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란 무엇인가』 내용
프로이트와 타일러에서부터 레비스트로스와 캠벨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신화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고의 ‘신화 이론 안내서’
이 책은 ‘신화’에 대한 안내서가 아니라 신화에 대한 ‘접근법’, 즉 ‘신화 이론’에 대한 안내서이며, 또한 그 범위가 근현대 이론에 한정된다. 근현대의 서양에서 신화를 읽는 이론의 역사는 그것 자체가 곧 서양 근현대의 정신사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채롭다. 신화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서양 근현대 문명은 ‘신화’에 대한 이론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 온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화를 가장 단순하게 이야기라고 규정하고, 그런 이야기들이 본래부터 순수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파되고, 왜곡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신화 만들기의 산물임을 여러 이론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화를 해석하는 신화 이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 즉 이론의 저자가 과거의 이야기를 토대로 재구성한 또 다른 신화(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여러 이론들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따라가는 작업은, 그 이론의 배경이 되는 사회적, 사상적 맥락과 배경을 이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아도니스 신화의 해석을 통해 여러 신화 이론을 비교
이 책에서는 신화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분야를 과학, 철학, 종교, 의례, 문학, 심리학, 구조, 정치 8개로 나누고, 타일러, 프레이저, 레비브륄, 레비스트로스, 카시러, 불트만, 엘리아데, 부케르트, 프로이트, 융, 캠벨, 말리노프스키 등의 이론을 다룬다.
신화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에서 예로 드는 신화는 의외로 딱 한 가지다. 바로 아프로디테의 연인 아도니스에 관한 신화다. 저자는 신화 이론을 적용하기 위해 아도니스 신화를 예로 드는 이유로, 무엇보다 그 이야기가 세부적으로 서로 다른 내용을 가진 여러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이 현대의 여러 신화 연구자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린 이야기였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처럼 공통의 신화를 통해 여러 신화 이론들을 설명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 이론들 간의 차이와 특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신화란 무엇인가』가 복잡한 이론 나열 중심의 다른 신화이론서와 차별되는 지점이다.
프레이저는 아도니스 신화를 모든 신화 중에서 으뜸이 되는 중요한 범례적 신화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신화는 프레이저가 가장 중요한 신이라고 생각하는 식물신의 일생을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프레이저는 아도니스 신화는 의례에서 실제로 공연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의례는 주술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의례를 행하는 사람들은 아도니스의 귀환을 의례에서 재연함으로써 식물신의 귀환을 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농작물의 귀환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신화는 단순히 왜 농작물이 죽는지(농작물이 죽는 이유는 아도니스가 죽은 자의 장소로 내려가면서 죽었기 때문이다)를 설명하는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물이 실제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 1장 「신화와 과학」
만일 레비브륄이 아도니스 신화를 해석한다면, 그는 분명히 아도니스와 세계 사이의 신비적 관계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아도니스는 세상의 위험에 관한 어떤 경고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세계 안에서 편안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세계와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편안하다고 여긴다. 그는 여신들을 자기의 어머니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여신들로부터 얻으려는 것이 성적 결합이 아니라 자궁-같은 통합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다. 아도니스와 여신들 사이에는 레비브륄이 ‘신비적 참여’라고 부르는 하나됨의 원초적 관계가 존재한다. - 1장 「신화와 과학」
불트만이라면 아도니스 신화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불트만은 분명히 아도니스가 발견한 자기만의 세계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아도니스는 부드러운 여신들의 품에 안긴 평화로운 상태를 결코 벗어나지 않고, 자궁같이 전적으로 안전하고 보호받는 세계 안에서 양육된다. 그 세계 안에 깊이 잠겨있던 아도니스는 ‘실제’ 세계로부터 오는 위험, 즉 오비디우스 버전에서 비너스가 알려주려고 했던 위험에 대한 경고를 전혀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 탈신화화를 거치면, 아도니스 신화는 세상에서 경험하는 대립적 갈등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립은,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미성숙과 성숙의 대립이다. - 3장 「신화와 종교」
아도니스는 원래 셈족의 신이었기 때문에, 스미스는 자신의 책(『강의』)에서 그에 대해 논의한다. 그리고 그는 고대 종교 안에는 죄 관념이 없었다는 그의 전체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식물의 신 아도니스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과 대비시킨다. -4장 「신화와 의례」
융 학파의 관점에 따르면, 아도니스의 신화는 단지 ‘영원한 어린이’ 원형을 제시하는 것으로 기능할 뿐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평가하는 기능을 한다. 이 신화는 스스로를 어린이 원형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던진다. 아도니스처럼 영원한 어린이로 산다는 것은 심리학적인 어린애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태아로 사는 것이다. 신화에 있어 ‘영원한 어린이’의 삶은 예외 없이 미숙한 죽음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아의 죽음과 자궁 같은 무의식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그러나 회귀는 프로이트 이후의 랑크가 말하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자궁으로의 회귀와는 다른 것이다. -6장 「신화와 심리학」
신화와 과학: 신화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이유는?
만일 타일러와 프레이저의 입장으로 일반화가 가능하다면, 19세기의 신화 이론들은 신화를 전적으로 자연세계에 관한 것으로 보았다. 신화는 종교의 일부로 여겨졌고, 종교는 과학의 원시적 대응물로 여겨졌으며, 과학은 거의 전적으로 현대적이라고 여겨졌다. 20세기에는 타일러와 프레이저의 이론이 여러 가지 이유로 냉정하게 거부되었다. 그들의 이론이 신화를 과학과 대립적인 것으로 봄에 따라 전통적인 신화를 배제했고, 종교 밑에 신화를 둠에 따라 세속적 신화를 배제했으며, 신화의 주제 문제를 자연세계라고 생각했으며, 신화의 기능을 설명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신화는 거짓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20세기 이론들은 과학에 직면해서 신화를 보존하려고 도전적으로 애써왔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세계에 대한 지배적 설명으로서의 ‘과학’에 도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과학의 ‘상대화’나 과학의 ‘사회화’ 또는 과학의 ‘신화화’ 등 그 어떤 쉬운 길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로 신화를 재규정했다. 신화는 여전히 세계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기는 하지만, 이 경우 그 기능은 과학의 기능과 다르다는 입장이다(말리노프스키, 엘리아데). 또는 심지어 신화가 자연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상징적으로 읽거나(불트만, 요나스, 카뮈), 둘 다를 포함하기도 한다(프로이트, 랑크, 융, 캠벨). 20세기에 들어와서 신화는 재구성을 통해 과학과 화해했다. 그러나 과학의 재구성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과 함께 신화가 과학에 복종한 것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다.
그들이 과학의 우월성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신화와 과학을 굳이 화해시키려고 애쓴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왜 그들은 19세기 관점을 간단히 수용하여 과학을 지지하고 신화 없이 지내려고 하지 않았는가? 신화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신화는 보편적인가? 신화는 사실인가?
이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화는 우리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신화가 단지 과학 이전의 원시적인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관의 건축이자 우리 마음속의 깊은 곳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신화 이론들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 속 가장 깊은 곳을 탐구해 나갈 수 있으며, 이 지점에서 신화 이론은 인간학으로서 여전히 값진 통찰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