 사람이 하루에 30~70명을 상대했습니다
리계월_임신하면 아무짝에 쓸모없으니 죽어라
강덕경_근로정신대로 갔다가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리복녀_군인은 그녀의 머리를 잘라 끓는 물에 넣었고, 그것을 마시라고 강요했습니다
김학순_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르포르타주
빼앗긴 기억을 찾아_일본군 위안부 심달연 할머니의 강제 동원 현장에서
일본에 대한 한, 전쟁에 대한 한_위안부였음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에 있는 성노예 피해자들_가늠할 수 없는 고뇌 끝에서 토해낸 과거
무궁화에 둘러싸여_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할머니의 죽음

지은이 후기
옮긴이 후기

저자소개

저자 이토 다카시伊藤孝司는 1952년 나가노현에서 출생했다. 포토저널리스트로 아시아 민중의 관점에서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취재를 계속하고 있다. 일본이 일으킨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의 사람들과 일본이 관계한 아시아의 대규모 환경 파괴 현장을 취재해 잡지와 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일본과 한국, 일본과 북한의 관계에 대한 취재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는 《지구를 죽이지마라?환경파괴대국일본地球を殺すな!―環境破?大?·日本》(風媒社, 2004), 《히로시마·평양ヒロシマ·ピョンヤン》(風媒社, 2010), 《평양에서의 고발平?からの告?》(風媒社, 2001), 《속·평양에서의 고발?·平?からの告?》(風媒社, 2002), 《파괴된 침묵破られた沈?》(風媒社, 1993), 《아시아의 전쟁 피해자들アジアの??被害者たち》(草の根出版?, 1997), 《버려진 황군棄てられた皇軍》(影書房, 1995), 《원폭피해자 기민原爆棄民》(ほるぷ出版, 1987) 등이 있다. 다큐멘터리로는 등이 있다.

도서소개

포토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의 『기억하겠습니다』. 세상을 떠난 남한 여성 아홉 명과 북한 여성 열한 명의 증언과 사진을 담은 책이다. 1981년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오가면서 원자폭탄 피해 실태를 취재한 저자는 그 과정에서 약 7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피폭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일본은 물론 한반도에 사는 피폭자들을 취재했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취재한 피해자는 800여 명에 이른다. 그는 말한다.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해야 하는 일은, 일본에 의해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국가에 의한 범죄’가 할머니들의 용기 있는 고발로 폭로되기 시작됐다. 할머니들의 분노가 담긴 언어와 기백으로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는 밝혀졌다. 이토 다카시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취재하면서, 자신에게 여성이나 타민족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했다. 그는 일본의 과거를 일본인이 직접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분노와 슬픔을 정면에서 마주하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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