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재스민은 연애 중입니다. 내 목숨까지 걸고.
재스민은 학교 짱 바네사의 남자 친구를 빼앗았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우리 같은 공부벌레들이 금발의 퀸카한테서 남자 친구를 낚아채는 날이 오다니! 파티라도 하고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재스민과 더불어 나까지 바네사 패거리의 타깃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나갈 때마다 툭툭 치질 않나 노려보질 않나. 이러다 오래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재스민은 저를 내팽개치고 남자 친구와 아주 행복하답니다. 재스민은 로맨스라도 즐기지 저는 이게 뭔가요.
오늘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보길 잘했는지도 모릅니다. 학교 컴퓨터실 뒷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바네사의 컴퓨터를 봤는데 바네사 패거리가 우리를 덮칠 궁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무슨 죄라고…….
1분 1초라도 빨리 도망가야 하는 이 순간, 재스민은 남자 친구랑 데이트 하느라 정신 팔려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데이트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니 겁이 나고,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가자니 재스민이 걱정되고.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나 후회스러운 순간이 있다
페이지는 재스민을 뒤로하고 혼자 지름길을 택해 집으로 돌아간다. 두려움과 죄책감을 안고 가던 길, 달려오는 열차에 부딪치고 만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눈을 뜨자 낯선 바닷가다. 죽기 전 영혼이 잠시 머무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거기서 어릴 적 헤어진 친구 킴을 만난다. 이사를 가버린 줄로만 알았던 킴은 일곱 살 모습 그대로 페이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페이지에게 킴은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킴은 이미 죽었고 자신은 열차에 치어 뇌사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페이지는 재스민을 혼자 두고 가려다가 이런 일을 당한 거라며 자신을 책망한다.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고 싶은 페이지는 킴을 졸라 지난 시간들을 다시 살아볼 시간을 얻어낸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운명을 되돌릴 수 있을까?
페이지에게 주어진 시간은 7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거나 자신의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남들이 알게 해선 안 된다는 규칙을 안고 일주일 전으로 돌아간다. 재스민을 지키기 위해서, 바로 영원한 우정을 위해서다. 같은 시간을 다시 살게 된 페이지 앞에 일주일 전 겪었던 것과 같은 일상이 반복되어 펼쳐진다. 하지만 페이지는 매순간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바네사 무리의 표적이 될까 봐 잔뜩 움츠러들었던 전과는 달리 수업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발표하기도 하고, 친근하게 말을 건네 오는 중국계 남자아이 맥스를 피하지도 않는다. 부모님이 금지한 햄버거를 먹어보는 사소한 일부터 그간 모른 척하고 살아왔던 자기 핏줄에 대한 탐구까지, 그동안 시도해보지 않았던 일들에 적극적으로 부딪쳐보게 된다.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한 페이지에게는 모든 일들이 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꿀 때, 시간도 환경도 내 편이 된다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전에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시도해보던 페이지는 각각의 선택들로 인해 또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경험을 한다. 그러는 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과 자기 자신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한 발짝씩 접근해간다.
학교 폭력, 입양, 우정……. 페이지의 외적 환경과 내면에 산적해 있는 문제들은 사실 그리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그러나 페이지는 다시 사는 일주일을 겪으며 그간 마주대하기 불편했던 감정과 진실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주변 인물들의 사정과 마음들을 들여다보게 되고, 이해하고 비로소 용서하게 되며 닫혀 있던 마음을 열게 된다.
죽음 앞에서도 무엇이 나를 위하고, 또 친구와 가족을 위한 길인지 옳은 답을 찾아가는 페이지를 보며 독자들은 자기 앞에 펼쳐진 문젯거리들을 정면 돌파해볼 용기를 얻을 것이다.
- 해외 리뷰
베테랑 청소년 소설 작가 실비아 맥니콜이, 중심부에서 겉도는 아이의 이야기에 오랫동안 준비해온 주제들을 담아 아주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인종 차별, 자아 인식, 세대 간 문화 충돌, 학교 폭력, 이타심 등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겹겹이 쌓인 구조 속에 배치해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등장인물들이 꽤나 신선하다.
―퀼 & 콰이어
기찻길을 건너다 사망한 십대의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실비아 맥니콜이 비극적인 죽음에 다양한 이야기를 더해 초현실적인 픽션을 만들어낸다. 생생하고 현실적인 어조로 고정관념, 인종 차별에 도전하며,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하나의 문화에 흡수되는 모습을 담았다. 겉모습에 속지 마시길. 이 소설은 죽음 뒤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하면서도 시종일관 생동감이 넘친다.
―더 글로브 앤 메일
◈ 책 속으로
재스민이 떠오르자 움찔한다. 혼자서 괜찮을까? 우리 둘이 함께라면 바네사 패거리에게 맞서는 일이 가능할까? 가당치도 않다. 패거리 열 명 모두가 육교에 나타날 테니까. 목격자 따위는 없는 편이 오히려 낫다. 도움을 받기는커녕 굴욕감만 더할 뿐이다. 다시 재스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육교 근처엔 가지 마.”
-17~18쪽
“겁이 났어. 난 겁쟁이야. 그 배구부 여자애들이 싫어.”
일어서서 킴이 만드는 성을 발로 찼다.
“재스민을 돕지 않았다는 사실이 싫어. 싫다고.”
발로 차고,
“싫어.”
또 찼다.
“싫어.”라는 말 앞에 생략한 건 ‘나’였다.
정말 싫은 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29쪽
집엔 아무도 없었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자 결심이 섰다. 내 친부모를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엄마 모르게. 부츠와 코트도 벗지 않은 채 난간을 꽉 붙잡고 절뚝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엄마가 중요한 서류를 어디에 보관했는지 나는 안다. 안방 큰 벽장 바닥에 놓인 금속 상자다.
-84쪽
나는 늦는다, 너는 늦는다, 그가 늦는다, 그녀가 늦는다, 너희들이 늦는다, 우리가 늦는다, 그들이 늦는다, 나는 이 문장들을 완벽히 프랑스어로 바꿔 읊었다.
죽기보다야 늦는 편이 낫지. 슬픔이 밀려왔다. 월요일, 학교에서 더 늦게 출발했더라면 아직 살아서 다음 주를 살고 있을 테지. 더 나은 마지막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대신.
-107쪽
“그래. 네 친부모가 이름을 남겼다면 차라리 정식으로 그곳을 방문해서 입양신청서를 작성하는 편이 나았겠지. 그렇지만 그보다는…….”
엄마는 잠깐 당황한 기색이었다.
“보육원 뒷문 가로등 아래에 날 버렸다는 말씀이죠?”
내가 엄마를 대신해 말을 마쳤다. 마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115쪽
“만약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장기를 기증해주셨으면 해요, 안구랑 폐랑 간이랑 신장이랑…….” 엄마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신장’이라는 한마디가 엄마를 자극했나 보다. 아마도 킴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아휴, 엄마. 그냥 재활용 이야기 같은 거라고요.”
나는 엄마를 웃겨서 눈물을 막아보려고 했다.
-141쪽
우리는 밀고하고, 일러바치고, 고자질하는 중이었다. 이 모든 일은 명예를 저버리는 짓이다. 하지만 나는 바네사가 뭘 할지 안다. 그런 바네사를 오늘 하루만이라도 재스민에게서 멀찌감치 떼어놓기 위해서라면, 이번만큼은 명예를 내려놓는다. 그래서 재스민이 캐머런에 관해 가족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얻는다면, 운명도 바뀔 테니까.
-197쪽