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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디 시티

윈디 시티

  • 조아라
  • |
  • 청어람
  • |
  • 2016-05-12 출간
  • |
  • 416페이지
  • |
  • 130 X 190 X 20 mm /388g
  • |
  • ISBN 9791104907807
★★★★★ 평점(10/10) | 리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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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유일하게 삶의 의지가 되어주던 사람을 잃고 찾은 바람의 도시 시카고.
거기에서 만난, 그리운 이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


시카고에서 사진을 공부하는 담조는 어느 날 우연히 또 다른 한국인 유학생을 알게 된다. 지인으로부터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 자살을 기도했었다는 얘기를 듣고 잠시 시선을 준다. 그러다 퍼포먼스 공연에서 그녀를 다시 발견하고, 담조는 그녀에게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인 형의 모습을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만나게 된 담조와 하다. 하다가 계절학기로 듣는 수업 조교는 바로 담조였고, 두 사람은 점점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담조는 그녀를 마음에 품게 되고, 하다 역시 그렇지만 그녀에겐 그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는데…….

여름 하, 아름다울 다.
고요할 담, 새길 조.

여름을 아름답게 여길 수 없는 그녀와
고요하게만 살아야 하는 그가 만났습니다.

삭막한 겨울이 물러가고
봄기운이 가득한 어느 날
푸름이 가득한 곳의 윈디 시티.

“이렇게 가만히 시카고의 야경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거든요.
어쩐지 따뜻하고, 위로를 주는 것 같아서.”

꿈이 있는 그곳, 시카고에는…….

“돌아가자, 윈디 시티로.”

그들이 있다.

-출판사 리뷰 and 만든 이 코멘트

사랑하는 이를 잃고 떠난 타국에서 만난 운명 같은 사랑.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지닌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통해 그 상처를 치유한다. 똑같은 사람을 잃은 기억에 두 사람에겐 잠깐의 아픔도 있지만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다시 마주보기를 택한다. 바람의 도시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제 그 바람 속에 슬픈 기억을 날려 버리고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 편집자L

담조는 왠지 형의 느낌이 나는 그녀에게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 되더라도 포기할 수 있었다. 하다는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관계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라 생각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픔이 있던 이들이 낯선 도시에서 서로에게 이끌리듯이 사랑에 빠졌다. / 편집자C

태어난 땅에서 내 존재를 외면당하는 서글픔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괴로운 기억만 남은 고향을 떠나는 이의 마음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누군가의 말마따나 ‘고향’은 꼭 장소일 필요가 없다. 그러니 서로에게 고향이 되어준 이들은 어느 곳에서든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 편집자J

- 책속으로 추가

복도 맨 끝에 있는 실기실에서 남색 앞치마를 입은 수아가 문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뭘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오라고 해?”
빈 교실에서 홀로 작업 중이었는지 넓은 공간에 학생이라곤 달랑 수아 한 명뿐이었다. 담조처럼 그녀의 등쌀에 못 이겨 이곳까지 행차한 석진은 ‘내 말이 그 말이다’라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일 크리틱 있다고, 그림 좀 봐달란다.”
“……우리는 영상이랑 사진 전공이잖아.”
바지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담조는 고개만 돌려 수아를 쳐다봤다.
“차라리 네 친구들한테 물어보지그래.”
“전공 다르다고 그림을 못 봐? 둘 다 아무 전시회나 잘만 쏘다니면서 내가 부탁만 하면 그렇게 생색내더라.”
눈을 가늘게 뜨고 비죽거리던 수아는 어서 보라는 듯 벽에 늘어놓은 그림 네 점을 가리켰다.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담조는 몸 방향만 슬쩍 비틀어 그림들을 주시했다.
“뭐…… 잘했네.”
“그게 다야?”
“그럼 여기서 더 얘기할 게 있어?”
“크리틱 하는 것처럼 말해 달라고, 크리틱!”
“정말 진심으로 할까?”
슬쩍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짓궂어졌다. 장난스러워 보여도 그 안에 감춰진 진지함을 알고 있는 수아는 뭐라 반박하려다가 포기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됐어. 보나마나 감동이 없네, 취향이 아니네, 독설만 늘어놓을 거면서.”
“잘 아네.”
씩 웃은 담조는 수아의 앞머리를 장난스럽게 흩뜨렸다. 그런 그를 쳐다보는 수아의 눈빛이 은밀하게 흔들리는 걸, 석진은 묵묵히 지켜보았다. 꾹꾹 숨기려 해도 못다 한 순정을 전부 감추기엔 그의 사촌동생은 아직 어렸다.
“그럼 우리 간다.”
“잘 가라! 하여간 둘 다 쌍으로 못됐어.”
일하러 가기 전에 잠시 들른 거라 그들은 수아가 뒷정리하는 걸 기다려 줄 수 없었다. 반쯤 빨다 만 붓을 손에 쥐고서 소리치는 그녀를 뒤로하고 석진은 킬킬거리며 교실 문을 닫았다.
“어휴, 저 녀석 갈수록 피곤해지네.”
“봐줘야지. 한국에서 힘들게 붙은 대학들 다 놔두고 형 따라 여기까지 온 거잖아.”
“나를 따라?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 아니지?”
담조는 별다른 대답 없이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그것이 더 이상 이 주제로 입을 열지 않겠다는 것임을, 그리고 그걸 꺾기엔 그가 소고집임을 잘 알기에 석진은 그저 속으로 ‘불쌍한 내 동생’ 하며 찌뿌듯한 목을 문질렀다.
계단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 담조의 눈에 유리 진열장에 걸려 있는 그림 하나가 들어왔다. 걸음이 저절로 느려지다가 이내 그 앞에 멈춰 섰다. 꽤 널찍한 진열장 안을 가득 채운 캔버스 한 점. 두 팔 벌려야 간신히 잡힐 것 같은 너비와 그의 상체만 한 높이의 유화 작품이었다.
젯소를 칠하지 않은 날것의 캔버스 위에 여러 개의 사람 손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검은 물감 사이로 유영하고 있었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비율에도 맞지 않고 시점도 맞지 않았지만 역동적이고 난폭했다. 보는 이에게 한 차례씩 폭격을 퍼붓는 것 같았다. 발바닥 밑에서부터 피어오른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뭐 해? 어서 가자.”
“아, 응.”
학생들 작품을 보여주려고 만든 진열대 같은데, 아쉽게도 이름이 없었다. 문을 열고서 기다리는 석진 때문에 담조는 결국 뭉그적거리며 억지로 발걸음을 떼었다.
“왜 그래?”
“아니, 좀…… 오랜만에 맘에 드는 그림을 봐서.”
“호오, 구담조의 극찬인데. 옆에 수아가 있었다면 난리가 났을 거야.”
석진이 키득거리며 응수하는 사이, 그들은 계단을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와 복도 맨 끝에 있는 퍼포먼스과 전용 대강당으로 향했다.
「조명 다시 한 번 켜봐.」
「프로젝터 점검 끝났어?」
「누가 샌드백 좀 더 가져와 봐! 삼각대 흔들리잖아.」
크림색 불빛이 은은하게 깔린 대강당은 분주했다. 내일 저녁에 있을 퍼포먼스 쇼의 오프닝 리셉션과 그 전에 있을 리허설에 맞추려면 오늘 반드시 모든 설치 작업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총괄 지휘자인 데이빗은 대강당 한복판에 서 있었다. 카메라 배치에 대해 의논하는 건지 퍼포먼스과의 학장과 도면을 보며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들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왔어?」
담조보다 두 살 많은 석진은 작년에 석사를 마친 뒤 학교 행사 전담 스태프가 되었다. 그런 그가 아직 학생인 담조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내일 있을 MFA 퍼포먼스 쇼를 준비하던 중 촬영 어시스턴트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귀찮은 건 죽어도 하지 않는 도도한 구담조를 설득하느라 조금 애먹었지만 꽤 높은 일당은 그의 콧대를 부러뜨리기엔 충분했다.
「우리가 혹시 늦은 거예요?」
데이빗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딱 맞춰서 왔어. 아 참, 미디어 센터에서 연락 왔는데 우리가 맥클린까지 갈 필요 없대. 여기 콜럼버스까지 사람 보내준다고 했거든.」
「그거 다행이네요.」
맥클린 빌딩은 학교 건물들 중 하나로, 그곳에 위치한 미디어 센터가 영상학과들이 쓰는 전문 카메라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콜럼버스 빌딩은 다른 건물들과 제법 떨어져 있어서 직접 장비들을 보내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어라, 쟤는…….」
촬영 계획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도중, 문득 고개를 든 석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담조도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따라 강당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스무 살 갓 넘었을까. 강당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아담하고 앳된 동양 여자였다. 미디어 센터에서 왔는지 그녀는 카메라 가방을 잔뜩 실은 검은 카트를 끌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푸른 스키니 진에 하얀 티셔츠. 그 위에 걸친, 자작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빈티지 풍의 조끼. 오목조목한 인상과 옷 스타일을 보자마자 한국 유학생일 거란 직감이 들었다. 담조는 다시 석진을 쳐다봤다.
「왜?」
「아니, 그게…….」
데이빗은 다른 쪽을 점검하느라 잠시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망설이듯 머리를 긁적인 석진은 주위를 살피다가 이내 목소리를 낮추며 한국말로 입을 열었다.
“수아가 한국에서 예고 나온 거 알지? 저번에 집에 데려다주다가 우연히 저 애랑 길에서 마주쳤거든. 짧게 인사를 나누기에 아는 사이냐고 물었더니, 예고 일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고…… 자살 기도한 애로 유명했다더라.”
무심하기만 하던 담조의 눈이 그제야 석진을 향했다.
“자살 기도?”
“응, 여름방학 후에 갑자기 학교를 안 나와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애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있었대. 그 후엔 시골로 전학 갔다는 얘기만 들리고 아무도 소식을 몰랐는데 여기서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더라고.”
아무 말 없이 미간을 찌푸린 담조는 손에 든 카메라 배치도를 보다가, 다시 여학생을 흘긋 쳐다보았다. 카메라 담당자를 찾고 있는지 여학생은 여전히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자살. 그 위화감 섞인 단어에 기분이 나쁘거나 측은함이 드는 건 아니었다. 호기심도 들지 않았다. 그저, 본의 아니게 뒷담을 하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찜찜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옆에 있는 남자의 도움으로 카메라 담당자를 찾은 게 분명했다. 순간 뜨끔하는데 여학생이 카트를 밀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두 분 중 누가 석진이죠?」
여자의 영어발음은 부드러웠다. 과장스럽지 않고 소극적이지도 않은, 굳이 따지자면 명랑함이 드는 능숙한 말씨. 석진이 자신이라고 밝히자 여자는 살짝 미소 지으며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짙은 보조개가 하얀 뺨에 살며시 패여 들었다.
「여기에 사인 해주시고요. 카메라들은 거기에 적힌 시간까지 돌려주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석진이라는 이름을 봤으면 그가 한국인이란 걸 알 텐데도 여자는 굳이 한국어를 쓰지 않았다. 석진도 영어로 대답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않는 이상 잘 모르거나 처음 본 사람에게 영어를 쓰는 건 유학생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 다 됐습니다.」
사인한 종이의 점선을 따라 둘로 찢은 여자는 그중 한쪽을 석진에게 건넨 뒤 카트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할 일을 모두 마쳐 개운하다는 듯 작게 흥얼거리며 콩콩 뛰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뒷짐 진 손 안에선 얇은 종이가 꼬리처럼 팔랑거렸다. 담조는 그 여유롭고 발랄한 몸짓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도저히…….
“도저히 자살 기도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옆에서 석진이 중얼거렸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알아선 안 될 사실을 알아버린 느낌. 검은 파도처럼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보며, 담조는 자신의 가슴 한구석이 쓸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 시선을 거두며 석진을 따라 카메라 가방들을 하나둘씩 열어 세팅을 시작했다. 강당 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여명처럼 흐릿하게 들려왔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시카고의 야경이 남색 밤하늘에 수를 놓기 시작했다. 오렌지 크림색의 옅은 조명이 내리쬐는 강당 안은 긴 줄을 기다려 들어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사히 모든 작업을 마친 담조도 관객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다음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방송실의 조그만 창문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석진이 보였다. 도와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비디오 촬영은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석진과 눈이 마주친 담조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석진이 엄지를 들며 눈을 찡긋했다.
공연은 개인 퍼포먼스가 끝나면 십 분씩 휴식 시간을 주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역시 석사 학생들이어서 그런가. 별 기대 없이 관람을 시작했던 담조는 생각보다 질 좋고 심오한 공연에 내심 놀랐다. 내년엔 자신도 졸업인데 졸업 작품으로 뭘 준비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팸플릿을 펼쳐 다음 공연의 제목을 살폈다. 줄리엔 가이치먼트라는 학생의 . 앞선 공연들과 달리 이번엔 서서 관람하는 건지 주변에 의자가 없었다.
조명이 서서히 꺼지면서 어느덧 한 치 앞도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사위가 어두워졌다. 잠잠해진 관중 속에 있으니 주변 사람들의 숨소리와 재채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위이잉.
프로젝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정면에 놓인 벽 전체에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하고 새파란 가을 하늘 아래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순간 몸이 굳었다.
쏴아아, 강당 안을 가득 메우는 바람 소리에 맞춰 갈대들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일순 가슴을 내리치는 아련함에 담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바람 소리에 맞춰 알싸하게 떨리는 심장이 가슴 깊이 묻어둔 향수(鄕愁)를 불러 일으켰다. 눈앞에 펼쳐진 지독한 데자뷰. 귀신에 홀린 듯 영상을 보고 있는 그때, 강한 스포트라이트가 팟, 강당의 한구석을 밝혔다.
분명 방금 전만 해도 아무도 없던 자리에 여자가 있었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의자에 기대 앉아 있는 그녀는 새하얀 조명에 창백한 이마와 두 뺨이 도자기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곱게 감긴 속눈썹과 살짝 벌린 입술은 탐스러운 과실을 떠올리게 했다. 그 모습을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여자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동양 인형.
천상에서 내려온 미모도, 숨 막힐 듯 아름다운 몸매도 아니었지만 조명 밑에 드러난 가냘픈 팔다리와 가는 선이 관중의 시선을 끌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영상과 갈대밭이 물결치는 생생한 바람 소리. 그리고 그 속에서 잠이 든 여자. 죽은 듯 편히 잠든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한데도, 강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서 말초적인 유혹을 받고 있었다.
말 그대로 Dreamlike.
몽환적인.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는 그때 갈대밭을 등진 현실 속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훤칠한 키에 근육이 균형 있게 잘 잡힌 남자는 맨발에 새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담조는 숨이 멎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그 남자가 걸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분명 서양인인데, 남자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과 닮아 있었다.
“형…….”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미약한 중얼거림은 넓은 강당을 떠도는 프로젝터 소리에 묻혀 버렸다. 새벽녘 미시간 호를 에워싸는 물안개 같은 은은한 연기가 무대 위로 퍼져 나갔다. 그 사이로 남자는 차박차박 물에 젖은 발소리를 내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반주 없는 그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인형은 항상 춤을 추고 있었지.
남은 허상 속에서
의지 없이 짜인 틈새에서
춤을 추다가 영원히 눈을 감아버렸어.

여자의 주위를 맴돌며 노래를 부르던 남자는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여자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 올려 느릿하게 키스했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그의 감정은 복잡했다. 사랑, 연민, 애틋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가로질렀다. 남자가 노래를 멈춘 그 짧은 순간 관객들은 여자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아우러진 남자의 손짓, 표정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그 고요한 사위 속으로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꿈에서 깨어나길 항상 기다렸어.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버려서
이 현실에서, 이 허상에서 눈을 뜨면
다시 그 눈동자를 볼 수 있을까,
그 눈빛으로 다시 숨 쉴 수 있을까.

깨어나지 않는 그대는 잔인해.
이토록 내가 바라는데
깨어나기를 바라는데

제발, 다시 날 바라봐 줘.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자신의 감정을 노래로 승화시키는 남자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든 손이 간절하게 허공을 움켜잡더니 남자의 심장으로 다가갔다. 비틀거리던 두 다리가 무릎을 꿇으며 허물어졌다.

그 두 눈이 날 향했으면 해.
차라리 내 몸을 찢고 불태워 버려.
그럼 다시 태어날 수 있잖아.
연기가 되어 네게 흘러갈게.
그러니까…….

「제발…….」
남자가 힘겹게 내뱉은 마지막 말은, 노래가 아닌 중얼거림이었다. 남자는 두 팔과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의 죽음. 그리고…….
인형은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스륵 일어났다. 여전히 잠에 취한 듯 새까맣게 물든 몽환적인 눈동자가 관객들을 향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담조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스포트라이트와 영상이 훅 꺼지면서 시야가 어둠에 물들었다.
쏴아아…….
들리는 건, 귓가를 가득 울리는 아련한 바람 소리뿐.
그리고 그 소리마저도 희미해지며 완전히 사라졌을 때,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둘씩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브라보!」
우레 같은 함성이 강당 안을 가득 매웠다. 감동이 물결치는 그 안에서 담조는 이상하게 박수를 따라 칠 수가 없었다. 불이 다시 밝혀진 후에도 남자와 손을 잡고 인사를 하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살 기도, 그녀에게서.

목차

1.
2.
3.
4.
5.
6.
7.
8.
9.
10.
11.
가고 난 자리에 피어난 바람
작가 후기

저자소개

저자 조아라는 시카고 예술 대학에서 순수미술학부를 졸업하고 현재 뉴욕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두 젊은 작가의 저릿한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여러 형태의 인연들을 그린 (2016), 가족들의 사랑을 그린 (2012), 주방에서 펼쳐지는 두 청춘의 열정을 그린 (2013)를 썼다.

도서소개

조아라 장편소설 『윈디 시티』. 시카고에서 사진을 공부하는 담조는 어느 날 우연히 또 다른 한국인 유학생을 알게 된다. 지인으로부터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 자살을 기도했었다는 얘기를 듣고 잠시 시선을 준다. 그러다 퍼포먼스 공연에서 그녀를 다시 발견하고, 담조는 그녀에게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인 형의 모습을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만나게 된 담조와 하다. 하다가 계절학기로 듣는 수업 조교는 바로 담조였고, 두 사람은 점점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담조는 그녀를 마음에 품게 되고, 하다 역시 그렇지만 그녀에겐 그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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